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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째붕이 Mar 19. 2023

kg의 케이지

외모지상주의의 덫에 걸린 한국사회

마트폰 절제력이 뛰어난 나도 가끔씩은 유튜브 숏츠 앞에서 통제력을 잃는다. 지하철에서 유튜브 숏츠에 손을 대면 그날 굳이 무겁게 챙겨간 책은 따스한 겨드랑이 속에서 영영 나오지 못할 공산이 크다. 온유라는 아이의 일상을 기록해 놓은 유튜브 숏츠에 우연히 손가락을 올렸던 날도, 하마터면 거의 그럴 뻔했다.


“엄마 온유한테 궁금한 거 있어.”

“뭔데?”

“어떤 사람이 온유보고 못 생겼대.”

“나 생겼는데?”

“누가 온유보고 너는 왜 이렇게 못생겼어? 그럼 뭐라 그럴 거야?”

“못생기면, 못생겼지 뭐.”


 못생긴 얼굴을 하고 세상 밝게 꺄르르 웃는 아이를 보다가 궁상맞게 눈물이 차올라, 툭 하고 떨어지기 전에 스마트 폰을 끄고 막 따땃해지기 시작한 책을 펼쳐 들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종종 싸패(싸이코패스의 줄임말)라 불릴 정도로 무조건적인 공감에 박하고 무논리 신파에도 잘 흔들리지 않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도 논리가 필요 없이 눈물을 짜내는 존재가 있으니, 그것은 ‘love yourself를 온몸으로 시전하는 꼬맹이’다. 귀엽고 맹랑한 꼬맹이를 앞에 두고 궁상을 떠는 이유는 어린 시절 다정한 부모를 가져보지 못한 채 턱없이 낮은 자존감으로 세상을 허우적거렸기 때문일 테지만 이 자존감 이슈에 대해 우리 부모님의 짐을 좀 덜어주자면, 나는 기질적으로 예민한 아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세상은 내 엉덩이를 토닥거리는 식으로 인애롭게 굴러가질 않았다. 


 기억의 슬라이드를 가장 왼쪽까지 돌려보면 내 자존감을 쩍 하고 가르는 몇 가지 분기점들이 있다. 그것들 중 가장 두드러진 하나는 ‘예쁘다’라는 친지들의 칭찬에 대한 기억이다. 친척들은 만날 때마다 나를 향해 예쁘다고 칭찬을 했지만 ‘예쁘다’라는 말은 결코 혼자 오는 법이 없었다. 항상 단서 조건이 뒤따랐다. “얼굴도 갸름해, 코도 오똑해, 눈도 똥그래, 근데 저 이가 좀….” 가족들은 빙 둘러 나를 내려다보면서 내 눈코입을 뜯어보고 치아를 요리조리 살폈다. 품평회가 끝나면 ‘치아만 교정하면 예쁘겠다.’는 결론으로 마무리한 후 빠르게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비슷한 일은 거리에서도, 학교에서도 일어났다. 그 후로 나는 거울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가 안 보이게 웃는 연습을 하고 입을 손으로 가려 보기도 했다. 그렇게 들여다보면 비뚤한 이가 고쳐지기라도 할 것처럼 오래도록 거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엄마는 교정받기 충분한 나이가 되자마자 나를 치과로 데려갔다. 입가만 정리되면 내 욕심도 차분하게 내려앉을 것 같았는데, 그 후로도 교정이 필요한 것들이 자꾸만 눈에 띄었다. 


 치아 교정이 끝나고 외모에 대한 칭찬은 더 늘어났다. 늘어난 칭찬의 양만큼 불안도 늘었다. 칭찬을 받으면 순간 기분이 좋았지만 곧이어 사람들이 비뚤한 이처럼 내 몸에서 거슬리는 것들을 다시금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불안은 한 번에 튀어 오르지 않았다. 수면에 잔잔하게 붙어 눈을 번뜩이는 악어처럼 천천히 마음 위로 올라왔다. 사람들을 실망시킬 만한 것들은 사실 끝도 없었지만, 그 무렵 2차 성징을 겪으며 오동통하게 올라오던 뱃살이 가장 먼저 타겟이 됐다. 내가 중학생이던 2000년 나는 내 또래였던 보아의 공중파 데뷔에 자극을 받아 ‘물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물론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실패했지만 돌이켜 보면 160cm에 38kg이라는 마른 몸을 하고 하루종일 물로만 버틴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어딘지 괴이하다. 물 다이어트를 시도하고 난 후 어느샌가 내 옆에는 ‘음식 경찰’이 따라붙었다. 밥을 많이 먹거나 군것질을 하면 곧장 달려와 사정없이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하지만 죄책감은 음식에 대한 욕망만 더 크게 부추길 뿐 살은 다이어트와 반비례해 계속해서 차올랐고 드디어 고3이 되었을 때, 교복 블라우스 단추가 뽁 하고 떨어졌다. 교복을 다시 맞췄다. 지나가는 선생님들마다 고3인 나에게 살 좀 빼라고 핀잔을 줬다. 그래봤자 나는 겨우 52kg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하니 평가는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누가 누구보다 예쁘다는 얼굴 순위 매기기는 기본이고 술자리에서 누구는 얼굴은 예쁜데 다리가 두껍다는 둥 몸에 대한 평가도 서슴없이 튀어나왔다. 그러는 사이 내 불안은 이미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고 뭍까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방송에서도 얼마나 예쁜지를 논하는 것에 다들 거리낌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과 몸에 너무나도 관심이 많았다. 고등교육을 받는 지성인답게 나는 강의실에서 캠퍼스에서 침을 튀기며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했지만 집에 오는 길엔 병원에 들러 지방분해 주사를 맞고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았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44kg가 되었다. 외모에 대한 만족감과 함께 식욕을 내 절제력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기효능감까지 올라갔다. 나는 다이어트뿐만 아니라 다른 무엇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 아니라 다이어트를 위해 두세 시간씩 매일같이 걷기까지 했으니 기분도 상쾌했다. 그때부터는 그레고리안 성가가 내 몸에 울려 퍼지듯 다이어트를 향한 믿음이 장기 곳곳에 스며들었다. 다이어트가 인생을 구원할지어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반감과 그를 향한 불안이 커질수록 다이어트로 인해 외모 만족도가 향상되고 있다는 사실은 점점 더 나 자신에게도 비밀이 되어갔다. 건강 역시 내 관심사 중 하나였으므로 건강한 삶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라 스스로를 속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그 이유마저 필요 없이 사이비 종교처럼 다이어트를 맹목적으로 찬양했다. 주변의 여자들을 둘러보면 신앙심의 크기만 다를 뿐 거의 한 명도 빠짐없이 같은 종교를 믿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모여 신앙심을 다지고 간증도 했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다. 우리는 건강하지도 않았고 원하는 만큼 날씬해 지지도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이어트가 이어질수록 살이 빠지고 찌는 진폭이 늘어났을 뿐 결국 체중계에 찍히는 숫자는 더 높아져만 갔다. 나는 실패에 굴하지 않고 더 다양한 시도를 했다. 저열량 다이어트부터 고구마 다이어트, 지방 위주로 섭취하는 키토다이어트, 간헐적 단식까지,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기를 반복했다. 스스로를 굶길수록 몸무게에 집착할수록 식욕은 화마처럼 포악해졌다.  


 그러던 내가 이 다이어트 오컬트에서 잠시 해방된 것은, 머나먼 호주 땅 위에서였다. 그 당시 내가 만난 대부분의 호주 사람들은 편안한 몸에, 편안한 얼굴을 하고 쾌활하게 웃으며 요즘 꽂힌 맥주 양조장이나 어제 있었던 웃긴 일  따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가 멋지니 예쁘니 하는 종류의 얘기는 입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호주에 살던 1년 동안 내 외모와 내 몸무게에 신경 쓰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한 번은 친구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말버릇처럼 다이어트 얘기를 꺼냈다가 “그 정도 살찐 게 뭐가 문제야?”라든지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라든지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경험한 후로는, 나마저도 내 몸을 향해 길게 뽑혀 있던 안테나를 납작하게 접어 넣어버렸다. 몇 달이 지나고 후덕해진 마음만큼 몸도 다시 후덕해졌지만, 나는 거울 앞에서 ‘못생기면, 못생겼지 뭐.’하던 꼬마처럼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행복한 1년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자존감이 좀체로 내려오지 않아 1년은 살을 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다이어트의 길을 걷게 되었고, 다시 날씬해진 나를 앞에 두고 내 친한 친구는 이렇게 고백했다. “너 귀국했을 때 완전 노사연 닮아서 나 진짜 깜짝 놀랐잖아. 근데 네가 행복해 보여서 나도 그냥 암말도 안 했어. 아휴, 이제야 돌아왔네.” 


 나에 대한 얼평은 차치하고…. 노사연은 훌륭한 가수이다. 그런 그녀가 왜 목소리가 아니라 뚱뚱하고 큰 얼굴의 대명사가 되어 오직 생김새로만 평가받게 된 걸까. 예쁜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사정은 다 비슷하다. 제 아무리 변호사에 의사라 해도 직업 앞에 ‘미녀’가 붙으면 직업보다 외모가 더 중요한 스펙이 된다. 좋은 일을 해도 나쁜 짓을 해도 누군가 ‘예쁘냐?’라고 묻는 순간, 얼굴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요즘은 세상이 달라져 여성을 대놓고 대상화하는 일도 드물고 탈코르셋 선언을 한 여자들까지 있으니 이제 좀 세상이 바뀌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하나같이 인형처럼 예쁜 아이돌과 매대에 깔린 여아용 화장품, 필터로 보정해 완벽에 가까워 보이는 인스타 사진들을 보면 요즘 아이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이제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 역시 그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쁜 게 최고라고 속삭이며 신체이형장애를 부추기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모두 불만족하다. 불만족한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고, 그 어른이 주축이 되는 세상을 생각하면 난 좀 오싹해진다.


 나는 여느 사람들처럼 실패와 재도전을 반복하며 다이어트를 해왔다. 그러나 다이어트 강박에 쉼 없이 시달리면서도 나에게 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고작 5-7kg 범위에서 증량과 감량을 반복했을 뿐이고 먹고 토하는 폭식증이라든지, 무작정 굶는 거식증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동창모임 따위를 앞두고 살을 빼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든지, 한 번의 과식에 절제를 잃고 ‘그래 오늘만 먹고 내일부터 시작이다!’ 하고 입이 미어터지게 최후의 만찬을 즐긴다든지, 스트레스를 핑계로 음식을 욱여넣는다든지 하는 일들이 점점 잦아졌고, 폭주 후 후회와 책망으로 엉망이 된 기분이 바닥을 뚫고 내려가던 어느 날, 나는 입에 소화제를 털어 넣으며 이것이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찾아보니 내가 겪던 증상은 DSM-5 정신질환 진단 기준에서 BED(Binge Eating Disorder)라는 식이장애의 중등도(moderate)에 해당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후로 나는 내 인생에 영원한 다이어트 종료를 선언했다. BED라는 병명을 알았으니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 ‘직관적 식사’라는 치료법도 알게 되었다. 직관적 식사는 간단히 말해, 배가 고플 때 칼로리 계산 없이 마음껏 먹고 배가 부르면 수저를 내려놓는 식사법이다. 이 당연하게 들리는 원칙을 따르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때때로 날씬한 친구들을 보면 나도 다시 날씬해지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모임이나 약속이 생기면 하루 이틀이라도 절식을 해서 조금 더 완벽한 모습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조금만 살을 빼면 나는 좀 더 흡족한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결국 내 마음을 커다랗게 흔든 ‘조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마음을 다 잡는다. 나는 못생겨도 괜찮다고 살이 쪄도 괜찮다고 이제는 너무 커버린 내 엉덩이를 토닥인다. 이것은 나의 어른들이 실패한 일을 대신하는 일이고 자라나는 누군가에게 실패하지 않기 위해 어른으로서 해나가려는 노력이다. 몸에서 잣대를 걷어내는 일에 실패하면 우리는 존재만으로 영원히 패배자가 된다. 세상에 실패할 일도 많은데, 내 존재로 실패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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