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방문 이후 엄마는 호스피스로 옮겨졌고 한 번을 깨어나지 않고 계속 주무셨다. 간호사팀으로부터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 와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린이날이었다. 나는 엄마의 영정사진을 들고 기차에 올라탔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크게 틀어놓은 음악이 이어폰을 통해 끝없이 흘러나오는 동안 기차는 빠르게 나아갔다. 5월 6일 금요일, 휴가를 쓰고 주말까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정말 돌아가시더라도 근처에 있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손을 너무나 가지런하게 가슴에 올려놓고 입을 살짝 벌리고 잤다. 이제 엄마의 모습은 예전 그 모습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사람이 죽기 전에 아무리 상태가 안 좋아도 모든 걸 들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간병인분은 내게 계속 엄마한테 말을 걸어보라고 하고는 자리를 비켜주셨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 보는 엄마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다지 다른 말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여행용 티슈를 전부 쓸 정도로 한참을 울고만 있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던 것 같다.
엄마가 나의 엄마여서 행복했다고.
호스피스에서는 환자의 상세 신상정보와 장례준비에 관한 정보들을 미리 취합했다. 종교는 있는지, 장례는 어느 지역에서 치를 건지, 화장인지 매장인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유산 분배 준비는 어떻게 되는지, 유서, 영정사진은 준비가 되었는지 등등 세밀하게 모두 체크한다. 나는 엄마를 만난 직후에 취조실 같은 곳에 앉아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차트 같은 것을 작성하고는 병원을 나왔다. 병원 근처 호텔에 숙소를 잡고 영정사진은 가방 안에 넣어 옷장 안에 두었다가 대구 할머니네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동생을 대구로 불렀다. 기적처럼 엄마는 우리가 내려오고 나서 컨디션을 회복했다. 물론 계속 주무시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우리는 어버이날, 일요일까지 대구에 있었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에 불안한 마음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무언가 시간이 더 생긴 것 같아 안도감 또한 생겼다.
엄마는 항상 어버이날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식들의 마음을 소중하게 여겼었다. 어버이날에 꽃 한 송이 사 오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고는 한참을 삐쳐있었다. 그렇다고 어버이날 뭔가 대단한 걸 바라지도 않으셨다. 그저 구색 맞추기 일지라도 조금의 관심과 노력이라도 보여야 했다. 큰 선물이나 상품권 등을 가져가는 때에도 딱히 기뻐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본인 돈이었을 테니까. 한 번은 30만원 상품권을 아르바이트 급여로 드린 적이 있었는데, 며칠도 지나지 않아 상품권을 잃어버리셨다.
엄마는 툭하면 물건이나 돈을 잃어버렸다. 일정이나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선 철두철미하는 사람이 물건을 하나씩 빠뜨리고 다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딱 그러하다. 어렸을 적부터, MP3, 핸드폰, 지갑, 카드 등 소지품을 1년 넘게 들고 있던 적이 없었다. 이 망할 놈의 버릇은 30대에 접어들어도 고쳐지질 않아 주변 가까운 사람들은 나와 동행할 때면 자리를 뜰 때 뒤돌아보는 습관마저 생겼다. 하지만 만만하지 않지. 그런 사람들과 있어도 나는 귀신같이 물건들을 신나게 던지고 다녔다.
보통 자식은 부모의 가장 닮고 싶지 않은 점을 가장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도 엄마여서 행복하다. 정말로.
2022. 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