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네는부동산 가격이 높아요. 다른 동네는 대부분 3개 천 원이거든요. 천 원 한장과 바꿔지는 먹거리가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요즘이고,동네마다 차이나는 붕어빵 가격이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좀 씁쓸했어요.
천 원을 빵틀에서 갓 나온 붕어빵 2개와 바꿨습니다. 씁쓸함도 잠시. 종이봉투가 무색하게 전해지는 붕어빵의 솔직한 따뜻함에, 홀로 데이트의 만족감이 급상승했어요. '앗, 뜨' 베어 물며 호들갑스러움을 즐기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아이 어린이집 픽업 시간을 놓치겠더라고요. 아쉬움을 뒤로하고 붕어빵 봉투를 챙겼습니다.
두 개의 붕어빵이 온몸으로 열기를 내뿜으며 함께 있다 보면, 자칫 한 마리처럼 덩어리 져버리기도 하잖아요. 눅눅하게요. 아, 안돼요. 그런 붕어빵을 입에 넣고 싶지 않아요. 두 마리를 적당히 떨어뜨려 놨어요. 봉투입구를 살짝 접으며, '나 몰래 둘이 친해지면 안 된다'는 신신당부를 하고는 가방 속에 살짝 넣었습니다.
걸음을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을 지나 환승해야 할 역에 내렸어요.
'지금이 5시 15분... 기다렸다 타야 할 열차 시간이... 5시 45분. 30분 여유. 좋네."
환승시간이 긴 호선이었어요. 불편할 때도 있지만, 바쁘지 않을 땐 한숨돌리기 좋기도 해요. 오늘의 데이트 장소로 지하철을 꼽은 이유. 뻥 뚫린 지상에 있는 이 플랫폼에서 여유를 부리고 싶어서였거든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갔어요. 계단 제일 위칸 위로 하늘이 조금씩 넓어지는 걸 보고 싶어서, 엘리베이터 말고 계단으로 한칸씩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지구가 해와 달에게 연달아 인사를 하는 사이, 조용히 밤이 내려앉고 있는 시간이었어요. 지하철을 많이 탔었지만, 노을을 볼 수 있는 타이밍은 거의 없었죠.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는 시간이기도 했고, 마스크 속 입에 문 허브향 사탕의 기운도 더해졌는지 얼굴을 스치는 공기가기분 좋게 시원했습니다.
계단을 다 올라 온전한 하늘을 한번 보고 창밖을 봤어요. 교차로 위는 빨간 불빛을 뿜어대는 차로 가득하더라고요. 본격적인 퇴근시간 전이라 아직은 한산한 플랫폼에서 여유롭게 서 있는 게 실감이 나서 더 신났습니다.
교차로 위는 빨간 불빛을 뿜어대는 차로 가득한데, 저는 한산한 플랫폼에 여유롭게 서 있어서 신났습니다. (부산 동해선 벡스코역)
'아! 붕어빵!'
주변을 둘러보니 커다란 엘리베이터를 사이에 두고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다 엘리베이터 너머에 있었어요. 가방 속 붕어빵 봉투를 살짝 꺼냈습니다.
'아직 따뜻해. 두 마리 각자 바삭한 자태 그대로야.'
슈크림 붕어빵과 팥 붕어빵을 번갈아 보다 슈크림을 먼저 택했어요. 슈크림은 간혹 향이 거슬릴 때가 있더라고요. 그럴 땐 실패 확률이 낮은 팥으로 뒷맛을 정리해야 하니까요. 다행히 슈크림은 부드러운 풍미가 느껴졌고, 팥은 오동통하게 가득 들어서 만족스러웠어요.
(※ 주위 5미터 이내에 한 명도 없었습니다.)
따끈한 붕어빵덕에 혼자 데이트인데도 손끝은 따뜻했고, 오랜만에 노을을 보는 기분 탓인지, '지금 이 순간이 기대 없이 만난 짧지만 예쁜 시간'이란 생각에, 그런 기분을 닮은 어린 시절이 떠올랐어요.
지하철에 대한 작은 추억
초등학생 시절,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은 제 손 잡는 걸 좋아했어요.언젠가 아이들 사이에서 서로 손금을 봐주는 것이 유행했는데,동생도 제 손을 한참 들여다보곤 했죠. 하루는 눈물을 터뜨리는 거예요.
"으앙. 언니 생명선이 짧아. 안돼. 나랑 오래오래 같이 놀아야 된단 말이야. 엉엉."
그런 동생 손을 잡고 엄마의 퇴근 시간에 맞춰 지하철역에 마중을 가곤 했어요. 마중가는 길엔 내 친구네 빵집, 동생 친구네 치킨집, 내 친구가 형이고 내 동생 친구가 동생인 형제 문구점도 있었어요.
걷다 보면 여기저기 밥 짓는 냄새와 집집마다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바삐 움직이는 수저가 그릇과 부딪히는, 맑고도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렸어요.
걸어서 20분 남짓 되는 거리. 골목길과 찻길을 지나 지하철에 도착해도 엄마가 오시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동생) "이것 봐, 엄마 아직 안 오셨을 줄 알았어. '세계명작만화' 끝까지 못 보고 나왔는데. 치"
*"왜가리야-/왝!/어디 가니/왝!/엄마 찾니/왝!/아빠 찾니/왝!/왜 말은 않고 대답만 하니/왝!/왝!" - 박경종의 동시 '왜가리' 전문
그 시절, 노래처럼 부르던 동시예요. 퉁명스레 '왝' 하는 부분에서 서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어댔죠. 요즘도 종종 동생과 '왜가리'를 소환하며 웃곤 해요.
그러다 지하철 개찰구에서 나오시는 엄마를 발견하면, 동생은 엄마 손부터 살폈어요. 맛있는 것이 들려있나 해서요. 장바구니없이 핸드백 뿐인 날엔 실망하는 표정이 되었던 동생. 동생에게 엄마 마중은 '맛있는 것에 대한 기대' 였다는 것을 아시는 엄마는, 주머니에 막대사탕 하나라도챙겨 오셨어요. 아니면 집으로 가는 길에 꽈배기나 물떡 하나를 손에 쥐어주셨답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해는 뉘엿뉘엿해지고, 오르막길은 좁아졌어요. 골목골목을 돌고 돌아 막다른 길이 되면 도착했죠. 어린 두 자매는 손 꼭 잡고 또박또박 걸어왔던 길을, 자기 손만큼 작은 빵 한 봉지에도 즐거워하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엄마 손을 잡고 다시 걸어왔습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해질녁 노을이 배경으로 그려져요. 코가 간질간질하며서도 시원해지는 느낌의 냄새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퇴근길 지하철 안
찹찹한 겨울 냄새 맡으며 붕어빵 봉지를 다 비우자, 퇴근길 사람 냄새 한가득 실은 열차(지하철)가 도착했어요. 저도 일 인분의 사람 냄새를 추가하며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퇴근길, 사람냄새 가득실은 열차가 도착했습니다.
퇴근길 열차 안에서는 출근하는 인파 속에서 종종 풍겨지는 비누냄새나 샴푸 향 같은 건 찾기 힘들어요. 각자 짊어진 하루를 버텨내느라 고단함이 밴 체취를 걸친 채로 잠이 들거나 무표정인 얼굴들이 많죠. 잠시 닫아둔 제 몫의 고단함도 살짝 고개를 내밀었어요.
'내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과 비용, 남편과 마음 맞춰가는 여정이 생각보다 길긴 한데, 사업을 한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상태는 좀 그렇잖아. 이번 달엔 채무조정을 신청해야 할까. 내 선택과 행동을 후회하진 않지만, 책임을 진다는 건 냉험한 현실이지.'
하루 중 피곤함이나 짠함, 지질함 같은 감정은 퇴근할 때, 혼자 있을 때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아침이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말고요. 당장 답이 나오지 않는, 혼자 하는 고민은 (다행히) 짧게 하고, 세 정거장을 지난 후 열차에서 내렸습니다.
노을도 어느새 퇴근을 하고, 지하철 역사(驛舍) 창밖으로는 완전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어요. 역사 안에는 조명이 환하게 켜졌습니다. 창에 비치는 밝음에 가려 창밖으로 흐르는 강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 어렴풋이 바라보다 개찰구를 찾아 나왔습니다.
창에 비치는 밝음에 가려 창밖으로 흐르는 강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 (부산 동해선 부산원동역)
나가는 곳. 손잡이를 꼭 잡으세요
역사(驛舍) 밖으로 나가는 길,
'나가는 곳', '계단주의', '손잡이를 꼭 잡으세요'
그날따라 안내표지판이 말을 거는 느낌이 들었어요. 여태 지하철 개찰구와 나가는 곳은 항상 바쁜 마음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다녔는데, 그날은 여유를 가지려고 마음먹은 날이어서 그런걸까요.
"안 좋은 마음은 이곳에 남겨 두고 나가세요. 그러면 열차에 실어 넓은 곳으로 그 마음을 보내줄게요. 나갈 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손잡이도 꼭 잡고 가세요."
손잡이를 꼭 잡으라는, '꼭'이라는 부사가 어쩜 그리 다정하게 느껴지던지. 사진까지 찍었네요.(부산 동해선 부산원동역)
밖으로 나오니 멀리 보이던 강이 발 옆으로 흐르고 있었어요. 저는 강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가까이 흐르는 강을 보다 보면, 물 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를 볼 수도 있고요. 그럴땐, 왠지 모르게 나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힘을 느끼기도 해요. 시간이 더 있었다면 물고기를 만나려고 더 걸었을 거예요.
어두워 지는 시간의 강. 해가 있을 때 강을 따라 걷다보면 펄쩍 뛰는 물고기를 보곤합니다.(부산 동해선 부산원동역)
최고의 벗과 함께 한 무심하고도 다정한 데이트
어쩌다 생긴 한 시간. 시끄러우면서도 조용하고, 무심하면서도 다정한 지하철을 혼자 데이트 장소로 정해서였을까요. 지금 조금은 답답한 터널을 지나고 있는 거라면, 나가는 곳을 어떻게든 찾게 될 것 같은 안도감이 느껴졌어요. 스스로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을 놓지 않고 꼭 잡고 있는다면, 넘어져도 덜 부끄럽고 덜 아프고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겠다는 마음도요.
지금의 생활이 내가 선택해서 올라탄 열차라 할지라도 어디까지 가는 것인지, 중간에 쉬거나 내리면 어떨는지, 터널을 만나면 그 터널이 어디까지인 건지, 터널을 지난 다음은 어떨는지 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나를 문득 두드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만났을 때, 내가 무엇을 위해 이 터널 속 어둠과 차가운 공기를 내 것으로 끌어안는지를 스스로 이해해 나가고 있는 중인 것 같아요.
노을이 완전히 물러가면 찾아오는 밤. 조명과 창문이 어둠을 밝혀주고 차가운 공기도 막아주지만, 조명이 비치는 창문 너머로는 멀리 깊이 넓게 흐르는 강이 잘 보이지 않기도 해요.
차가운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가면 볼 수 있는, 내 발 옆으로 흐르는 강이 선명하고 깊게 보입니다. 멀리 넓게 흐르는 강도 보고싶다면, 다시 밝아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어둠도 추위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다면, 나의 최고의 벗인 내가 언제나 내편이 되어 준다면, 시간도 내 편이 되어 줄 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함께 들으면 좋을 것 같은 곡.
Laura Pausini - <Io si(Seen)>,
이탈리아 영화 <자기 앞의 생 The Life Ahead> 엔딩곡.
동명의 소설이 원작임.
(이탈리아어 노래라서 한국어 가사를 적어두었습니다. 이런 곡을 들으면 외국어를 배우고 싶어 지네요.^^;)
Laura Pausini - ,이탈리아 영화 <자기 앞의 생 The Life Ahead> 엔딩곡.동명의 소설이 원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