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계여행을 함께 열망하고 도모했던,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여행을 함께한 사랑하는 친구 Y의 배웅을 받았다. 출국장 앞에 서서 포옹이라도 해야 할 타이밍이었으나, 그것이 뭐라고 부끄러워 어색한 악수를 청했다. '찰칵'. Y는 주섬주섬 폴라로이드를 꺼내 나의 머그샷을 두 장 찍더니 한 장을 내밀었다. "살아 돌아오라"는 Y의 허접한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씁쓸히 뒤로하고 게이트를 지나려는데 보안 직원이 큰 소리로 날 부른다. (처음엔 날 부르는지도 몰랐다.)
"Hey! Hey!" "This is only for Korean. You should go there!"
그곳은 내국인만 통과할 수 있는 바이오 등록자 전용 게이트였고 나는 말했다.
"저, 한국인입니다."
"어이쿠, 어찌 이런 일이. 정말 죄송합니다."
수염은 항상 무난한 내 인생에 정겨운 에피소드를 만들어준다. 외국인으로 착각한 것이 '정말 죄송'할 일은 아니지 않나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하고 출국장으로 향했다.
푸켓까지 오는 길은 꽤 험난했는데, 첫째로 경유환승과 자가환승의 차이를 몰라 방콕에서 푸켓으로 가는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다행히 공항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제시간에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어쨌든 90일 무비자 입국 도장이 여권의 한 면을 채우고, 난 11kg 짜리 배낭을 메고 당당히 출구로 향했다. 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내가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나와 배낭뿐인 곳. 그래도 항상 입국장의 출구를 지나는 단 몇 초 동안은 어딘가 내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인 A4용지를 들고 꽤 오랜 시간 나를 기다린 누군가를 상상해 본다. 당연하게도 그런 것은 없고 몇 초가 지나면, 수많은 환전소와 택시 드라이버들이 날 원하고 있는 걸 알아차릴 뿐이다. 푸켓에 대한 사전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태국의 역사와 문화를 간단히 기술한 200페이지 가량의 책을 비행 중에 읽었을 따름이다. 여기는 나와 배낭뿐인 곳.
둘째는 스콜이었다. PATONG, KATA, KARON이라는 글자와 함께 요금이 쓰인 커다란 입간판과 소란스러운 호객꾼들을 여럿 지나쳤다. 저곳들이 푸켓의 관광명소인가 보다. 숙소까지 가는 길은 미리 익혀두었는데 공항에서 10km 정도 거리에 있었고, 아침이기도 해서 느긋하고 진득하게 걸어갈 생각이었다. 앞으로 시간은 넘칠 듯이 많으니까, 두 발의 속도로 탐색전을 펼쳐보려 했던 것인데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빗방울이 거칠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비행 중 읽은 책의 구절이 하나 생각났는데 '태국의 우기와 건기는 계절에 따른 구분일 뿐, 우기에도 맑은 날이 많고 건기에도 흐린 날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래, 지나가는 비겠지. 마침 출출하던 차라 비도 피할 겸 눈앞의 식당에 들어가 팟타이와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다. 가족경영으로 추정되며 예닐곱 명이 상주하는 식당이었는데, 영어가 가능한 직원은 이모뻘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명뿐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직원들은 순박한 미소만을 띤 후 사라지고, 곧이어 조금은 짜증스러운 표정의 이모가 나타났는데 재미난 풍경이었다.
커피와 함께 독서를 즐기며 2시간가량을 보냈는데도 비는 오히려 더 강렬해질 뿐 멈출 생각이 없었다. 찔끔찔끔 흩뿌리는 스콜 따위로는 늘 성에 차지 않았다는 듯이 날을 잡고 찾아온 듯한 맹렬한 비였다. 어쩔 수 없이 방수자켓을 꺼내 입고, 스쿠터를 빌려 숙소를 향해 액셀을 당겼다. 그런데 어이쿠. 맹렬한 비와 스크래치가 심한 헬멧의 선바이저(선바이저를 벗자니 맹렬한 비가 눈과 코와 입으로 밀물처럼 밀고 들어왔다), 게다가 익숙지 않은 좌측통행까지! 물어 물어 15분이면 도착할 길을 1시간 남짓 걸려 도착했고 말 그대로 쫄딱 젖어버렸다. 다행히(라고 해야 할지) 시간을 적절히 보낸 덕분에 체크인이 가능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초콜릿만큼 달콤한 낮잠을 잤다. 참, 숙소까지 오는 길에 조금은 기가 죽은 나는 큰 용기를 얻었는데 한 아주머니 덕분이었다. 아주머니께서는 이 정도 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작' 비닐봉지를 머리에 쓰시고, 리어카를 매달은 오토바이로 빗길을 매끄럽게 달려 나갔다.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숙소가 위치한 곳은 푸켓 공항 북쪽의 작은 마을이었다. 지명은 탈랑(Talang) 구에 속하는 마이카오(Mai Khao)이다. 공항에 상주하는 수많은 택시 드라이버와 호객꾼들이 한 번도 언급한 걸 본 적이 없으니 관광 명소에 속하는 곳은 아닌 듯하다. 실제로 마이카오 해변은 수 km 펼쳐져 있지만, 호화 리조트나 술과 음식을 파는 곳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고 파라솔이나 선베드는 하나도 없다. 파도만큼은 소리부터 강렬해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그 소리가 굽이친다. 그러나 해변엔 강한 파도의 흔적으로 떠밀려 온 빈 페트병과 같은 쓰레기들뿐이다. 군데군데 젖은 통나무와 썩어 가는 야자열매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거대 자본의 투자처로 선택받지 못한 그런 마이카오 해변에 누워있노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광경이랄 게 없다. 지치는 법 없이 들이닥치는 안다만 해의 강렬한 파도와 그 위로 저물어가는 태양, 고개를 돌려보면 그 끝이 보이지 않아 점으로 소멸되는 해안과 뒤로는 야자나무들이 울창하게 즐비해 있을 뿐이다. 파도와 태양의 움직임만 제외하면 시간이란 건 당최 멈춰버린 듯하고, 가만히 누워있으면 내 몸도 아주 천천히 언젠가 모래 알갱이로 변해 밀려오고 밀려나갈 것만 같다. 너무 가까워서 마치 글라이더 같은 비행기들이 몇 분마다 이착륙하는 것이 보이고, 단출한 차림의 몇몇 커플들이 일광욕을 즐긴다. 그 넓은 해안에 몇 명이 있는지 셀 수 있을 정도다. (단,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들이닥치면 그들이 기념촬영을 진행하는 몇 분간은 셀 수 없게 된다. 그럴 땐,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마음 편하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몇몇 아이들이 파도 앞에 가서 등을 대고 앉아 놀길래 따라 해보았는데 나는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만큼 강한 파도다. 아마도 그 놀이는 요령이 필요한 듯하다.
아마도 이곳은 밤늦게 공항에 도착하거나, 푸켓을 떠나기 전날 밤 공항 근처에 숙소를 구하는 사람들이 묵고 가는 마을 같다. 실제로 대부분의 상가들이 2km 정도 남북으로 이어진 도로상에 위치하고, 그마저도 듬성듬성하여 며칠 이곳에 묵으면 '아, 여기쯤엔 뭐가 있었지' 할 정도다. 한 번쯤 방문한 가게들을 지날 땐 정겨운 눈인사를 받기도 한다. 그럼 잠시나마 이 마을의 일원이라도 된 듯 가슴이 푸근해지는 따스한 길이다. 그 길을 지날 때면 마치 매력적인 친구와 기분 좋은 속도로 친밀해지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귀중한 시간을 어렵게 내어 푸켓에 온 관광객들이 모든 휴가 기간을 보내기에는 '내 여름휴가가 과연 이래도 괜찮은 건가'싶을 정도로 밋밋하고 한적한 동네다. 어쨌거나 에어컨이 빵빵한 승합차를 타고 다닌다거나 럭셔리한 요트 투어라든지, 작열하는 태양 아래 일광욕과 함께 모히또 한 잔을 기대할 수는 없는 곳이니까 말이다. 내가 이곳에 묵게 된 배경도 나보다 이틀 먼저 푸켓에 가족여행을 간 B 때문이었다. B와 가족들이 묵는 숙소가 가까웠기 때문에 각자 며칠을 보내고 합류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유와는 상관없이 나는 마이카오에 푹 빠져버렸는데...
B를 데리러 공항에 가기로 한 날, 그날은 하루 종일 스콜이 오락가락해서 빨래를 하고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비가 오면 수영을 하고 비가 멈추면 독서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B와 만나기로 한 저녁시간엔 스콜이 완전히 멈췄다. 샤워를 하고 숙소를 나서는데 마침 일몰 시간이었고, 고층의 숙소를 벗어나자마자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푸켓엔 거대 리조트나 쇼핑몰 몇을 제외하면 고층 건물이 없기에 하늘이 낮다. 딱 어느 정도냐 하면 야자나무 정도의 높이에 하늘이 있는데 그 하늘이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난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샛노란 가로등의 색을 훔쳐다 물을 조금 섞어 이리저리 순백의 하늘에 문대 놓은 듯했다. 눈에 담으며 '그렇지, 이건 언제까지고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될 거야'라고 조금은 마음이 일렁였다. 담기지 않을 걸 알면서도 몇 번이고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공항으로 가는 내내 핑크빛으로, 곧이어 연보랏빛에서 어둠까지 밤이 오는 과정을 지켜보는 15분간 참으로 행복했다.
아마 황금도시를 내달리며 내가 느낀 건 '이건 잊을 수 없을 거야'가 아닌 '잊고 싶지 않다'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언젠가 기억의 저편으로 옮겨 가 아무리 더듬어봐도 떠올릴 수 없는 기억이 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순간임을 알아차려 버린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지속됐으면 하는 그런 순간들은 언제나 빨리 지나가버리고 우린 언젠가 어렴풋이 돌이켜 볼 뿐이다. 그런 비지속성, 비일상성, 그리고 필멸성. 역설적이게도 그런 것들이 아름다움을 더할 것이고, 그런 것들을 담은 나의 내부에는 내가 살아있는 한 지속되고 불멸하는 인간다움이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B의 짐을 내려놓은 뒤, 숙소에서 가깝고 늦게까지 술을 파는 듀크 씨네 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마사지를 받느라 일몰을 보지 못했다는 B에게 오늘의 황금빛의 노을이 어땠는지 대해서 열띤 설명을 늘어놓으며, 내가 내일 꼭 잊지 못할 노을을 보여주겠노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이카오에서 이틀을 더 묵는 동안 먹구름이 잔뜩 껴 그런 노을을 다시 볼 순 없었다.
마이카오의 파도와 황금빛 노을의 공통점은 아마 다신 겪을 수 없다는 것, 다시 겪을 수 있더라도 꽤 오랜 시간과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일 테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마이카오의 마지막 밤, 소다 음료를 사다가 B의 가방에서 발견된 반 병 정도 남은 보드카(왜 이런 게 들어있을까?)로 엉터리 칵테일을 만들어 마셨다. 내일은 푸켓 섬 전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402번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남짓 거리의 푸켓 올드타운까지 가볼 생각이다. 굿나잇, 마이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