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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째붕이 Dec 26. 2023

백 마디 말보다 어니언수프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내일은  맛있는 거 해 먹고 집에서 놀까?

같이 사시는 분이 물었다.


또 놀아?

내가 답했다.


응. 내일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미안해. 미안해.

머리가 땅에 닿게 조아렸다.

올해  결혼기념일과 첫만남기념일에도 놀랍도록 비슷한 대화를 반복했으니 면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느낄 서운함까지 느껴져(나는 T라... 이럴 일은 별로 없는데..) 미안함에 속까지 울렁거렸다.


그리고 바로 그 내일,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분은 어니언 수프를 만들겠다고 했다. 어니언스프로 말할 것 같으면 겸손한 외양과 달리  육수를 만들고 양파를 카라멜라이징하는 데에 엄청난 노동이 투입되는 음식이다. 프랑스에서는 보양식으로도 먹는다고 들었다.


그런 음식을 해준다는데, 어제 그렇게 미안했으면서, 나는 속으로 고작  '두 시간은 걸리겠군.' 하고 생각했다.  '그동안 글을 써야지' 했다. 변명을 하자면... 손 끝에 실어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  시기라 그랬다. 그 슬럼프를 성실함으로 이겨낼 수 있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니, 머릿속에는 앉아서 한자라도 더 써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성실한 열등생처럼 써지지도 않는 글을 붙들다 결국 몇 자 쓰지도 못하고 방에서 나왔을 땐, 식탁에 정성 가득한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손수 차린 식탁 너머로 남편은 카드와 선물을 건넸다.

나는 빈손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면목이 없었다. 우리가 만난 이래로 이렇게 미안했던 적이 없었다.


내가 기념일과 각종 공휴일에 무감해진 것은 (수입 없는) 프리랜서 aka. 백수가 된 이후로 생긴 부작용이다. 말하자면 매일이 노는 날인데 매일같이 놀 수는 없는 일이고  이례없이 매일 노는 것 말고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긴 요즘인지라 놀랍게도 빨간날에 점점 무감해지게 되었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주말도 명절도 각종 기념일도, 그전의 나는 허투루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노는 거 하나는 진심인 사람이었다. 노는 날 하나만 온전한 내 삶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매일이 내 삶이다. 매일이 소중하다. 그렇게 따지면 정말 잘 된 일인데,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한 일 한다고 이렇게 나밖에 모르고 우리에 무심한 인간이 됐나 싶었다.


바게트와 그뤼에르 치즈 가렸지만 갈색 자태가 늠름했던 어니언수프


시간과 품이 드는 음식에는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힘이 있다. 그런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사랑을 느끼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생긴다. 맛있는 어니언수프를 먹는 것이 한편으로 고문처럼 느껴질 정도로 먹는 내내 (내적으로) 엄청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똥 같은 글을 뱉어낼지언정 똥 같은 사람은 되지 말자!

 

백 마디 말보다 어니언수프고, 입이 백 개라도 나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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