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대답
근데 항암치료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처음 진단받을 때 이미 다른 곳에 전이가 있는 4기 환자
(병기와 상관없이) 재발한 환자
수술할 예정이거나 수술을 이미 한 환자 (주로 2기 또는 3기)
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환자군이 80-90%를 차지한다. 비교적 적은 비율을 차지하는 세 번째 환자군(수술 전 항암치료 또는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은 항암치료 횟수가 정해져 있다. 항암치료를 네 번 하고 수술할 예정이라든지 또는 수술 후에 항암치료를 여섯 번 할 예정이라든지 등이다. 이럴 때 의료진의 치료 목표는 '완치'이다. 암을 '완전히 치료'하겠다는 말이다. 즉, 환자의 몸에서 암세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목표이다. 환자는 암에 걸렸지만 완전히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환자군(4기 또는 재발)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치료의 목표는 '완치'보다는 '경감 또는 완화'에 가깝다. 암이 커지거나 퍼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거나 줄어드는 것'이 목표이다. 그리고 암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 증상들(통증, 복수, 부종 등)을 완화시키는 것 부가적인 목표이다. 그래서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이러한 내용을 반드시 설명한다.
치료 경과가 매우 좋아서 더 이상 암이 보이지 않는 상태(=암의 증거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극히 드물다. 또한 완치라는 개념에는 5년 이상 암의 증거가 없어야 하는데 4기 또는 재발 환자에서 5년 이상 암의 증거가 없는 상태로 유지되는 경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암 진단을 받고 이미 큰 충격을 받았을 환자에게 당신 몸에서 '암'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말이 환자에게 어떻게 닿을지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환자에게 본인의 상태를 정확히 설명해 주는 것 또한 의사의 역할이라 생각하기에 나는 차갑게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며 치료의 목표를 환자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 뒤에 이러한 말을 덧붙인다.
고혈압이나 당뇨병을 진단받으면 대부분의 경우 오랜 기간 약을 복용하면서 '관리'하며 살아가시잖아요. 암도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꾸준히 치료받는다고 생각하시면 되어요.
나도 알고 있다. 암이라는 질병의 무게가 당뇨병이나 고혈압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현재 의학기술에서는 내가 환자에게 덧불일 수 있는 최선의 말이라고 생각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당신의 치료 목표는 완치가 아닙니다.'라는 말만 하고 끝내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갖고 말이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고 나면 환자들은 환자들은 다양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순서로는 항암치료를 시작한 후에 발생하는 것이지만 사실 항암치료 때문만은 아니다. '암'자체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다. 중증 폐렴, 패혈증, 황달, 콩팥 기능 저하 등등. 항암치료를 시작한 후에는 내가 할 일 중 하나는 '서포터'이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에는 잔인한 말을 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치료를 시작한 이상 내 진짜 목표는 이제 '환자상태가 나아지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잘 버티고 계세요. 지금 정말 잘하고 계세요.'라고 응원하기도 하고 '어제 산책은 얼마나 하셨어요? 저 과자는 간식으로 드시는 거예요?'와 같은 가벼운 대화를 건네기도 한다. 입원기간 내내 '어디가 아프세요, 검사결과를 보니 어디가 나빠지셨어요.'와 같은 무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지 않다.
지난달에 황달이 많이 올라서 입원한 50대 담낭암 환자가 있었다(총 빌리루빈 수치가 18.97 mg/dl이었다. 정상 상한치는 1.2 mg/dl이다.). 얼굴과 눈의 흰 자위는 노래지고 매우 높은 용량의 마약성 진통제를 써야 할 만큼 복통이 심했으며 거의 먹지도 못했다. 황달 수치를 우선 해결해야 했다. 항암치료는 미뤄졌고 환자는 3주 동안 세 차례의 시술을 거친 끝에 황달은 많이 호전되었다(총 빌리루빈가 18.97 mg/dl에서 2.7 mg/dl까지 호전되었다.). 이 정도면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회진 때 환자에게 말했다.
"황달수치가 많이 좋아지셨어요. 18점대이었는데 2점대까지 떨어졌어요. 시술이 힘드셨을 텐데도 여태껏 잘 버텨주셔서 이렇게 좋아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아직 배가 많이 아프고 힘드시죠......?"
그런데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선생님이 잘한다 잘한다 애처럼 어르고 달래줘서 여기까지 버텼어요.
고마워요.
환자들에게 격려나 응원을 할 때 그들에게 나의 마음이 얼마나 전해지는지 알 수 없다. 전혀 전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조금이라도 전해지기를 기대하며 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을 들으니 내 마음이 그녀에게 닿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끝이 찡해졌다.
내일도 모레도 내가 보내는 응원과 격려가 그들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