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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째붕이 Mar 18. 2023

발리와 발리 사이의 시간

7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며

 2015년 겨울,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한 달간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떠나 마지막 정착지였던 발리를 끝으로 공직에 발을 내디뎠다. 그 당시 나는 사회공포증에 시달려 일상생활이 힘든 상태였다. 기본적인 인간관계가 모두 단절되어 있는 상태였고 카페 종업원이나 아파트 경비원 같이 일상에서 최소한으로 부딪치는  사람들과도 눈을 마주치며 말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식당에서 사람이 없는 시간에 혼자 밥을 먹을 때도 가게 주인이 다정히 웃거나 내 쪽으로 다가오면 식은땀이 났다. 다 늦게 무슨 공부를 하냐고 물을 까봐 겁이 났고, 밥이 맛이 있는지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내 사소한 의중을 물을까봐 마음이 요동쳤다. 편의점에서 물 하나를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포인트카드는 있는지, 봉투가 필요한지 묻는 짧은 질문에도 나는 매번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부모 품을 진작에 떠났어야 할 나이에 부모에게 용돈을 받아 쓰는 파렴치한이었으나, 염치를 도려낸 마음에도 이대로 가다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손상이 생길 수 있겠다는 감각은 있었다. 사달은 형편이 되는 사람과 되지 않는 사람을 가려 날 것 같지가 않았다. 심호흡을 하고 염치가 새로 돋아난 자리를 다시 한번 더 깊게 도려낸 후 엄마에게 SOS를 쳤다. 딱 한 달만 먼 곳으로 떠나있어야겠다고. 같은 자리에서 견디기가 너무 힘이 든다고. 그렇게 딱 백만원을 받아 최저가 항공에 몸을 싣고 인도네시아로 떠났던 게 7년 전이다.


 처음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해 인도네시아 땅에 발을 내딛던 때, 인니어가 내 귀를 가득 채우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말보다 큰 위안이 됐다.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가운데 이곳 어느 한 사람도 내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길 기대하고 있지 않아서, 그게 너무 당연한 일이라 마음이 놓였다. 여기서는 평소보다 조금 더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 말고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래서 햇빛을 받는 일 빼고는 모든 것에 서툴렀다. 모든 것에 서툴어 모든 것을 더듬는데도 사람들은 내게 관대했다. 그들이 내게 어떤 기대가 있었을까. 사람들은 내가 나시짬뿌르를 먹성 좋게 먹는 모습만 봐도, 수에 맞게 돈을 잘 세기만 해도 엄지를 치켜세웠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방인인 나에게 관대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관대했던 사람은 나 자신이었다. 인니 사람들의 미소를 조심스레 좇는 동안 내 안에서 메아리치던 불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바보처럼 말을 더듬으면 안 된다거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엉뚱한 곳을 쳐다보면 안 된다거나 야단치는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 고요함이 낯설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다가 그동안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매섭게 따라붙던 눈초리가 사실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토록 매섭게 꾸짖고 으름장을 놓던 것이 나 자신이었음을. 이 당혹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는지. 내가 나를 의심하지 않으니 나는 인니 사방천지에서 누릴 것밖에 없었다. 자카르타를 시작으로 자바섬을 횡단하여 발리까지 내려가는 여정동안 나는 온몸에 뜨거운 햇빛과 사람들의 친절한 미소를 가득 받으며 기운을 회복했다. 이 따뜻한 기운으로 트라우마틱한 수험생활의 악몽을 몰아내고 공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7년이 지나 2022년 겨울, 나는 다시 발리로 왔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발리에는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어딜 가나 짜낭사리가 놓여있던 고요하고 아름답던 거리의 풍경은 주변 여러 강대국의 자본으로 덧칠되어 시끄럽게 짤랑대는 돈 소리와 지저분한 돈 냄새로 뒤덮인 듯했다. 고즈넉하던 구 시가지에는 호화로운 풀빌라 대단지 분양 사무소와 반짝반짝 빛나는 통유리로 창을 낸 스파 브랜드가 드문드문 입점해 있었다. 여행사마다 인생샷을 남겨주는 인스타그램 투어를 전면에 내걸었다. 그 자체로 아름다웠던 계단식 논 위에 커다란 그네가 흉측하게 내려와 너도나도 환하게 웃으며 사진 한 컷을 남기고 가는 듯했다. 발리는 저 멀리 값비싼 배경으로 물러나 있었다. 비대해진 자아들이 자기를 봐달라 아우성치는 소리에 나는 자꾸만 주의를 빼앗겨 내가 다시 발리로 온 게 맞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발리의 변화를 뜨악하게 바라보았지만 사실 발리도 내가 마뜩지는 않았을 것이다. 7년이란 시간 동안 변한 것은 발리뿐만이 아니었다. 7년 전 발리에서 발을 떼고 인생의 새로운 챕터에 발을 디딘 나 역시 등 뒤로 흉측한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어떤 물질도 영원할 수는 없으니 이게 내가 맞나 하고 반문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발리가 그 거대 자본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 영 애매한 것이 된 것 만치로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이질적이고 기이한 정체성을 되는대로 대충 휘두르고 있었다. 7년 동안 들러붙은 이상한 것들을 잔뜩 둘러매고 와서는 이곳이 왜 이렇게 변했냐며 속상해하고 볼멘소리를 하는 꼴이 스스로도 좀 우스웠다. 


 그러나 이 두 불협화음의 재회가 나에게 일으킨 것은 연민의 감정만이 아니었다. 흉측한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을지언정 나는 예전처럼 무너지기 직전의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사실 나를 어느 정도 감격스럽게 했다. 7년 전 발리를 딛고 이곳 발리로 넘어온 그 움푹 꺼져있는 시간 아래 많은 것들이 묻혀있었다. 그것들이 내게 용기를 줬다. 그것들은 내가 참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와닿지 이야기들과 지루한 풍경, 무뎌지지 않는 냄새와 악취 나는 생각들. 나에게는 참지 못할 일이었으나 조직이라는 피라미드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들. 불합리한 구태의연과 본질보다 중요한 구색의 신화. 이 모든 것을 겪어오면서도 병들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스스로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이 진창을 긴 시간 겪고도 진창의 일부가 되기를 여전히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정체성을 성의 없이 등짝에 얹고만 있다는 사실이 이 친절한 포용의 땅을 두 번째로 밟게 된 이 순간에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큰 용기가 되었다.  



 이곳 발리로 오기 몇 주전, 습관처럼 여행을 하지는 말자고 다짐하고 반년이 지났을 무렵, 문득 발리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또 서툴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가. 하여 나는 이곳에 다시 왔고, 어깨에 지고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이제는 서툴게 내려놓으려고 한다. 안정적인 직업, 매달 보장된 수입, (조롱과 부러움의 경계에 선) 사회적 평판, 내 마음에 차지 못한 보상들. 발리와 발리 사이의 시간 동안 내가 겪은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는다. 겪지 않았으면 어쩌면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이라 착각했을 것들에 대해 알았다. 결국은 버텨냈기에 내 인내심에 대해 조롱했을 목소리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간들 끝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 그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이 아닌지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찾은 발리에서 그저 내가 나답게, 발리가 발리답게 편안할 시간들을 상상해 본다. 다행히 아직도 조그마한 골목 구석구석에는 함박웃음을 짓는 발리인들이 깨끗하게 문 앞을 쓸며, 소박하고 다정한 짜낭사리들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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