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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nina Jun 05. 2021

왕언니들의 꽃분홍 미소

코로나 백신 접종센터에서

코로나19 백신 접종센터. 몇 주 전부터 이 곳을 드나들며, 어르신들 코로나 예방접종을 돕고 있습니다. 접종 예약해드리기, 셔틀버스 타고 어르신들 접종 함께 다녀오기, 접종하신 분들 안부 챙기기 같은 일들이요.


"안녕하세요, 어르신. 비 오는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죠. 예진표 작성부터 할게요. 신분증 챙겨 오셨죠?"

"뭐?"

"주. 민. 등. 록. 증. 민증."

"어어~ (지퍼 달린 꽃분홍 점퍼 주머니 속, 야무지게 매듭을 묶어놓으신 투명 비닐봉지에서 나오는 신분증)

자, 여~(여기). 화이잔가 먼가 그거 맞능가?"

"네 어르신, 화이자 맞아요.

(OOO어르신 생년월일 28XXXX(94세))

그런데 어르신, 너무 일찍 오셨어요.

11시까지 오시면 되는데, 지금 9시예요. 너무 일찍 오셨어요."

"비가 와서. 내가 늦으모는 딴 사람들한테 피해 주잖아"

"아이고. 그러셨어요. 너무 오래 기다리셔야 돼서, 댁에 다시 가셨다 오셔도 돼요."

"으은. 몬가. 비 와서 몬가."

"...... 그러면 어르신, 안쪽에 앉아계실 데 마련해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내가 왜 안직 안 죽고 살아가지고, 허이고. 이 비 오는 날 젊은 사람들 고생시키고 주사 맞으러 가는지. 가족들 피해 줄까 봐 맞지, 내 혼자면 안 해. 아이고, 고마워. 미안해요."

"어르신, 주사 잘 맞으시고 건강하게 지내셔야죠. 셔틀버스 오면 다시 모시러 올게요. 여기서 좀 쉬고 계셔요."

"고마워, 미안해."


대부분 어르신들은 약속 시간보다 1시간씩 일찍 도착하셨어요. 비라도 내리는 날엔 2시간 일찍 오시는 분도 계시고요. 시간을 정확히 알고 계신데도, 혹여나 걸음이 늦어 도착이 늦으실까 봐 서둘러 오셨습니다.


"내가 팔십서인데 도대체가 주사 맞으라는 연락이 없네! 내 죽고 나믄 주사 놔줄라고? 으잉?!"

제가 사는 동네는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부터 순차적으로 화이자 접종을 하고 있어요. 90대 어르신부터 80대 중후반 어르신들 접종에 한 달 여가 걸렸고, 아직 예약을 못하신 분이 많으시다 보니 문의가 빗발치더라고요. (세세한 일정은 지역마다 다르겠지요. 저희 동네는 6월 둘째 주 안에 어르신들 1차 접종을 마칠 예정이에요.)

"연장자 순으로 진행되고 있어요. 현재까지 XX세 어르신들 접종 예약 중이네요. 대상자 명단에 000 어르신 있으신 거 한번 더 확인했구요, 2~3일 내로 예약전화받으실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알았어요."

접종을 도대체 언제 할 수 있는 것이냐고, 혹시나 자신의 이름이 명단에서 빠진 것이 아니냐고, 무조건 빨리 해달라는 분들의 문의가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습니다. 빨리빨리 접종하고 어서 마스크를 벗어던져 버리게 되면 좋겠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늦어지다가 혹시 주사를 못 맞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함의 표현 같기도 했어요. 처음엔 고성으로 불만을 표하시다가도, 설명을 들으시면 대부분 이해해주셔서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약을 해드릴 때 가장 많이들 하신 말씀이, '내가 챙기는 누구와 접종을 함께 하게 해 달라'는 요청과 '내가 OOO약, XXX약, △△△약을 먹고 있는데, 주사 맞아도 되느냐'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은 나보다 젊어서 나이 순서로는 아직 접종 차례가 안 되는 거 알지만)도 같이 맞으면 안되능교?"

"00통 00반 사는 000할아버지, 내하고 좀 같이 가고로 해 주면 안되는가예? 이웃인데, 독거노인이라. 앞을 몬 봐요. 내가 챙기야 돼서."

"내는 아무도 엄꼬 내 혼자라... 주사 맞고 아프면 어짜노.... 어디서 본께, 주사 맞으러 갈 때 타이레놀을 먹고 가라카든가 하든데."


코로나 시국 속에 저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백신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접종을 하고 싶기도 하고, 하는 것이 걱정되기도 하고요. 평소 지병이 있는 분들 중에서 다니는 병원에 상담하니 '본인 책임 하에 맞으시라'고 하셨다는 분들이 많으셨어요. 접종 후 아플지 안 아플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어요. 백신을 맞는 것도, 맞지 않는 것도 나의 선택. 내가 아프면 누가 대신 아파줄 수 없고, 나 또한 아무리 아끼는 이가 아파도 대신 아파줄 수 없습니다. 누구나 어차피 혼자라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혼자이기 때문에 외롭지 않기 위해 서로를 어떻게든 챙기려고 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했어요. (참, 해열제는 열이 나면, 그때 드시면 되겠죠.)


"행님들, 일로 오이소. 내가 버스 앞자리 맡아놓니라 먼저 와가 꼼짝도 안 했다. 여 두 사람 앉으소."

86살 할머니 한 분께서 접종하는 날 처음 만난 95살 언니 할머니 두 분을 위해 걸음을 조금 서둘러 셔틀버스 앞자리를 잡아주셨어요. 걷기  많이 불편하신 언니들의 걸음을 아껴주시려고요. 귀가 어둡고, 말씀하기가 편치 않으셔서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셔도 주고받으시는 미소와 고갯짓이 할머님들의 꽃분홍 패션만큼이나 고와 보였습니다. 그날 처음 만난 사이든, 부부 사이든, 이웃이나 지인 사이든, 서로 기다려 주기도 하고 챙겨며 접종하시는 모습을 보니, 미우나 고우나 가 접종을 하면 물 한잔이라도 챙겨줄(거라 생각하는) 사람인 남편을 떠올려보기도 했어요. (남편이 접종하면, 제가 해열제라도 챙겨주겠지요.)

코로나 백신 접종과는 상관없는 사진. 산책하다가 길에 핀 꽃을 찍으시는 어떤 어르신의 뒷모습(위)과 꽃 한 송이 들고 가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아래)에 눈길이 가서 찍었습니다.


어르신들은 말씀을 하기 힘드시거나, 소리를 잘 못 들으시거나, 허리나 다리가 불편하시거나, 눈이 어두우시거나 어딘가 불편하기도 하셨지만 불평을 하시는 분이 거의 없으셨어요. 오히려 '고맙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접종 예약을 해드리고 전화를 끊을 때, 셔틀버스에 태워드릴 때, 사람 붐비는 접종센터에서 어르신들 손잡고 팔짱 끼고 안내해 드릴 때, 접종을 모두 마치고 셔틀버스에서 내려드릴 때, 그 모든 순간 마다요.


"고마워요."


인사처럼 하는, '고마워요'와는 결이 다른 '고마워요'로 다가왔어요. 제가 도와드리는 건 별로 없기에 저한테 하신 말씀이라기보다, 코로나 시국을 함께 보내고 있는 서로에게 '함께 버티느라, 할 수 있는 일을 하느라, 나도 고생했고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고생 많네요. 고마워요.' 같은 느낌이요.


길어지고 있는 코로나 시국에 느끼고 계셨을 복잡한 마음, 내 접종 순서는 언제 오는 것인지 혹여나 내 몫이 빠져 버린 건 아닌지 걱정되셨던 마음, 막상 백신을 맞으려니 몸이 괜찮을까 불안하셨을 마음, 맞고 나서 코로나로부터 조금은 안전해지겠지 하며 안심이 되기도 하셨을 마음,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백신 안 맞아서 피해 줄 일은 없겠지 하는 안도의 마음. 이런저런 마음들이 '고마워요'라는 한마디로 버무려진 것 같기도 했습니다.


"내가 몬 걸어서 어데 대이지도 몬해. 혼자였으면 이 고생하믄서 주사 안 맞아. 가족들 피해 줄까 봐 맞지. 고마워. 미안해요."

어르신들은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는 만큼, 미안해하기도 하셨어요. 혼자 백신을 맞으러 가지 못해 도움받는 것을 미안해하셨고, 백신을 맞는 이유도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셨고요. '나'의 것인 건강과 접종 기회를 지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우리'를 위해 접종을 하시는 마음도 크다고 느껴졌습니다.


솔직히, 이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정하기 전, 조금 망설였어요. 불특정 다수와 접촉을 하는 일이고 아이가 어려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이 되었거든요. 그러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 생각도 나고, 두어 달 정도만 하는 일이고, 손이 부족한 곳에 작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잠깐이나마 어르신들을 돕고 있습니다.


접종센터에 드나들기 전 까지는 '코로나 백신'이라고 하면 '잘 모르기 때문에 물음표'가 더 많았어요. 알려진 정보들도 잘 읽어보지 않으면서요. 지금은 백신에 대한 질병관리청 자료나 관련 기사를 읽어보고 있어요. 몇 주전부터는 접종 현장 한 구석에서 어르신들 코로나 백신 접종을 도와드리는 아주 작은 일손을 나누고 있고요. 개인적으로 가지는 궁금증이나 생각들도 있긴 한데요, 접종 현장에 살짝 걸쳐 있으며 느낀 점은,


불안, 불만, 불신, 걱정,

배려, 신뢰, 안도, 의지(기댐)


이런 단어들이,

염색하지 않은 흰머리카락과 검은 머리카락이 한데 어우러져 바람에 날리듯이,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이고,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하고, 어떤 게 무겁고 어떤 게 더 가볍고, 어떤 게 더 많고 어떤 게 더 고 그런 것과 상관없이,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다 떠나서 '한데 있다'는 것이 가장 크게 와닿았어요. 


평소에도 스스로를 포함하여 주변에서 느끼던 코로나 상황과 관련된 불안, 불만, 불신은 접종센터에 오시는 어르신들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어요. 접종 현장에 아주 살짝 걸쳐 있으면서 업데이트된 작은 부분은, 사소하더라도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보가 있을 때 불안은 덜고 신뢰를 쌓고 기다림을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것, 사람들은 대체로 나 말고 다른 이들에게 별 관심이 없기는 하지만 접종을 앞두고 서로를 걱정하고 챙기고 의지하기도 하면서 안도하기도 한다는 생각든 것입니다.(타인의 안녕을 챙기는 것도 어쩌면 결국엔 본인이 덜 외롭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지만요)


부작용 부분은,

제가 뵌 어르신들은 화이자나 아스트라제네카 접종을 하고 접종 부위만 통증이 있거나, 해열제 드시고 2~3일 내에 컨디션 회복되는 정도 이상의 반응은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현실 속에 던져져 선택을 거듭하며 살아갑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도 그렇고요. 자신의 상황에 맞는 선택을 자유롭고 지혜롭게 할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믿을 만한 정보는 열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불신이 아닌 신뢰가 생기는 걸 테고요. 개인은 막연히 불안감을 느끼기보다는 필요한 정보는 알아도 보고, 잘못된 정보는 걸러서 볼 수 있어야겠죠. 자신의 상황에 따라 어떤 선택을 하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면, 외면받지 않고 외롭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접종이 있는 날 비가 내리면 어르신들은 약속시간보다 2시간도 일찍 오십니다. 뛰어오시는 것도 아니고 빗길에 더 천천히 걸어오시는데, 얼마나 서둘러 나오시는 것인지..


내리는 비를 막을 순 없겠습니다만, 함께 비를 맞기도 하고 여력이 되는 사람이 우산을 씌워주기도 하며, 내가 처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조금씩이라도 계속해나가고 싶습니다.


음. 청바지 정도는 소화할 수 있는 할머니가 어느 날, 백신 접종하러 가서 처음 만난 왕언니들에게 엉덩이 잠깐 붙이고 앉을자리 정도는 찾아 양보하며, 꽃분홍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소박하게(?!) 바라봅니다.



이번 글은, 코로나19 접종 현장 한 구석에서 끼적인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이에요. 댓글을 써주시던 분들께 부담을 드리는 것도 같아서, 댓글을 닫아 두었습니다.

이해 부탁드려요.


길어지고 있는 코로나 상황 속에서 각자 짊어진 무게로 힘들기도 하며 매일을 보내고 계시리라 생각해요.

서로 힘든 점을 다 이야기 나누진 못하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힘들기도 할 거란 걸 알아준다는 자체로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보잘것없는 제 글을 '기다린다' 해주신 말씀들이 힘이 되어 이 글도 썼습니다.


이 글 쓰다가 최백호의 노래 <뛰어>가 떠올라

링크해 봤어요.


    쏟아지는 빗속을 뛰어 봐요

    부딪히는 빗방울이 즐거워요

    사라져 버려라 슬픈 이야기들

    흩어져 버려라 뛰는 내 발길에


      - 최백호 노래 <뛰어> 중


노랫말을 빌려 인사드립니다.

'함께 비도 맞아주시고, 우산도 씌워주셔서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부딪히는 빗방울을 즐겁게 느끼기도 합니다.'


언제나처럼 감사드려요!


https://youtu.be/U_lPw2ZjT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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