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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원 Jul 29. 2023

출근할 때는 의사
퇴근할 때는 환자

 월요일 아침 네 살짜리 둘째 아이 손을 잡고 버스를 탔다. 나는 병원에 출근하는 길이었고 아이는 병원 내 직장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길이었다. 출근시간이다 보니 버스에 자리가 없었다. 한 손으로 버스 손잡이를 잡았다. 나머지 손으로는 어린이집 낮잠 이불을 든 채로 아이 등 뒤에 손을 대고 나한테 최대한 밀착해서 넘어지지 않도록 했다. 내 오른쪽 어깨에는 어린이집 가방이, 왼쪽 어깨에는 핸드백이 걸려 있었다. 

 다음 정류장에 내릴 차례였다. 아이를 데리고 버스를  때마다 긴장되는 순간이 바로 '내리기 직전'이다. 아이 손을 잡고 버스 계단을 한 칸 한 칸 걸어 내렸다가는 버스 뒷문을 닫으려는 부저 소리가 길게 울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를 번쩍 들어서 안은 채로 서둘러 내렸다. 몇 초 뒤, 몸이 휘청이며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따라 버스 정류장에 노란색 물류 트럭이 서 있어서 버스보도블럭 가까이에 정차할 수 없는 상태였다. 평소와 달리 버스는 보도블럭과 조금 떨어진 도로에 정차했다. 하지만 나는 급한 마음 평소에 버스 정류장에 내릴 만큼 다리를 뻗었고 공중에 뜬 다리는 갈 곳을 잃고 도로 위로 툭 떨어졌다. 귓가에 와그작 소리가 들렸고 나는 도로 위에 철퍼덕하고 넘어졌다. 오른쪽 발목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프다는 느낌 이전에 내 발목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공포감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정신을 차린 뒤 옆을 보니 아이는 옆에 서서 얼어붙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 위에는 낮잠 이불, 어린이집 가방 그리고 핸드백이 나뒹굴어져 있었다.

 다행히 가까이 있는 파출소에서 경찰관이 나와 상태를 물었다. 버스에서 내리다가 다쳤는데 발목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으니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곧 구급차가 도착했고 구급대원이 물었다.

 "보호자분은 어디 계세요?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좀 전에 출근해서 한창 바쁠 남편이 구급대원 전화를 받는다해도 마음만 불편해질 뿐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올 수 있는 보호자가 없어요. 저기 보이는 OO병원 응급실로 가주세요. 거기 직원입니다."

 들것에 들려 구급차 침대에 눕혀졌다. 구급차 침대 옆 작은 의자에는 둘째 아이가 앉았다. 나를 보는 아이의 눈동자가 커져 있었다. 네 살짜리 보호자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의 온기가 위안이 되었다. 

 X-ray를 찍었고 예상했던 대로 오른쪽 발목 골절이 있었다. 응급실에서 처치가 끝나고 휠체어를 타고 병동으로 출근했다. 그래도 손이 다치치 않아 일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부터 아침마다 택시나 남편 차를 타고 아이와 함께 출근을 했다. 병원 앞에 내리면 목발을 짚고 병원 건물로 들어가서 휠체어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휠체어에 앉은 후에 목발을 휠체어 손잡이에 걸었다. 아이를 내 무릎 위에 앉힌 후 양 팔로 휠체어 바퀴를 굴려 별관에 있는 어린이집을 향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면 다시 휠체어를 타고 병동을 향했다. 평소에는 시원하다고 느끼는 병원이었는데 내 무게에 아이 무게까지 더해진 휠체어를 굴리고 나면 등이 땀에 젖었다.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돌아다니는 나를 본 다른 내과 교수님이 물어보았다.

 "병가를 좀 쓰는 게 어떠니?"

 "(속마음) 그러면 제 일은 누가 하나요......? 

  (교수님을 보며 멋쩍게) 하하하...... 아니에요......"

 다들 각자의 일로 바쁘고 때로는 버거운 상황에서 차마 병가를 쓸 수는 없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를 빌며 하루하루를 지워나가듯 그렇게 버텼다. 가운을 입고 휠체어를 탄 나를 보고 우리 병동 환자들은 다리 어하나며 고생한다고 걱정해 주었다. 그의 위로가 감사하면서도 암환자그들의 고통에 비하면 내가 겪는 고통의 무게는 아무것도 아 것 같아 죄스럽기도 했다.

 2개월이 지나도 내 발의 붓기는 별로 호전이 없었다. 정형외과 교수님도 내 발을 보고는 본인도 모르게 마음속 말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혼잣말) 왜 아직도 이렇게 부어있지......?

  (나를 보며) 평소에 다리를 좀 높게 올려놓으세요."

 "(속마음) 아침부터 저녁까지 병원에서 일하는데 어떻게요......?

  (교수님을 보며)네... 알겠습니다."

 의사가 종종 한다는 그 말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과로하지 마세요.'가 생각나서 웃음이 잠깐 나왔다. 스트레스받고 싶어서 받는 게 아니고 과로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듯이, 다리를 안 올려놓고 싶어서 안 올리는 게 아니었다. (병동에서 일하는 상황에서 다리를 심장보다 높은 위치에 올리것은 불가했다.)

 2주가 더 지나 드디어 깁스를 풀다. 정형외과 교수님이 천천히 걸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붓기로 인한 통증 때문에 다친 쪽 발을 조금도 내딛을 수 없었다. 교수님은 그냥 걸으면 된다고 했지만 정말로 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재활의학과를 찾아가서 6주간의 재활치료를 받은 후에서서히 나아졌다. 그리고 조금씩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되자 오른쪽 다리의 혈액순환이 좋아지면서 붓기도 서서히 호전되었다. 다친 지 3개월이 은 시점이 되어서야 드디어 목발 없이 천천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다친 후로 가장 달라진 점은 휠체어를 혼자 굴리는 환자가 유난히 눈에 띈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겠지만 이제는 그게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일인 줄 알기에 어느 과 환자인지 불문하고 다가가서 밀어주게 되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동안 겪었던 수많은 불편함과 의아해하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가장 의외였던 건 깁스를 한 나를 본 병원 사람들의 반응이 여러 가지였다는 사실이었다. 

 첫 번째, 놀란다. 

 두 번째, 어쩌다 다쳤는지 묻는다. 여기까지는 비슷했다. 

 재미있는 건 그다음 반응이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1) 일반적 접근 : 깁스 언제까지 해야 된대?

2) 의학적 접근 : 아직 젊은 데 버스에서 내리다 발목이 부러지다니. 혹시 골다공증 있는 거 아닌지 검사해봐. 3) 감성적 접근 : (감동적인 눈빛) 둘째를 안고 있었는데 니 발목은 부러지고 애는 하나도 안 다쳤다고? 모성애가 그렇게 대단하구나.  

  

 1년이 지난 지금, 발목 움직임이 아직은 뻣뻣하지만 무리 없이 생활하고 있다. 둘째 아이는 구급차를 볼 때마다 '엄마 다리 다쳐서 탔었잖아.'라고 말하며 반가워한다. 구급차를 타본 건 어린아이에게는 무용담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순간순간 내가 목발 없이 다시 두 다리로 걸어 다니고 있다는 게 새롭다. 신호등이 깜빡일 때 횡단보도에서 뛰다가도, 비 올 때 우산을 쓰고 걷다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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