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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째붕이 Mar 20. 2023

내 첫번째 결혼식

진정한 사랑은 변하는 게 아니잖아

 내 첫번째 결혼은 내 손가락에 10캐럿짜리 다이아 반지가 끼워지면서 시작됐다. 섬세한 커팅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다이아 앞에서 서약한 사랑은 불멸이어야 했다. 나는 맹세했다. 끔찍하게 아플 때에도, 쫄딱 망해 길바닥에 나앉을 때에도, 별 볼 일 없는 일을 하게 될 때에도, 죽는 날까지 변함없이 사랑하겠다고.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더 높은 연봉을 받으면, 5kg만 더 빼면, 그때 널 사랑해줄게, 하지 않고, 있는 그 자리에서 나를 사랑하겠다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내가 내 손에 끼워준 저 반지는, 물론, 내 눈에만 보인다. 장난이냐고? 그럴리가.


 첫번째 결혼을 하기 전,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 결혼을 앞둔 사람과 헤어지면 바로 결혼을 하게 된다더니, 비슷하게는 나도 그런 셈이다. 그 사람과 이별한 후 나와 결혼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으니까. 그 얘기를 하기 앞서 내 얘기를 잠깐 해보려고 한다. 나는 비일관적인 양육 태도를 지닌 부모 밑에서 양가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하며 자랐다. 사랑과 폭력을 번갈아, 혹은 동시에 휘두르던 아버지의 황당한 사랑고백 앞에서 ‘사랑’은 내 앞에서 조금씩 엉뚱하고 우스꽝스러운 단어가 되어갔다. 그랬으니, 나는 종종 사랑이라는 단어를 앞에 두고 웃음을 터뜨린다든지 경멸의 눈초리를 보낸다든지, 때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나에게 사랑은 속을 알 수 없게 예쁜 포장지로 둘러싼 선물상자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면, 새빨갛게 웃는 삐에로가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튀어나와 한껏 부푼 내 마음을 조롱했다. 그랬으니 나는 사랑 앞에서 한껏 가시를 세웠고, 스물 넷이 되어서야 겨우 연애다운 연애를 시작했고, 투명한 선물상자 같이 사랑을 주던 사람을 만나 그에게 내 가시를 하나하나 뽑히고, 함함한 솜털만 남은 채 그에게 버려졌을 때, 나는 대단히 아팠다.


 그 사람은 첫 직장에서 만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고 취업난이 해일처럼 몰려와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난 후에 구조선에 몸을 싣듯 들어간 직장이었다. 나는 입학과 동시에 06학번 동기들과 ‘로망가든당’을 창당하고 루이스가든이라는 낭만 가득한 이름의 학교 앞 잔디밭에서 허구한 날 병나발을 불어대며 대학생활을 했다. 그러다 한순간 얼어붙은 사회 분위기에 4학년이 되어서야 주섬주섬 돗자리를 챙겨 도서관으로 들어갔으니, 거의 구조된 기분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대기업 IT회사에 입사해 PR과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다. 얼마 후,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남자를 만나 연애도 시작했다. 그땐 집에서 나와 자유를 만끽하며 자취까지 하고 있었으니, 나에게 적대적이던 세상이 드디어 순리에 맞게 착착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는 멋있고, 유능했고, 무엇보다 내 가시에 굴하지 않고 나를 힘껏 사랑했다. 그는 내가 아무리 밀어내도 밀려나지 않는 커다란 느티나무 같았다. 188cm의 큰 키를 하고, 나를 향해 화내고 짜증내는 법 없이, 늘 한결같이 우직하게 서 있었었다.


 시간이 지나며 더 깊어지던 연애와는 별개로, 취업의 짜릿함과 안도감은 몇달을 채 채우지 못했다. 해냈다는 성취감에 구멍이 나고 바람이 빠지기 시작한 순간, 눈치 빠른 불안이 재빠르게 그 자리를 메웠다. IT기업 특성상 회사에는 여자 직원이 몇 없었다. 그마저도 다들 난임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임원 중 유일하게 여자였던 본부장은 출산예정일 하루 전, 프레젠테이션을 끝마치고 두 발로 병원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에서 좀비 바이러스에 점령당한 세상 속에 홀로 살아남은 윌 스미스 뺨치게 애잔한 여성 생존기가 멋진 무용담으로 둔갑하여 구전되었다. 계속된 야근과 스트레스로 얼굴은 여드름으로 뒤덮였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떠오를 때 쯤, 그가 나에게 공무원을 준비하는 건 어떻겠냐고 넌지시 제안했다. 나보다 다섯살이 많던 그는 나와 결혼을 하고 싶어했고, 아이도 갖고 싶어했다. 그는 나에게 느티나무처럼 단단한 미래를 약속했다. 공무원 아버지 밑에서 가난하고 지루하게 자라 공무원이라면 진저리를 치던 나였는데, 그와 함께 그리는 미래가 너무 달콤해서 홀린 듯 회사를 그만뒀다. 이미 대학교 한다리 선후배 중에  행정고시를 패스한 친구들이 몇 있었고, 이제와 7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것은 어딘가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 앞에서 나는 보란듯이 두 차례 시험에서 떨어졌고, 그 사람은 이별을 통보했고, 서른 살이 되어 나홀로 9급 공무원이 되었을 때, 나는 사실, 그냥 딱 죽고 싶었다.


 느닷없이 공무원 준비를 시작해 번번이 떨어지는 딸을 더이상 보고있기 힘들어하던 부모님 손에 떠밀려 나는 농림부 소속의 말단 국가직 공무원이 되어 강원도 평창으로 보내졌다. 하루종일 논밭을 뛰어다니다 퇴근 후 사무소에 딸린 방 한 칸 짜리 관사에지친 몸을 뉘이면 이 모든 일들이 믿을 수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매일 밤 꿈 속에는 그 사람이 등장해, 갖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새벽에도 몇 번씩 잠에서 깨 퉁퉁 부은 눈으로 그 사람을 저주했다. 우리가 결혼할 사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단단한 사실이었다. 결혼이 간절했던 그의 입에서 나온 수 많은 다짐과 약속들이 벼려온 믿음이었다. 그랬던 그 사람이 어떻게 별안간 나를 이 진창 속에 내던지고 떠날 수 있는지, 물음표뿐인 생각이 오랫동안 명치 끝에 걸려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카톡 프로필에 올라온 사진 한 장에 나는 이 조각난 이별을 전체로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고 귀여운 아기의 발바닥 앞에서 그가 바람이 났었다는 사실을 마주한 후, 이상하게도 꽉 막혔던 체기가 단박에 내려갔다. 그것은 내 입맛에 맞지는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은 뱃속으로 넘기기가 수월했다. 그 후로 사랑에 또 속은 나를 자책하며 백지영의 노래가사처럼 이제 다시 사랑 안해 뭐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내 손으로 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즈음에 나의 첫번째 결혼식을 거행하게 한, 트레이시 맥밀란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거다. 그녀는 실연 당한 여자의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나타나, 내 손바닥 위에서 ‘당신이 정말 결혼해야 할 사람’이라는 주제로 TED강연을 펼쳤다. 매춘부 어머니와 범죄자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자란 트레이시는 세 번의 결혼을 했지만, 그 세 번의 결혼 모두 실패했다고 한다. 세 번째 이혼을 겪고난 후, 그녀는 사랑과 결혼을 인생의 구원으로 생각했을 뿐 자기가 정말 결혼해야할 사람, 바로 자기 자신과는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평생을 서약한 그녀는,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도 더 건강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가 제안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 어떤 꼴을 하고 어떤 시궁창에 빠져있든, 타인에게 날 사랑해주길 바라는 바로 그 방식으로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네가 결혼해야 할 사람이 세 번의 이혼을 겪은 이혼녀인데, 이 사람을 평생 사랑할 수 있어?’ 하고 물으면 Yes! 라고 기꺼이 대답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나도 내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묻게 된 거다. 서른 넘어 이룬 것 하나없는 말단 공무원인데, 이런 나라도 결혼해 줄래? 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대답했다. YES, I do! 그 후 놀랍게도 모든 것이 그녀의 말처럼 흘러갔다.


 나는 그때까지 평생 단 세 명의 남자를 만났는데, 첫 번째 결혼식 이후로 2017년 한 해 동안 아홉 명의 남자를 만나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연애를 했다. 그 아홉 명 중 몇 명은 틴더라는 데이트 앱을 통해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 만나기도 했지만, 친구의 페이스북을 통해 나를 오래 봐왔다던 사람이 친구에게 소개를 부탁해 만나기도 했고, 여행 중에 우연히 같이 밥을 먹다 만나기도 했고, 클럽에서 춤을 추다 만나기도 했고, 별의별 루트로 인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결혼수가 든 해였는지, 정말 어디선가 존재하는 사랑의 정령이 나에게 마법가루를 뿌려댔는지, 단지 내가 늘 굳게 가로잠근 빗장을 풀고 마음을 연 탓인지, 모르긴 몰라도 아주 기묘한 해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장대비처럼 갑자기 들이친 그 인연들보다도 더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나는 그 장대비를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그 비 자체가 아니라 비를 맞는 나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너무 잘난 상대는 내가 상처받을까봐, 좀 모자란 상대는 내게 역경을 줄까봐, 잔뜩 웅크린 채 시작을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그 단계를 힘겹게 지나면 저 사람이 날 어느 정도로 생각하는지, 저 마음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상대에 대해서만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내 손을 꼭 잡고, 저 사람이랑 있으면 마음이 편한지, 기분은 좋은지, 상냥한 목소리로 나를 향해 묻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상냥한 내 앞에 풀죽은 얼굴로 연이어 도리질을 치던 2017년의 마지막 달, 나는 아홉번째 남자를 만났다. 그는 틴더를 통해 만났다. 왼쪽으로 스와이핑 하면 싫어요, 오른쪽으로 스와이핑하면 좋아요. 습관처럼 손가락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밀어대다 가볍게 대화를 시작했다. 고작 문자 몇줄에 여중생처럼 깔깔대며 웃다 잠잘 시간을 훨씬 넘기기도 했고, 들뜬 마음으로 전화를 하며 이리저리 걸어대다 엉뚱한 곳에 와있기도 했다. 그가 뉴질랜드와 홍콩으로 연이어 출장을 가는 바람에 한달을 꼬박 대화만 했다. 가치관도, 유머코드도, 맞춤정장처럼 꼭 맞아 떨어졌다. 완벽한 것은 실재하기 어렵고, 사진에서 얼뜻 본 숱없는 머리는 앞으로 다가올 모든 실망을 예견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날이 갈수록 그와의 만남이 꺼려졌다. 그래도 결국 그 날은 찾아왔고, 나는 설렘이 아니라 이 설렘도 이제 끝이라는 아쉬움으로 상수동 이리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좋은 친구도 괜찮지, 마음을 다독이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 얼마 후, 나는 겨드랑이 사이로 땀을 뻘뻘 흘려대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살면서 맛본 가장 큰 안도와 가장 큰 설렘이었다. 숱없는 머리도 막지 못한 사랑의 감정이었다.


 그와 1년 반을 만나고 결혼해 4년을 함께 했다. 우리는 좋아하는 LP를 함께 듣고, 보고싶던 영화를 나란히 보고, 집안 곳곳에 웅크려 대화를 나눈다. 일에 치여 한마디도 하기 싫다는 나를 억지로 쇼파에 끌어 앉힌 그가 대화를 시작하면, 나는 그날 하루 동안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 우리는 직접 해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서로를 보며 행복을 느끼고, 서로에게 주는 선물처럼 집안일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바보처럼 웃으며 보낸다. 우리는 함께 클럽에 가서 춤을 추고, 떨어져 노는 날엔 서로를 향해 ‘잘 놀아!’ 한마디 해주고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한다. 요즘 그는 내가 쓰는 글을 1등으로 읽고 싶어한다. 나는 늦었어, 글렀어, 재능이 없어, 떠드는 나를 3년 동안 구슬러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 볼 수 있게 응원해줬다. 그는 내가 태어나 처음 느끼는 따뜻함이다. 태양처럼 쉬지않고 내뿜는 사랑에 항상 축축하던 내 마음이 이제는 곰팡이 쓴 곳 하나 없이 빳빳하게 잘 말라있다. 나는 가끔씩 울기도, 불안에 굴복한 맹수가 되기도 하지만 나를 격려하는 그의 사랑 앞에 곧바로 정신을 차린다. 사랑이란 단어를 앞에 두고 내 마음은 더이상 고장나지 않는다.


 이 거짓말 같은 행복이, 오랜 불운을 인고한 나를 위한 신의 선물일까 싶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생은 언제고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 예기치 못한 사고가 날 수도, 갑자기 불치병에 걸릴 수도, 그래서 내 인생을 지탱하고 있는 저 사람이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이상할 일 없는 것이 인생이지만 주어진 상황에서 좋은 걸 취하고 앞으로 걸어나가는 건 언제나, 온전한 내 몫이다. 나는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사색하는 법을 배워 좋았다. 나에게 등돌린 사람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배웠으니 그것도 좋았다. 나는 사실 지금 꽤 행복하지만, 행복에 취해 고통에 무딘 사람이 되지는 않으려고, 닥쳐올 시련이 겁나긴 해도 미리부터 겁내지는 않으려고 한다. 내 손등 위로 10캐럿 짜리 다이아가 번쩍거리며 나를 응원하니, 어떤 일이 눈앞에 펼쳐져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며 뚜벅뚜벅 걸어나가자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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