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덕질은 2004년 드라마, '파리의 연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는 주인공 박신양에게 단박에 반했더랬다.
그때 엄마는 일주일에 꼬박 7일을 쉬지 않고 일할 때였는데, 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비디오에 녹화해 놓고 보시면서 고단한 몸과 마음을 달래셨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지 않을 때였는데, 엄마의 그런 마음을 이해 못하고 속으로 주책이라며, 집에 갈 때마다 쌓여있는 비디오 테잎들을 낯설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자기표현에 인색하던 엄마의 그런 모습은 생전 처음인데다, 채신머리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있었다. 엄마가 애지중지 아끼던 그 비디오를 좀도둑이 들어와, 집에 있던 돈과 함께 몽땅 가져가 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대체 그 도둑은 무슨 생각으로 그걸 싹 쓸어간 걸까 싶다. 한 회당 비디오 하나라 양도 제법 됐을 텐데 그걸 어디에 담아 가져갔는지도 궁금하고, 그걸 집에 가져가 처음 틀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도 궁금하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그 도둑은 잡을 수 없었고... (아마도 도둑은 정황상 남자가 아니었을까??) 그 사건으로 엄마는 파리의 연인 비디오를 아예 통째로 사버렸다. 내 기억에 금액이 꽤 됐던 것 같다.
그땐 재방송도 안할 때라 녹화는 꿈도 못꾸었고, 한다 해도 이미 김이 새 버려서 다시 오랜 시간 공들여 녹화할 만큼의 정성이 남아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늘 사는 게 힘들어 날카로웠던 엄마가 그 기간만큼은 좀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으니, 우린 엄마의 그런 과소비?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나도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여러 아이돌과 배우들을 두루 거치게 되면서 ;;; 그때서야 비로소 엄마의 채신없다고 생각했던 그 덕질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더로즈' 밴드의 김우성에게 빠져있...
그리고 시간이 흘러 '미스터 트롯'이 한창 전국의 할머니들 가슴에 불을 지필 때, 엄마도 이찬원에게 투표해 달라며 전화를 곧잘 하곤 하셨다. 한번은 미스터 트롯 영상이 보고 싶어 동네 약국과 미용실에 스마트폰을 들고 가 이것저것 물어보셨다는 얘기도 들었다. 엄마가 이렇게나 적극적인 사람이었던가, 이거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식구들 폰으로 한번씩 다 투표까지 해드렸다. 피자 주문하고 받은 이찬원 부채도 빠뜨리지 않고 챙겨 갖다 드렸다.
그래, 거기까진 유쾌한 일이었다. 엄마의 덕질이 주책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결국은 온가족이 즐거웠다.하지만 지금의 엄마의 덕질은 도저히 지지해 드릴 수가 없게 돼버렸다.
엄마가 할머니들 꽤나 후리고 다닌다는 한 정치인에 빠지셨기 때문이다.
진영이니,이념이니,정책이니 아무것도 모르고 관심도 없던엄마가 그저말 잘하고 잘생겨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그를 지지하고 있다.
사실 정치인을 좋아한다고 무조건 엄마를 염려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엄마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냥 그러다 말겠지... 오히려 누군가를 좋아하고 몰두하는 게,(경험상)무료한 노년기에 활력도 되고괜찮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초창기 그런 분위기와는 달리 엄마가 조금씩 전투 모드로 변해가는 걸 느꼈고, 이전의 단순히 연예인을 좋아하던 일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게 되었다.
엄마가 사는 동네는 전통적으로 수십 년간 그 반대 정당이 득세한 곳인 데다 정치색도 강한 곳이어서, 동네 미용실만 가도 할머니들이 선거철이 되면 지역 내에서밀어주는 정치인 얘기를 공공연하게 커밍아웃하는 곳인데, 그곳에서 엄마 혼자만 반대편을 지지하고 있으니, 내 입장에선 진심으로 걱정이 될 수밖엔 없었다.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그곳에서 자라 근처 대학교에서 날아온고약한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학창 시절을 보낸 세대인지라,아무런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수도 없는데, 아무리 엄마라 해도 그런 엄마의 밑도 끝도 없는 정치 편향을 무조건 지지해 드릴 수만도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그저 말을 아낄 뿐.
가뜩이나 동네에 친한 분도 거의 없고 그나마 마실이라고 가는곳이 그 미용실 하난데, 괜히 눈밖에 나사서 뒷담화의 주인공이 될필요가 뭐가 있겠는가.혹여나 싸움으로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한번은 엄마가 미용실에 머리하러 갔다가 뜬금없이 내게 전화해, 옆사람들모두 들으란 듯 큰소리로 그 지역구 해당 국회의원의 흉을 보시며 엄마가 좋아하는 정치인 칭찬을 아무 맥락도 없이 늘어놓으시는 바람에,내쪽에서 먼저 그만하는 게 좋겠다며황급히 마무리하고 끊은 적도 있었다.
또 민감한 이슈 때마다 나의 의견을 물어서 난감한적도 여러번 있었다. 한번은 연말에 동생이랑엄마네서 하루 지내려고 올라갔었는데, 엄마가 내내 입 꾹 다물고 앉아서마치본인에게 동조하지 않는 우리에게 시위라도 하듯(극단성향의) 유튜브를 몰두하며 시청해서 황당했던 적도 있었다.엄마의 눈빛이 그토록 달라 보인건 그때가 처음이었달까.
동생은 그나마 사이비 종교 같은데 빠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런 곳에 빠지게 둘만큼 적어도 우리 자매가 엄마를 피폐하게 혼자 둔적은 없기 때문이다.
평생을 고생고생 누구보다도 서민으로 살아놓고, 이념이 뭔지도 모른 채 누군가의 외모만 보고 지지해서 표를 주는 이것이 과연 온당한가...어쩌면 그것이 그 세대 정치 지지율의 일부일지 모른다 생각하니 참 답답한 심정이다.
저번에 엄마네 같이 갔던 남편도 차라리 임영웅을 좋아하시지...하더라.
이제는 엄마랑 통화할 때 혹여나 그 얘기가 나오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나...전화기를 누를 때마다 한참을 망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