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철학에서의 '체계성'과 '서술'
(칼 세이건의 아내 앤 드루얀의 서문 中)
우주의 방대한 역사와 비밀을 담아낸 칼 세이건의 명저 <코스모스>는 이 짤막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저 문장은 어딘지 모르게 철학적인, 일종의 진리 명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엄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확립된 체계로부터 우리는 종종 어떠한 철학적 인상을 받게 되곤 한다. 그러한 철학적 인상은 특정 분야의 체계가 고도의 성취를 이뤄갈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천체물리학과 철학이 대체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의 다양한 학문 체계를 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정교한 탑에 비유해보자. 형태나 용도와 무관하게 탑은 자기 자신을 지반으로 삼아 더 높은 곳으로 오른다는 근본적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어떤 탑이든 간에 그 마지막 층에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드높은 하늘과 수많은 별들일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학문들은 어느 정도의 같은 방향성과 목적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학문들이 결국 그러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관점에서, 어떠한 학문이 스스로는 극복이 불가능한 난관에 봉착했을 때에 다른 학문 체계로부터 돌파구를 찾는 건(비록 그 시도가 실패할지라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양자물리학자들이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생물학자들이 에스키모 구전설화로부터 유의미한 가설을 세우는 것은 우리가 쌓아 올리는 탑들이 같은 하늘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철학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철학은 단연 인류가 가장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쌓아 올린 탑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높고 정교한 탑을 쌓는다 할지라도 우리 인류가 저 머나먼 별들에 도달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헤겔이 말했듯 단지 우리의 시선을 저 하늘의 별들로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도 분명 우리의 정신은 고양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무의미한 발버둥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어쩌면 인간은 끝내 닿지 못할 머나먼 진리의 별들을 갈구하며 끝없이 위태로운 탑을 쌓아야만 하는, 그런 숙명적 존재들인가?
체계성은 모든 학문 분야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러나 헤겔에게 철학의 체계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타의 학문들과 달리 철학적 진리를 서술하는 방식은 단지 지식들의 집체물이나 내용 자체에 대한 역사적이고 몰 개념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철학에 있어서는 종종 ‘목적’과 ‘결론’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마치 본질적인 것이며 그 내면을 표현하는 일인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이 정말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면 그것은 곧 사태(철학에서의) 자체에 대한 회피를 의미하게 된다. 철학에 있어서 목적과 결론은 책의 겉표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만을 훑고 그 내용을 파악했다고 하는 것은 순진함이나 오만함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표지를 제작하는 데에만 공을 들인다면 그것은 책의 본질에 대한 무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 될 것이다. 철학의 본질은 표지가 아닌, 그것을 직접 펼쳐내고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 그러므로 목적과 결론이 다른 학문에서 지니는 의미와는 다르게 철학에서 그것들(목적과 결론)은 목적이 되어서도 결론이 되어서도 안 된다. 철학을 함에 있어서 깊은 사유의 과정이 아니라 그 목적과 결론에만 천착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저 허수아비 같은 주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어떠한 역경도 노력도 수반되지 않고서, 단지 목적에 따른 결과로서 얻어진 ‘진리’란, 그 얼마나 공허한 대답이란 말인가?
헤겔은 그러한 진리를 분명 ‘정신이 없는 것’이라고 평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참된 진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정신현상학>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헤겔의 대답이다.
<정신현상학>은 학문체계로 들어서는 입구이자 사다리인 동시에 그것(학문체계)의 제1부이다. 즉 참된 진리를 구하기 위한 도구이자 진정한 목적(참된 진리)이 되는 학문인 것이다. 헤겔은 참된 형태의 진리는 오직 진리의 학문 체계 속에서만 실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철학에서는 내용이 본질적으로 형식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체계는 진리를 담는 그릇인 동시에 그 내용의 일부가 된다.
어리석은 자는 스승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바라본다는 옛 이야기가 있다. 달이 중요한가, 손가락이 중요한가? 이러한 논의는 헤겔의 관점에서 무의미할 것이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달도 아니고 손가락도 아니기 때문이다. 달을 지시하는 손가락과 손가락에 의해 지시되는 달, 그 사이의 유기적 관계 속에 진리가 생성되는 것이다. 체계는 목적과 결론을 비롯한 다양한 사유의 결과물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입증하는 틀이 되는 동시에 내용의 일부가 된다. 그러므로 철학이 다루고자 하는 사태는 목적이 아닌 수행과정에서 남김없이 다뤄지고, 결론만이 아닌 결론의 생성까지도 함께 전체를 이뤄야 한다. 다시 말해 사태를 다루는 과정에 있어서 진정 중요한 것은 목적의 ‘수행 과정’과 결론의 ‘생성 과정’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인 철학에서, ‘진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탐구’다(어쩌면 둘은 같은 의미일수도 있다).
헤겔은 ‘Philosopher’들의 철학 즉 '지知에 대한 사랑'만이 아닌 보다 현실적인, 실현된 지知를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 지知에 대한 사랑’(감각적이고 직접적인)을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달에 매혹되어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부터. 그리고 ‘지의 실현’ 즉 학문 체계의 확립은 ‘서술’을 통해 이루어진다. 헤겔에게 진리는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입증된 개념이다. 직접적 지에 머물러 있는 이들의 요청(진리에 대한)에 응답할 수 있는, 체계적으로 스스로를 서술하는 진리야 말로 참된 지다. 체계적인 서술을 통해 지는 진정한 형태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참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생성’의 힘을 지니고서 과정을 서술해 나간다. 물론 그 생성 과정은 순탄치 않다. 직접적 정신이 진정한 지가 되기 위해서는 긴 도정을 애써 헤쳐 나가야만 한다. 학문은 정신의 도야 운동에 대한 엄밀한 서술이며 정신이 지닌 각각의 계기들에 대한 서술이다. 모든 계기들은 그 자체로 전체이며, 전체로 고찰되어야 한다. 그리고 계기들은 전체로 고찰됨을 통해 절대적으로 고찰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계기들에 천착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각각의 계기들을 그런 절대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서술’이 학문의 체계성을 정립하고 여러 계기들을 통합하여 전체적인 지를 생성한다. 체계는 밖이 아닌 안으로부터 정립되고 전체가 아닌 개별성으로부터 통합되어가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헤겔에게 서술이란 단지 진리를 설명하는 도구가 아닌 그것이 자신을 전개하며 완성해 나가는 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참된 것은 전체적인 것이며, 전체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전개(서술)하며 스스로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참된 것은 ‘전제’된 것이 아닌 ‘생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헤겔은 '전체주의자'라고 오해받기도 한다.)
지에 대한 사랑을 극복하고 나아가 형식적이고 체계적인 지를 획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탐구해야 할 사태이다. 헤겔은 칸트가 규정하고 한정지은 이성을 극복하고 주관화된 인식과 감성으로부터 나아가 개념적 진리를 탐구하는 이성을 추구했다. 철학에서의 체계성은 단지 진리의 실존 가능성만이 아니라 그것의 보편화에도 중요한 요소로 여겨진다.
헤겔이 추구했던 철학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귀족, 권력자, 천재)의 비교(秘敎)적 전유물이 아닌, 진지한 사유를 하는 모든 이들에게 허락된 학문이었다.
개념적 사유와 철저한 논증 과정은 그러므로 ‘지의 실현’과 대중들의 보편적 이해(도야Bildung)라는 두 가지 상이한 목적을 통합하고 성취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지의 실현’과 ‘보편적 이해’는 각각 개별성과 보편성을 나타낸다. 헤겔은 철학이란 보편성을 추구하되 그 속에 개별성과 특수성을 함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개념적 사유의 체계적 논증 과정인 ‘서술’은 두 가지 측면에서 동시적으로 이뤄져야만 한다. 첫번째 측면은 철학이 당면한 사태인 절대 정신 혹은 진리를 엄밀한 과정을 통해 실현하는, 마치 하늘의 별을 지상으로 가지고 내려오는 것과 같은 하강의 과정이며 두번째 측면은 반대로 ‘감각적인 것, 통속적인 것, 개별적인 것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고 ‘시선을 들어올려 별을 향하도록’ 만드는 상승(도야Bildung)의 과정이다. 이러한 상반된 과정들이 서로의 과정과 개념으로부터 힘을 얻어 운동하는 것. 마치 지구와 달이 서로를 끝없이 끌어당기고 밀어내면서 조화롭게 공전하는 것처럼, 본질적인 모순의 바탕 위에서 늘 긴장된 상태인 그러한 이성이야 말로 참된 생명력을 지닌 이성이다. 어쩌면 이러한 진리의 생성은 무의미한 제자리걸음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은 그저 사유가 시작된 바로 그 지점으로 돌아올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동일성을 거쳐 다시 동일성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다시금 되찾은 동일성이야 말로 참된 의미를 지닌다. 반복되는 천체의 운동 속에서 조화와 순환 그리고 생명이 탄생했듯이 말이다. 자명한 사실(다시 시작지점으로 돌아올 뿐일)에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는 고통의 과정, 그것이 곧 전체적인 지를 생성하는 방법이다. 즉 진정한 진리는 매개를 필요로 한다. 매개를 통해서만 진리는 전체적이고 참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엄밀한 체계성 속에서 스스로를 서술하며 끝없는 매개 과정을 통해 생동하는 원환 운동. 그것이 바로 헤겔의 변증법적 세계관을 구성하는 원동력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격동하는 유럽의 정세, 무지몽매한 대중과 계몽을 촉구하는 지식인들, 끝없이 고양되는 정신과 전쟁의 포화로 황폐화된 도시. 그러한 공존할 수 없는 이념의 광풍 속에서 헤겔 철학은 탄생했다. 원고를 품에 지니고 피난을 다녀야 했던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는 지름길을 찾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묵묵히 지난한 사유의 노동을 행했다. 그에게 엄밀한 체계성과 인고의 서술 과정은 참된 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역사 속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분열의 시대. 그런 시대 속에서 헤겔은 도처에 만연한 무분별한 대립과 모순을 철학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파괴하고 통일하고자 했다. 정신은 자신이 극복한 분열의 크기만큼 성장한다. 절대 정신, 진리를 향한 여정 역시 마찬가지다. 분열과 극복을 반복하는 과정 속에 진리로의 길이 있다. 헤겔 철학에서 ‘체계성’이란 절대 정신을 향하여 끝없이 다가가는 인고의 과정이며 참된 진리가 깃들게 될 공간이자 저 높은 별들을 향해 묵묵히 쌓아 올리는 진리의 탑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