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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루바 Sep 25. 2024

[방콕] 황금지붕의 도시

태국 여행기 3.

평소보다 이른 아침. 어지러진 짐들을 잠시 외면하고, 아직 몽롱한 B를 데리고 헬스장으로 향한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든 아침 일찍 헬스장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건 진즉에 나와 열심인 친구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 어디에서건 어찌 됐건 '운동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무리들'의 일원이 되는 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다. 운동에 샤워까지 마치고 나면 이제는 해야 할 일을 할 시간, 배낭여행자로서 중요한 의식 중 하나인 배낭 싸기다. 여기저기 늘어놓은 짐들을 그러모아 카테고리화된 파우치에 집어넣고, 필요 없는 짐은 과감히 버리고(B는 이 단계를 어려워한다), 우선순위에 맞게 차곡차곡 배낭에 집어넣는다. 터질 듯한 배낭이 두 개 완성되면, 이제는 그것을 둘러메고 떠날 시간이다.


방콕으로 떠나는 비행기는 오후 5시 20분, 1시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공항 근처에서 식사를 하기로 한다. 공항 앞 대로를 벗어나 편의점 옆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순간 사방이 조용해지고, 작은 마당이 있는 집들이 늘어서 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세상엔 골목에 미친 자들도 있다. 내 친구도 그중 하나이다.)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 호스텔과 식당을 겸하는 작은 가게가 우리의 목적지다. 무거운 배낭 내려놓고 자리에 앉으니, 슬그머니 나타나 선풍기를 켜주며 미소 짓는 꼬부랑 할매 미소가 어찌나 반가운지. 마치 무해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내가 연결된 듯했다. 뒤이어 나타나 주문을 받는 할매와 똑 닮은 미소의 아주머니. 귀여운 모녀가 이 골목의 여왕과 공주 같았다. 정말 맛있었지만ㅡ여왕과 공주의 음식처럼양이 적은 팟 카오 무쌉과 팟 타이를 먹고 일찍 공항에 들어섰다. 국제선보다 규제가 덜한 국내선인데도 보안 검색대에서 두 번 정도 짐을 돌려보았다. 한 번은 용량이 큰 선크림 때문이었고, 한 번은 홍두깨 때문이었다. 홍두깨는 기내 반입이 제한된 각종 무기류의 규제를 피해 내가 호신용으로 휴대하는 것인데, 손잡이가 용이하고 단단하며 매우 견고하다. '홍두깨 세 번 맞아 담 안 뛰어넘는 소가 없다'라는 속담만 봐도 무기로서 홍두깨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여행 기간 중 홍두깨의 사용이 없길 바랄 뿐이다. (보안요원이 홍두깨를 이리저리 살펴볼 때 용도를 물어본다면, 요리(반죽)용이라고 해야 할지 세탁용이라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하니 이미 해도 저물고 녹초가 되어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는 '사톤' 지역에 위치한 곳으로 적당히 방콕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저렴한 가격에 예약하게 된 곳인데, 결과적으로 장단점이 확실한 곳이었다. 장점 중 하나는 푸켓과 달리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술집을 찾기 쉬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방콕 전역에서 어디서든 적용되는 것 같다.) 체크인을 하고 나니 밤 열시가 가까웠던 첫날 합리적인 가격에 식사와 맥주를 곁들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장거리 이동으로 인해 녹초가 된 날엔 맥주 한 잔에 곯아떨어지고 싶은 법이다. 하지만 한숨에 곯아떨어진 나와 달리 B는 거의 밤을 지새웠는데, 피부가 민감한 B가 심한 가려움을 동반한 알러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원인은 창도 없고 환기가 잘되지 않는 방의 구조로 인해 아마 매트리스와 시트에 진드기 사체 같은 것이 존재했던 것 같다. 다행히 큰 수건을 깔고 자니 문제가 해결됐으나, 한 번의 불평 없이 방수자켓을 꺼내 입은 채로 자고 있던 B가 어찌나 씩씩하면서도 안쓰럽던지. 새벽을 지새우고 뒤늦게 곯아떨어진 B를 두고 숙소 주변을 탐색했다. 방콕 최대의 쇼핑몰 중 하나인 '아이콘 시암'의 근처에 형성된 상권엔 식당과 각종 편의 시설들이 늘어서 있었다. 차오프라야 강 근처로 가보니 말로만 듣던 수상 택시들과 각종 크루즈들이 그 넓은 강을 메우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방콕을 떠올릴 때 떠오르는 풍경 중 하나인 그 장면을 선박들이 오차 없이 각자의 시간표에 따라 오가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허술했지만 가까이서 보면 정교했다. 기회가 없어 수상 택시는 한 번밖에 타보진 못했지만, 강하고 넓은 강을 가로지르는 수상 택시는 굉장히 터프하고 방콕의 더위는 쉽게 잊혀질만큼 시원하다. 어쨌든 차오프라야 강을 보고 있으면 강을 따라 방콕 같은 대도시가 형성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방콕의 다양한 먹거리.

방콕에 와서 느낀 것 중 하나는 확실히 남부 지방인 푸켓보다 먹거리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닭고기(가 정말 탱탱했다. B는 그닥 좋아하지 않았지만) 덮밥, 돼지 튀김 덮밥, 뿌팟뽕커리, 건계란면, 오리구이 덮밥, 로띠, 바베큐 & 샤브샤브 등 거의 매일 다른 메뉴들을 접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 맛있고 합리적인 가격의 즐거운 식사였다. 그러나 단 하나, 차오프라야 강 야간 크루즈 투어의 뷔페 식사는 끔찍했다. 수백 명의 승객을 과도하게 수용(그 수를 절반으로 줄이면 쾌적할 것 같다. 물론 돈은 못 벌테지만)한 크루즈는 출항 직후, '지금부터 식사를 시작하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그야말로 전쟁과도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흡사 북한의 선전 포고나 큰 자연재해의 발생으로 앞다투어 라면을 사재기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심지어 북새통과 같은 사람들과는 관련 없이 스케줄에 맞추어 공연이 시작되었는데, 공연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일어서 큰 소리로 건배를 수차례 외치는 중국인들에게는 정말 신물이 났다. 나는 뷔페 식사가 포함되지 않은 승선권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피해 갑판에서 유유히 방콕의 야경이나 즐기고 싶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도 선사 측에서는 돈이 안 될 테니, 목적지 없이 터프한 수상 택시를 타는 것이 나에게는 최선인 것 같다. 그래도 식사를 마치자마자 B와 함께 야외 갑판으로 올라가 몰래 가져온 위스키에 소다수를 섞어 마시며 다채로운 도시 방콕을 배경으로 쓸데없는 얘기나 나눈 것은 즐거운 기억이다. 참, 황금빛의 조명으로 저 혼자 낮처럼 빛나는 여러 사원들도 뚜렷하다.

차오프라야 강 야간 크루즈 투어.

태국의 식당에서 밥을 먹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길래 주문을 하면 5분(아무리 늦어도 10분) 이내에 음식이 나오는 걸까? 아직 답을 찾지 못했으나 어찌 됐건 성격이 급한 한국인들에게는 희소식이다. 안 좋은 소식은 금방 내어지는 음식과 달리 꽉 막힌 교통체증이다. 무에타이 일일 체험을 위해 택시를 불렀는데 방콕의 교통체증을 과소평가한 탓에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늦고 말았다. 다행히 다음 수업까지 여유가 있어 30분 늦게 수업을 시작하게 해주셨다. 우리의 사부는 유달리 장난끼가 많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우리의 이름이 J와 B라고 하니 "오우! J! B! 제! 비! 제! 비! 제비! 푸하하"하며 얼마나 웃어대던지. B는 "그 녀석이 체육관의 감초다."라고 했다. 감초의 수업은 성격처럼 말랑말랑하지 않았는데, 단 하루의 수업이지만 엄격했다. 고작 2분간 미트를 차는 것이 그리도 힘든 일인지 완전히 파김치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90분 수업을 60분으로 단축하고 싶을 정도였다. 사실 미트를 차는 동안은 엘보우를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킥복싱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는데 링에 올라가 감초에게 두드려 맞고 나니 '아, 이것이 무에타이구나.'라고 가슴에 와닿는 무언가가 있었다. 확실히 무에타이는 가볍고 간결하며, 빠르고, 화려하지만 실용적이다. 그리고 강하다! 수업의 마지막에 이르러 B와 스파링을 했는데 태권도 4단 보유자인 B의 돌려차기 미들킥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무에타이의 매력을 느끼게 해준 감초 사부에게, 코 쿤 캅!

무에타이 수련.

방콕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는 '골든 돔 카바레 쇼'다. 사실 카바레 쇼에 대한 나의 인식은 외설적이고 선정적인 코미디였다. 그저 레이디보이(여성으로 성전환한 남자)들이 출연하여 춤을 추는 공연이라는 문구만 보고 말이다. 그러나 그날 밤 내가 본 카바레 쇼는 정말이지 위대한 쇼였다. 비록 모든 공연이 노래는 립싱크지만, 화려한 의상과 무대장치들이 쉴 새 없이 바뀌어가며 이어지는 공연은 단순 춤이 아니다. 마지막 쇼의 주제곡인 'This is Me' 그리고 서로를 더 이해하고, 존중하자는 결론을 향한 힘찬 여정이다. 나는 빨간 장막이 닫히거나 열릴 때마다, 그리고 새로운 음악이 시작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황금 지붕 아래, 이 아름다운 무희들이 얼마나 이 쇼와 관객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지 표정 하나 손짓 하나에서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치 태국의 뭇 불교 사원들처럼 정교하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무대 의상들은 쇼에 대한 애정을 증명하듯 철저하게 관리되는지 어느 것 하나 닳아 있지 않았다. 물론 관객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과격한 쇼맨십의 과정에서 나는 표적이 되어 볼에 키스를 당하기도 했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어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내가 쇼의 일부로서 참여한 것 같아 자긍심이 들 정도였다. 쇼가 끝나고 미스 유니버스 참가자들처럼 반짝이는 왕관과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무희들이 한껏 아름다운 자태로 인사를 건네고 퇴장할 땐 존경심을 담아 연신 박수를 쳤다. 다만, 퇴장한 무희들이 막간의 30분 동안 황금 지붕 아래 팁을 받으며 관객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특히, 레이디보이들의 가슴이 상품화되는)은 개인적으로 좋지 않아 극장을 떠났다. 숨 가쁜 공연 사이 쉬지도 못하고 돈벌이를 위해 카메라 세례를 받는 그녀들에게 나도 두둑한 팁과 함께 카메라 셔터를 눌렀어야 했나 하는 마음이 한켠에 오래 남아 이렇게나마 경의를 표하는 바다.

골든돔 카바레 쇼.

고층 빌딩숲과 각종 바퀴 달린 것들의 소음과 매연, 찌는 더위는 대도시가 가진 각종 이점들보다 나에게 극명하게 다가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일같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사톤 선착장 맞은편 딱신 다리 아래 공원을 찾았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300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트랙과, 배트민턴장, 타크로(태국 족구)장, 풋살장, 그리고 야외 헬스장이 구비된 공원이었다. 꽉 막힌 도로에서 벗어나 구슬땀을 송골송골 맺히게 하는 태양 아래서 운동하는 기분은 정말 끝내줬다. 차오프라야 강변의 시원한 바람맞으며 상의 탈의의 해방감은 누드비치(를 가본 적은 없지만) 못지않았다. 무엇보다 어느 시간대건 각종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로 공원이 가득 차 있고, 다들 아는 얼굴들인지 눈이 마주치면 두 손 모아 "사왓디 캅"하고 인사하는 것이 무척 정다웠다. 이방인인 나에게도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준 이들도 많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동네 형들에게 밀려 골키퍼를 맡고 있는 듯한 꼬맹이부터 무에타이를 수련하고 있는 노부부(기합소리가 엄청났다.)까지, 그리고 각종 스포츠에서 스코어와 함께 울리는 환호성에 새삼스레 내가 살아있구나 싶었다. 그런 기분은 오랜만이라 괜시리 여기저기 앉아보고 둘러보고 했다.


하루는 우리를 잠식하는 대도시를 피해 옛 왕궁 투어를 다녀왔다. 입장료가 비싸 고민했으나 태국 왕국과 방콕의 상징이기도 한 왕궁을 지나치기가 뭐해 한국어 가이드 선생님까지 예약했다. 가이드 '짱뚱' 선생님을 만난 건 행운이었는데, 무척 한국어를 잘하시고 친절하신데다 우리가 예약한 시간대에 우리 둘밖에 없어 단독 투어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짱뚱 선생님의 재치있고 깊이 있는 설명 덕분에 그냥 봐도 경이로운 왕실 사원과 왕궁의 황금빛 아름다움이 배가 되었다. 외관도 분명 아름답지만 특히 태국 국보 1호이자 태국 불교의 상징인 '에메랄드 불상'이 모셔진 왕실 사원 대웅전에 들어설 땐 신성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내부를 가득 채운 벽화와 손톱보다도 작은 단위로 반짝이는 황금 장식들, 그리고 저 너머 고이 모셔진 불상이 모두 침묵 속에서 나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외에도 역대 국왕들의 동상과 국교를 수호하는 도깨비와 원숭이 등 여러 수호신들, 그리고 머리 조아려 기도하는 국민들을 보고 있자니 신성함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태국 여행을 다녀온 아버지께서 "이야, 정말 태국이라는 나라는 앞으로 뭘 하든 해내겠구나라는 에너지가 느껴지더라."고 하셨는데 언뜻 나도 비슷한 감동을 받은 듯하다. 생각해 보면 노부부가 공원에서 무에타이를 수련하는 나라 아닌가. 이보다 강력할 수 있을까.

방콕 왕궁 투어.

어느덧 방콕을 떠날 시간, 제법 요령이 생긴 듯 B도 배낭을 곧잘 싼다. 숙박비도 아끼고 새로운 경험도 할 겸 밤 9시에 치앙마이로 출발하는 야간 버스를 타기로 했다. 빌딩숲을 벗어나 모칫2 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처음으로 방콕의 일몰을 본 듯하다. 그 빛깔은 당연하다는 듯이 정답고 강렬한 황금빛을 표명하고 있다. '황금 지붕의 도시' 방콕은 오랜 시간 내게 이렇게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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