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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루바 Oct 15. 2024

[비엔티안] LONG LIVE THE 사바이디!

라오스 여행기 1.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모닝콜이 울리면 그 즉시 벌떡 일어나는 부류와 잘 연습이 된 대사처럼 '10분만 더'를 외치는 부류다. 나는 대체로 인간성이 부족한 전자에 속하고, B는 99.99% 후자에 속한다. B의 평균 기상 시각은 10시에서 12시 사이고, 나는 보통 7~8시쯤 일어나 동네 골목을 떠돌거나 커피와 함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B와 아침을 함께하고 싶을 땐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데, B는 최상의 여행 컨디션을 위해 '10분만 더'(곱하기 n번) 자는 것이 효율적인 것이며 오빠에게도 혼자인 시간을 주고 싶은 마음을 왜 몰라주냐 하니 대화로는 이겨낼 재간이 없다.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본 결과, 지금까지는 자전거를 타자고 제안하는 것이 가장 타율이 높다. 나를 따라 러닝을 하겠다고 카본화까지 구매한 B지만, 어쩐지 아직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자전거만큼은 정말 무한동력처럼 지치지 않고 페달을 구르는 B다.


국경을 넘는 버스는 3시 반에 출발하고 자전거 대여시간은 3시까지였으므로 꽉 채워 메콩강을 달리기로 했다. 농카이~비엔티안 국제 버스는 원칙적으로 출발시각 2시간 전부터 선착순으로 구매가 가능하지만, 아침 일찍 터미널에 가서 국제 버스 표를 판매하는 직원에게 '원칙은 아무것도 모릅니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해한 여행자의 미소와 함께 부탁했더니, 표를 맡아둘 테니 3시까지만 오라고 한다. 재수!

버스가 농카이 국경 검문소에 도착하고 승객들은 잠시 내려 출국 수속을 한다. 버스에 실은 짐을 따로 스캔하는 방법이 있는 건지 아니면 우정의 다리를 건너는 버스인 만큼 원칙적인 절차가 무시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짐을 따로 들고 내릴 필요는 없다. 간밤의 비로 더욱 폭이 늘어난 메콩강은 바다 같고 우정의 다리는 두 섬을 잇는 것 같다. 어느 틈엔가 버스는 가상의 국경을 넘었고 자연스레 라오스 국기가 휘날리는 것이 보인다. 평화가 자리 잡은 국경은 이런 모습이구나. 철책도, 그것을 지키는 병사도, 지뢰도 불발탄도 없이 그저 국기가 바뀌는 것을 바라보며 평화롭게 코를 골면서 지나치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배를 타던 시절, 처음으로 적도를 지나던 때 느꼈던 것도 이런 것이었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저변에 자연스레 깔려있는 평화. 이데아의 평화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국가들의 고상하고 기품 있는 수도들과 달리 비엔티안은 친근하게 느껴지는 도시다. 여러 국가의 수도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도 라오스 여행을 계획하고 나서야 도시의 이름을 알았을 정도로 존재감은 옅지만 이 도시에 발을 들였을 땐, 방콕이나 파리, 서울처럼 어딘지 모르게 빽빽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존재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반에 한 명씩은 꼭 있는 조용하고 매력적인, 그래서 괜히 골려주고 싶은 친구를 보는 듯하다. 빽빽한 빌딩 숲은 보이지 않고, 깍쟁이들도 없다. 추레한 차림에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친절한 사람들이 있고, 주문한 음식은 내가 무엇을 주문했는지 잊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에 나오는 도시다. 옅은 존재감으로 베트남 전쟁을 아는 사람은 있어도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 라오스에 떨어진 포탄의 양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투하된 포탄의 양보다 많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폭격을 받은 나라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사바이디!" 인사 건네며 착실히 하루를 살아가는, 조금은 어수룩한 친구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이 친구가 올바른 심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대로변 우뚝 선 '빠뚜싸이'(라오스 독립기념문)로서 대변된다.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기념하며 세워진 이 개선문은 유럽의 아치 양식을 조금은 얕보며 차용한 듯하고, 그 위의 힌두/불교 양식의 장식들이 하이라이트를 이룬다. 개선문 천장의 삼두 코끼리를 탄 비슈누 신과 나가 신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총 7층까지 이어지는 이 개선문의 내부엔 빠뚜싸이의 연혁과 라오스의 역사와 문화를 간략히 전시해 놓았고 4층부터는 사방으로 비엔티안 시내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빠뚜싸이의 각 변과 모서리의 어설프게 화려한 장식들과 함께 바라보는 도시의 모습은 각 층마다 문과 창문의 양식에 따라 또 다르게 다가온다. 개선문을 내려와 뜨거운 햇살 아래 놓인 광장을 걷고 있으니, 매일같이 비엔티안 최대의 도로를 지나는 국민들이 개선문을 바라보며 정치 체제의 시비를 떠나 지금 이 광장이 간직하고 있는 평화를 꼭 지켜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오스의 전신인 란쌍 왕국의 첫 번째 수도는 현재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루앙프라방이다. 16세기 란쌍 왕국을 통치한 '세타티랏 왕'이 버마의 침략을 피해 천도한 곳이 현재의 비엔티안이다. 또한 지역의 위치상 중부의 비엔티안이 중앙 집권화에 용이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세타티랏 왕'은 버마의 세력이 우세했던 시기에 천도와 함께 침략을 막아내고 란쌍 제2의 전성기를 꽃피웠다. 그리고 이 역사를 가장 잘 나타내는 유물은 단연코 '왓 프라 탓 루앙'일 것이다. 황금사원으로도 잘 알려진 이 사원은 1566년 세워졌고 부처의 갈비뼈를 모시고 있다고 믿어지는 황금 사리탑이 있다. 라오스 불교의 최대 성지이자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이곳을 방문하면 매표소 직원보다도 먼저 나온 '세타티랏 왕' 동상이 방문객들의 알현을 환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선택받은 이 도시의 주인이자 수호자라는 듯이 앉아 있고, 그의 등 뒤로 펼쳐진 하늘과 황금 사리탑은 이를 증명하는 듯하다. 자연스레 예를 갖추고 사원을 둘러보았다. 나는 왜인지 모르겠으나 불상이나 사원보다 사리탑을 볼 때면 꼭 탑을 짓는 과정, 탑에 담긴 마음과 세월이 절로 떠오른다. 그중 무엇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라오스 국립박물관(관람객이 거의 없으므로 조용히 라오스 역사와 문화를 관람하고 싶다면 최적의 장소다.)에 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사리탑도 복원된 것으로 오리지널은 19세기 시암의 공격에 의해 부서졌다. 사진을 보면 가운데 솟은 가장 높은 탑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같은 불교를 믿는 국가에서 한 나라의 가장 신성한 유물에 저지른 짓이 굉장히 폭력적이다. 현대사 자체가 전쟁으로 점철된 역사이지만 라오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것 같다.

이외에도 한때 에메랄드 불상이 보관되었던 호 프라 케우와 씨 사켓 사원도 둘러보았다. 제작 시기도 양식도, 크기도 모습(앉은 모습, 걷는 모습, 선 모습 등 실로 다양하다.)도 다른 수 천개도 넘는 불상을 보고 있자니 변하는 것은 낡고 흐려지고 이끼가 끼는 사원과 불상들이며,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은 달라이 라마의 환생처럼 이어지는 불자들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변하지 않는 불자들의 마음처럼 비엔티안의 날씨 또한 정말 뜨거웠다. 10분만 걸어도 지치고 혼을 앗아가는 듯한 더위였는데, 뙤약볕은 땀이 나기도 전에 피부로 스며들어 열이 계속 축적되는 듯했다. 동네 주민들도 상의를 훌렁 벗어던지고 맥주를 마시던 날들이었고, 절로 우리도 주로 숙소 근처에서 아침저녁에만 활동하게 됐다. 숙소가 위치한 곳은 'Sisavath'였다. 정확한 동네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름을 딴 사원과 여러 숙소가 있었으니 '시사밧'이라 하면 아는 사람은 아는 동네인 것 같다. 여행자들이 모이는 남푸 분수나 메콩강 야시장과는 3km 정도 떨어진 곳인데 난 시사밧이 참 마음에 들었다. 아침저녁으로 번화가도 아닌 거리에 온라인 지도상엔 존재하지 않는 수많은 노점 푸드 카트가 줄을 지으므로 밥 굶을 걱정은 없다. 언어의 장벽으로 입에 맞는 음식을 찾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세븐일레븐을 찾아가려면 5km 이상 걸어야 하지만 이름 없는 동네 슈퍼는 열 걸음만 걸어봐도 다섯 집이 넘는다. 비록 다양한 제품을 취급하진 않지만 사야 할 것이 운 좋게 있으면 사면 되고, 없으면 쇼핑 목록에서 지우면 된다. 이름 없는 골목에서 조금의 불편함은 그렇게 앎이 되고 재미가 된다. 더위를 피해서 또 시원한 커피와 맥주를 찾아 자주 들른 호스텔을 겸하는 카페 '사이롬옌 커피'는 나의 유일한 이름 있는 가게였는데, 그 이름이 참 정직하다. '사이롬옌'은 라오어로 '시원한/상쾌한 바람'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추울 지경으로 에어컨을 틀어놓기에 긴팔을 챙겨야 할 정도다. 어쨌든 시원하고 맛있는 커피와 맥주를 저렴하게, 사이롬옌은 덤으로 즐길 수 있는 곳이니 들러 보시길.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고 여전히 어수룩한 친구 비엔티안과도 작별을 고할 시간. B와 나는 심플한 인사로 자전거를 택했고 두 바퀴의 속도로 아누봉 공원부터 공항까지 이어지는 강변을 달렸다. 머리를 빡빡 깎은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들 네댓 명이 수영에 한창이다. 잠시 멈추어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니 물속에서 손을 뻗어 "사바이디"한다. 리버사이드의 음식점과 바는 저녁을 기다리며 바쁘게 움직이고, 공원엔 산책하는 사람들과 곧 열릴 야시장의 천막들이 하나둘 진열되는 것이 보인다. 그런 것들을 눈에 담는 것과 별개로 날씨는 무진장 덥다. 더위를 먹을 것 같아 상의를 훌렁 벗고 다녔는데, B의 말로는 내가 지나갈 때 공원의 한 할머니가 자세를 고쳐잡고 나를 뚫어져라 봤다고 한다. 절로 웃음이 나고 기분이 좋다. 그저 지나치는 이름 없는 여행자에게 이 모든 게 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묻는다면 내 대답은 심플하다. 'PEACE', 라오어로 "사바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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