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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ung Apr 18. 2022

7. 바람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엄마에게 걸거나 오는 전화나 문자의 양은 점점 줄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던가. 우리는 각자 새로이 삶의 루틴을 만들어갔다. 나는 PT를 등록해서 운동을 시작했고, 엄마는 시골에 하나뿐인 요가 센터를 등록했다. 그곳은 내가 엄마의 집을 지을 때 친구와 함께 필라테스를 배우던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 쉬던 도자기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고, 엄마는 이제 다시 커피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특별한 일들은 별로 없었다. 엄마는 2주~1달 사이로 병원 방문을 위해 서울에 올라왔고 그때마다 우리는 가벼운 데이트를 했다. 초가을인데도 불구하고 추운 날씨를 싫어하는 엄마는 서울이 너무 대구랑 다르다며 항상 꽁꽁 싸매고 왔다. 그리고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가 첫 암 판정을 받은 것은 내가 1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딱 1년 뒤였다. 유방암이었는데, 당시엔 아버지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엄마 또한 그렇게 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지식이 없던 중학생 아들들은 여전히 엄마 속을 썩이는 철천지 원수였다. 그리고 엄마의 암투병을 실감하게 된 것은 바로 엄마의 저 모자를 쓴 모습이었다.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엄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전부 밀어버리고 비니를 눌러쓰고 집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머쓱하셨는지 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철없이 엄마 머리 밀었냐며 천진난만하게 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엄마는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절제 수술을 받으셨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암은 다시 찾아왔고, 다른 쪽도 절제 수술을 받으셨다.  


  그때 즈음부터 '바람이'가 생겼다. '바람이'는 걷기 동호회에서 사용하던 닉네임인데, 바람이는 내가 원래 알던 우리 엄마가 아니었다. 바람이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항상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던 우리 엄마와는 너무 달랐다. 주말이 되면 항상 붉은색 옷을 차려입고 북한강, 지리산, 제주도까지 걷기를 다녔다. 그리고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바람 이는 동네 친구들과 술을 먹기도 하고, 뮤지컬이나 콘서트를 엄청나게 자주 보러 다녔으며, 국제전화로 몇 시간씩 친구와 수다를 떨기도 했다. 계를 모아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다니기도 했고, 흥이 너무 넘쳐서 공연장에서 커튼콜을 할 때 온 동네 떠나가듯이 춤을 추고 박수를 쳐서 가끔은 부끄러울 때도 있었다. 집안일을 서로 누가 할 거냐고 투닥거리다가 나는 바람이에게 뱃살을 꼬집히거나 이단옆차기를 맞고는 나뒹구는 게 일상이었고 나는 복수로 마사지를 해준다면서 역으로 꼬집거나 몸을 짓누르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조금씩 점잖아진 것과는 반대로 바람 이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텐션이 높아졌다.   


 바람이는 본인의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입에 달고 사는 말은 '얼른 니들 취직해서 용돈 받으면서 살고 싶다'였다. 항상 일을 너무 하기 싫어했고, 본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때로는 살짝, 때로는 흠뻑 즐기곤 했다. 잊을만하면 다시 나타나던 병의 그림자에서도 계속 바람이는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다루는지 몸소 보여주었다.  지금, 당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소소한 것들에서 완전한 행복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참 멋있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부모님도 나이를 먹고, 변하고, 성장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종종 까먹는다.


 2021.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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