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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nina Jul 16. 2020

면접 결과 발표날 도착한 엄마의 택배 상자

엄마 택배 상자 파먹고 나면 드는 생각

엊그제 면접을 망치고 왔다는 글을 이미 썼더랬습니다. 어제가 면접 결과 발표일이란 것도요.


저는 내향형이지만 '면접'처럼 미리 준비하여 남 앞에서 말하 일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항상 그 자리에 맞는 '철저한 준비'는 필수입니다.


엊그제 참여한 면접은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자만은 아니었지만 꼭 가고 싶은 곳도 아니어서 집중이 잘 안되었어요(변명과 핑계가 구차하네요ㅠ).


준비랄 것도 없이 가서 덜덜 떨고 울며 나왔던 대학 수시 면접 경험 후, 흑역사가 하나 더 추가되었습니다. 직업상담사 자격을 가지고 인력개발기관에서 10년을 근무했는데... 자괴감도 들고 부끄러웠습니다.


면접 자리든 일터에서든 '같이 일하고 싶다'는 이미지를 남기고 싶은데, 어제는 '같이 못해먹겠군'하는 인상을 주고 온 것 같습니다.


면접 결과는 이 쯤되면 예상하셨겠지만, '불합격'. 예비 합격자도 못되었더군요. 자존심이 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공공기관이라는 점만 좋았고, 직무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방문했을 때 체감되는 그 공간이 주는 분위기 또한 저와 맞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면접장소 세팅, 면접에 대한 안내, 제 눈에 비친 직원들의 표정, 면접 심사위원들의 태도 등등. 조용한 와중에 느껴지는 그런 부수적인 부분들에 저는 왜 항상 영향을 받는지...


면접에서 중요한 것은 '면접대상자의 답변'일 겁니다. 여러 지원자 중 바로 업무 투입이 가능한 적합한 인재가 누구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니까요. 정작 가장 중요한 '내가 그 기관에 채용되어야 하는 이유'와 같은 답변은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준비 안 된 제 자신에 대한 자책, 불만스러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핑곗거리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책망 그만하고. 면접까지 온 상황인데 왜 집중을 못한 거야?'


자문해보니 9:00~18:00라는 근무시간 앞에서 '내가? 6살 애 키우면서 풀타임 일을? 가능해?'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고 '충분히 가능해'라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현재는 남편도 구직자라서 시간이 많습니다. 제가 풀타임 일을 하더라도 남편과 함께 아이 케어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시간이 많을지도 모르고 계속 시간이 많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제 근무를 희망하지만 그런 일자리는 잘 없습니다. (어쨌든... 이런 투덜거림을 할 상황이 아닌데도 면접에 집중이 되지 않았어요ㅜ)


그렇다고 부부 둘 다 실업 상태인 채로 계속 있을 수도 없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을 해야 생계가 유지되지요.(남편이 모르는 빚도 갚아야 하고요) 여기저기 입사지원도 하고 면접도 보러 다닙니다.


그런데 막상 면접의 기회가 오니, '풀타임? 사실 자신 없어!'가 진심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탈락이 예상되는 면접 결과 발표를 기다리며 집에 있기는 싫어 밖으로 나와 버스도 타고 길도 걸었습니다. 우산 없이 마주친 갑작스런 보슬비에 머리도 젖고 안경도 뿌옇게 되었지만 그냥 좀 걷고 싶어서 가로수 아래로 걸었습니다. '지이잉-' 문자가 왔습니다.


 '이번 채용에는 미선정 되었으나, 향후 꼭! 함께 근무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집에는 더 가기 싫어지고 비 맞고 걷는 것도 싫어졌습니다. 근처를 둘러보고 서점이 있어 들어갔습니다. 이 책 저책 기웃거리며 기분이 좀 나아졌어. '집에 갈까?' 싶었는데  '지이잉-' 문자가 왔습니다. 00 택배 도착 예정을 알리는 문자였습니다. 저희 집에 오는 00 택배의 발신자는 1명뿐입니다. 엄마.


집에 가기 싫던 발걸음을 재촉하여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뙇! 테이프로 온몸이 둘둘 감긴 커다란 엄마의 택배박스. 리 꽁꽁 싸매 넣으시고 터질세라 두 번 세 번 테이프를 감으셨는지. 가위로 열어 보니 대하 수십 마리, 꽃게 열 댓마리, 애 팔뚝만한 참외, 감자, 마늘, 양파, 쌀이 봉지봉지 담겨 있었습니다. 남해에서 죽방멸치 일을 하시는 친정 부모님. 요즘 멸치가 많이 잡혀 발막에서 멸치 손질하시느라 멸치 지옥을 보내고 계신데... 가서 도와드리지도 못하고 있던 터라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교차했습니다.   


대하와 꽃게는 남편과 아들 모두 환장하고(!) 좋아합니다. 꽃게와 대하를 그냥 삶아도 먹고 라면에 넣어 해물라면으로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먹기 전에 전화하려 했는데, 맛있게 먹었다는 인증샷보내 드리겠다는 핑계로 먹고 나서 전화를 드렸네요).


멀리 계셔서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 하는데. 마음은 전화를 자주 드리고 싶지만, 지금 부부 둘 다 실업상태이고 큰 걱정을 끼쳐드린 게 있어 최근에는 전화드리는 걸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드렸어요.


"고생스럽게 뭘 이리 많이 보내셨어요~ 엄마 덕분에 오래간만에 꽃게랑 새우랑 실컷 먹었네요."

"꽃게는 살이 실하더나? 바빠서 많이 못 보냈네."

"꽃게 살 많던데요? 이것도 다 먹으려면 한 참 걸려요~"

".... 전화도 좀 자주 하고 그래라."

"네~ 일 좀 풀리면 좋은 소식으로 전화드리려고 했죠. 전화 자주 드릴게요."

".... 내가 너를 좀 더 잘 키워 줬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많이 못 도와줘서 네가 지금 그런 거 같아서...."

"엄마~ 무슨 그런 말씀을~~ 전화를 자주 못해서 그렇지 우리 맨날 맛있는 거 먹고 재밌게 잘 지내요. 걱정 마세요. 전화 진짜 자주 드려야겠네~ 아 맞다. 요즘 다이어트하는데, 살 좀 빠졌어요 호호호 저 잘 지내요"

"그래? 잘했네~00 이도 어린이집 잘 다니지?"

"00아, 할머니한테 꽃게 잘 먹었다고 인사드려야지~"

"할머니~ 꽃게 이만~~~ 한 거랑 새우랑 엄청 많이 배 터지게 먹었어요. 할머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먹기바빠 예쁜 플레이팅은 찍지 못했어요.

다먹은 꽃게와 새우의 흔적이 비린내로 남지 않게 치우고 낮에 들른 중고서점에 산 책과 CD를 가방에서 꺼내봤습니다. 전 이렇게 집에 있기 별로 일때 중고서점에 가곤하는데 생각해보면 제법 자주 그런 짧은 방황을 즐기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딘지도 모르는 '어딘가'가 더 나을 것 같아 헤맬 때가  있습니다. 면접에 떨어지고 나서도 '집'보다는 '길'이 편해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몸이 '집'에 가게 되더라도 '마음'은 항상 어딘지도 모르는 '어딘가'를 찾으며 '불안정'속을 떠돕니다.


'돈 벌어야 생활하니까 풀타임 일을 하고 싶지만 애엄마라서 자신은 없어. 도대체 무슨말이야? 어쩌라고?'


어정쩡하고 우유부단한 상태는 '불안정'속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안정' 속으로 도망가 (말이 안 되긴 하지만)'안정'을 느끼려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면접 탈락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하다 마주친 이런 흐리멍텅한 모습의 저는 또 습관적으로 '불안정'의 문을 열고 그 안을 헤매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제는 예상치 못한 엄마의 택배 상자를 만난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엄마 뱃속에서 '안정'의 기간을 거쳐 '불안정'의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지금 어떤 '불안정'속을 헤매고 있건 '안정'을 거쳐 태어났습니다. 최초의 '안정'을 나에게 주었던 엄마.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지는 오래되었지만 '불안정'속'겁도 없이' 헤맬 수 있는 이유는 그런 '안정'의 기억이 있어서 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나의 안정적 삶'을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지원해 주고 싶어 하는 엄마. 그런 엄마가 계셔서 내 멋대로 '불안정' 속을 돌아다녀도 다시 와야 할 곳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닐지.


엄마의 택배를 열고 신나게 꽃게 대하 파티를 하던 중 '지이잉-'또 문자가 왔습니다. 아들 어린이집 바로 앞에 있는 공공분야 일자리에 '채용'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뿌려뒀던 입사지원서 중에 걸린 것이 있었네요. 급여,  근로기간, 직무 이런 것들을 떠나 '근무장소가 아이 어린이집 바로 길 건너'라는 조건은 정말 만나기 어려운 조건이죠.


'엄마, 나 낼  출근해요'


엄마의 택배 상자를 맛있게 파먹고 엄마와 통화하던 중 이 소식도 전했습니다. 얼마간이라도 엄마 마음이 덜 아프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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