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수업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가 집에 들어갔을 때 마주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현관문 앞에 신발을 벗기도 전에 일그러진 얼굴로 펑펑 울며 발을 동동 구르는 동생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동생은 나에게 "어떡해 형"하고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나는 동생의 방문 앞에 쓰러져있는 아빠를 보았다.
동생이 나보다 5분 정도 일찍 집에 도착했고, 왜인지 방문이 열리지 않아 계속 끙끙대고 있던 와중 문 위로 나와있는 넥타이 끈을 발견했다. 동생은 잘 몰랐지만 무언가 기척이 들어서 온 힘을 다해 방문을 밀어냈고 쿵 하고 떨어진 건 아버지의 몸이었다고 했다. 너무 놀라서였을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버지의 맥박을 재고, 흔들어 깨워보려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호흡을 관찰하려 했다. 근데 아빠의 몸은 너무 차가워서 숨을 쉬고 있지 않았음에도 한기가 서린 공기가 느껴졌다. 나는 15살 치고는 놀랍게도 침착했다.
그리고 잠시의 기억은 없다. 그다음의 기억은 구급대원들이 우리 집안에 가득했고, 나는 엄마를 붙들고 화를 내며 왜 아빠를 혼자 두었냐고 다그치던 장면이다. 작은 아버지, 고모 등 가족들이 너무나 빠르게 집으로 도착했고 엄마는 장례식장으로 향했지만 나와 동생은 경찰서를 갔다. 사람이 병원이 아닌 집에서 사망을 하게 되면 조서를 쓰는 거였던 걸로 기억한다. 최초 목격자인 동생과 나는 생전 처음 경찰서에서 형사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배가 고팠다. 라면 자판기가 있었고 지갑에 꽤 돈이 있어서 라면과 사이다를 뽑아마시며 경찰서 로비에서 뛰어놀았다. 우리를 데리러 오셨던 외삼촌이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에게로 와서 뺨을 치셨고, 덕분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뒤로 꽤 오랜 시간 나는 과거에 사로잡혀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봄 치고는 날이 더웠다. 평소에 굉장히 일찍 자던 우리 가족은 그날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몇 시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빠는 내 방에 들어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잠에서 깼지만 자는 척을 하다가, 너무 불편함에 아빠를 밀어내는 척을 했다. 그리고 아빠는 방을 나갔다. 내가 그때, 아빠를 안아주었다면, 아직 살아계시지 않았을까. 내가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나는 우리 가족에게 평생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동생이 고등학교 2학년, 엄마가 40대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던 봄 즈음이었나. 우리는 정신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날것 그대로 목격한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괴로움과 트라우마가 커졌고 엄마는 가족 모두가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 나는 주말에 따로 다녔는데, 지금 기억나는 것은 병원이 꽤나 멀었고, 7호선 역은 너무 많이 걸어야 했으며, 병원은 어두웠던 것 같다는 기억이 있다. 사실 병원이 어두울리는 없었겠지만, 정말로 내 기억 속 몇몇 병원들은 시골 공포영화 분위기처럼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병원은 한 세 번 정도 갔던 것 같다. 처음 갔을 때는 심리 검사를 했다. 꽤 오래 걸렸고, 결과는 너무 이상했다. 우울감을 호소하는 동생보다, 나한테 우울증 증세가 보인다고 했고 심지어 싸이코패스 성향이 강하다는 결과지를 엄마가 받아왔다. 엄마는 갑자기 눈을 동생에게서 나에게로 돌리기 시작했다. 두 번째 병원 방문에서는 상담을 진행했다. 장난감들이 굴러다니는 방에서 낯선 의사 선생님께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세 번째 방문은, 약을 다시 타러 갔다. 맞아, 항우울제를 처방받아 꽤 오래 약을 먹었다. 그리고 두 번째 죄를 지었다.
요즘은 타이레놀을 많이 먹지만 예전에 우리 집에는 아스피린이 병으로 있었다. 500알이 들어있는 유리병이었다. 어느 날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와서 나는 그 안에 있는 아스피린을 먹기 시작했다. 그냥 먹기가 힘들어서 밥그릇에 물을 받아서 계속 먹다가, 나중에는 그 밥그릇으로 아스피린을 빻아서 먹기 시작했다. 얼마나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는 자다가 일어나 나와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고, 나는 생전 처음 위세척이라는 것을 받았다. 위세척은 너무 고통스러웠다. 의사와 간호사는 긴급하게 온갖 장비들을 동원해 내 몸에 넣기 시작했고 나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뒤틀렸고 꽤 오랜시간동안 스스로에게 무력함을 느꼈다. 다음날까지 나는 먹는 모든 걸 게워냈고 게워낼 때마다 위로 들어갔던 검은색 약물이 계속해서 나왔다.
엄마는 병원에서 내 손을 꼭 잡고 잤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병원을 나와 갈비탕을 먹었다. 우리는 그날 밤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다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모든 일들은 한번 경험하면 그다음은 조금 편하지만, 당신의 남편과 아들이 같은 병과 같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공포감은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약물 때문이라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만, 나는 병원에 더 가지 않았고 엄마와 동생은 그 이후로도 병원을 다녔다.
15년 동안, 내 죄를 후회하고 반성하며 살았다. 가끔은 '내가 아버지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도 이미 결정하셨을 일이다. 오히려 나는 다른 가족과 다르게 마지막 포옹을 느꼈다.'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하기도 했다. 근데 엄마의 죽음이 보이는 지금, 나는 내 죄의식이 다시 한번 나를 덮쳐오는 것을 느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엄마가 암에 걸렸고, 고생을 너무 많이 한 게 내 탓이라는 생각이 한번 떠오르고 나니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엄마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그 마저도 내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2021.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