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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웅 Aug 25. 2021

우리의 생활을 응원하는 무인양품 (MUJI)

“조그만 게 비싸기만 하네”

내가 무인양품에서 가습기를 만지작거리자 이사 기념으로 선물을 사 주겠다며 따라온 누나는 불평했다. 은은한 빛을 머금은 무인양품의 가습기는 9만 원이었다. 나는 기분 좋은 향을 내는 아로마 오일을 따로 사야 한다는 말을 아꼈다. 주부인 누나는 조그마한 가습기가 9만 원이라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고 나도 그런 그녀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 내가 무인양품의 가습기를 탐냈던 이유는 나의 건조한 코를 촉촉하게 해 줄 것이라는 기능에 대한 믿음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외로움과 청춘의 고뇌로 가득한 나의 작은 원룸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심미적인 가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날 나는 결국 가습기를 사지 않았고 누나에게 선물 받은 저렴한 전기 주전자와 각종 생활용품을 들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무인양품과의 흑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무인양품에서 가습기만큼 가지고 싶었던 상품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벽걸이 CD 플레이어다. 그 CD 플레이어*의 가격은 무심하게도 15만 원이 넘었다. 20대 후반이었던 나에게 10만 원 이상의 상품을 구매하는 일은 치과에서 레진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만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결국 무인양품 CD 플레이어와 꼭 닮고 가격은 훨씬 저렴한 국내 기업의 CD 플레이어를 구매했다. 무인양품 스타일의 제품을 저렴하게 구매해서 기뻤지만 ‘무인양품의 상품이었다면 음질이 더 좋았을까? 집과 더 잘 어울렸을까?’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는 종종 비슷한 품질이라면 저렴한 가격에 구매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합리적인 선택 후에 공허함이 뒤따른다. 우리가 본래 기대했던 것이 단순히 그 상품의 용도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비는 더 나은 디자인, 더 나은 브랜드,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을 포함하고 있다. 20대 후반의 나에게 무인양품은 그런 욕망과 선망의 대상이었고 30대 중반이 되어서 무인양품은 나의 삶을 응원하는 생활 브랜드가 되었다.


* 무인양품 벽걸이 CD 플레이어: 유명 산업 디자이너인 후카사와 나오토가 무인양품에서 디자인한 CD 플레이어다. 미국현대미술관인 MoMA에 영구 소장된 제품이다. 2000년에 출시된 이 CD 플레이어는 줄을 당겨 작동시키는 아날로그 감성이 큰 인기를 끌었고 무인양품의 대표적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양품 생활로의 진입

집이 월세에서 전세로 바뀌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무인양품 매장을 찾게 되었다. 고대하던 가습기뿐만 아니라 잠이 잘 오도록 돕는다는 아로마 오일까지 함께 구매했다. 나는 방을 아늑하게 비추며 아로마 향의 분무를 내뿜는 가습기의 모습에 한동안 뿌듯함을 느꼈다.

나는 무인양품의 직물 상품을 선호한다. 속옷, 티셔츠, 손수건은 유기농 순면으로 만들어졌고 피부에 닿는 촉감이 좋았다. 무인양품의 셔츠와 스웨터도 한동안 즐겨 입었다. 무인양품의 옷은 대체로 장식과 무늬가 극도로 제한된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데 색이나 모양이 자연스럽고 튀지 않아 편안하게 입을 수 있었다.

무인양품에서 산 알람 시계와 책상용 선풍기는 3년 동안 고장 없이 잘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 다시 상품을 찾아봐도 무인양품보다 괜찮은 제품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무인양품의 제품을 사용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좋은 이미지를 가진 상품들로 인해 나의 삶이 기분 좋은 생활의 경험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다이소에서 사는 것, 무인양품에서 사는 것

무인양품 하면 자연스럽게 다이소가 떠오른다. 다이소에서는 주로 고무장갑, 세탁 망, 보관함, 청소용품 등 생활 밀착형 소모품을 구매한다. 다이소는 대부분의 상품이 1,000원~5,000원 사이의 균일가이기 때문에 상품을 구매하는 데 부담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다이소에 가면 사려고 했던 것보다 항상 더 많은 상품을 사서 나온다.

여기서 내가 무인양품에서 주로 사는 것은 어떤 상품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릇, 가전, 의류, 침구다. 소모되기보다는 소유되어 나의 삶을 보여줄 수 있는 상품들이다. 물론 무인양품도 소모품을 팔긴 하지만 대체로 가전이나 가구 같은 부가 가치가 높은 상품이 주력이다. 이들은 대체로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어 무인양품에서의 소비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현대의 소비 사회는 다이소처럼 극단적인 효율화로 만들어진 저렴한 상품과 다이슨처럼 뛰어난 기술과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상품으로 양극화되어 있다. 사람들은 결국 취향에 맞지 않아도 무리하여 비싼 제품을 사거나 저렴한 균일가 제품에 현혹되어 양품에 대한 경험을 포기한다. 무인양품은 이러한 양극단의 소비에서 벗어나 사용자의 생활이 조금 더 안락할 수 있는 상품, 즉 양품을 제공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저렴하지는 않더라도 믿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무인양품은 경제가 좋지 않을 때 오히려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했고 믿을 수 있는 브랜드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생활 명품이라는 개념이 희소할 때 무인양품은 더 나은 삶을 원하는 사용자들에게 신뢰를 주는 브랜드로 성장하였다.

취향이 없는 게 취향인 무인양품

‘무인양품’은 ‘상표는 없지만 좋은 품질의 상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인양품의 상품은 디자인이 간결하고 기능도 기본에 충실하다. 내가 수년 전에 산 무인양품의 상품들은 두 번의 이사를 거치고도 아직까지 잘 사용하고 있다. 유행에 민감한 상품이나 기호성이 강한 상품은 한순간 소비되고 잊히거나 버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빼기의 미학을 실천한 무인양품의 상품은 오랫동안 사용된다.


많은 브랜드가 오직 우리가 최고라는 타이틀을 갖기 위해 하나의 상품을 극도로 발전시키거나 기능별 버전으로 세분화해 팔기를 한다. 보통 이런 상품은 디자인이 화려하고 불필요한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무인양품은 ‘오직 무인양품이 최고’라는 느낌을 경계한다. 오히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라는 느낌을 추구한다. 따라서 무인양품의 취향은 기본에 너무나 충실한 브랜드라고 말할 수 있다.


생활 용품 브랜드가 아닌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가 된 무인양품

무인양품에는 오직 무인양품 스타일 한 가지만 존재한다. 무인양품의 어느 매장에 방문해도 도심과 멀지 않은 시골에서 생활을 꾸린 정갈한 가정집을 떠올리게 된다. 매장의 진열과 각종 메시지 보드를 보면 무인양품이 여유롭고 기분 좋은 라이프 스타일을 지향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무인양품이 특정 상품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아닌 라이프 스타일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보았다.

첫째는 상품의 제안이 아닌 라이프 스타일의 제안이다. 고객은 이미 고유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디테일이 많으면 오히려 취향이 있는 고객들을 전반적으로 만족시키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무인양품은 고객의 취향이라는 선을 넘지 않으며 누구나 보기 좋은 정도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한다. 역설적이지만 취향 없음의 미학은 오히려 고객의 취향을 움직였다. 이러한 무인양품의 부드러운 제안으로 인해 우리는 무인양품의 일부 상품만으로도 우리의 취향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는 6,000종이 넘는 다양한 상품을 아우르면서 높은 수준의 퀄리티를 보장하는 것이다. 칫솔꽂이(3,000원), 유기농 순면 티셔츠(5,000원), 미니 선풍기(30,000원)와 같이 부담 없는 가격으로 좋은 생활용품을 경험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인양품에 가면 안정적인 디자인과 일정 수준의 제품 품질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무인양품은 저가형 상품을 통해 신뢰를 얻고 이 고객들이 무인양품에 스며들면 고가의 가전이나 가구로 다시 업셀링*시킨다. 무인양품이 주는 일정한 톤 앤 매너는 이미 강력한 브랜드가 되어 양품 생활자를 늘려가고 있다.

* 업셀링(upselling): 같은 고객이 이전에 구매한 상품보다 더 비싼 상품을 사도록 유도하는 판매 방법.


무인양품의 기획력

무인양품의 상품 기획에는 세 가지 축이 있다.

첫째는 무인양품에서 운영 중인 양품 연구소*라는 온라인 매거진이다. 생활의 지혜, 무인양품 상품의 사용법, 무인양품에서 기획해 줬으면 하는 상품 등이 올라와 있으며, 고객과 무인양품의 기획자들이 어우러지는 곳이다.

둘째는 무인양품의 상품 기획자다. 상품 기획자는 현대 소비자의 라이프 스타일에 필요한 것들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상품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에게 기획보다 더 중요한 업무는 바로 관찰인데, 실제 고객의 집에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등 고객의 생활을 리뷰하기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진행한다. 이렇게 수집한 고객의 생활 정보는 치열한 아이디어 회의를 통해 고객에게 기분 좋은 생활을 선사할 수 있는 상품을 기획한다.

셋째는 무인양품의 고문 위원단이다. 무인양품은 각 전문 분야를 담당할 4명의 고문 위원단을 운영하는데 그래픽 디자이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로덕트 디자이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그래픽 디자이너인 하라켄야는 무인양품의 대표 아트 디렉터로 각종 캠페인과 상품 기획을 책임지고 있다. 그는 무인양품이 계속 감화력 있는 브랜드가 될 수 있도록 조언을 한다. 이들 고문 위원단은 세세한 디자인이나 용도에 대한 피드백보다는 무인양품의 철학과 메시지가 이어지는 상품이 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무인양품은 양품 연구소를 통해 고객의 목소리를 수집하고 상품 기획자를 통해 삶을 개선하는 상품을 만들며 고문 위원단을 통해 상품과 기분 좋은 삶이라는 메시지가 연결되도록 피드백을 준다. 무인양품은 이 세 가지 축을 통해 앞으로도 사용자의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 양품 연구소: 무인양품의 소프트한 브랜드 마케팅을 담당하는 웹 매거진이다. 생활의 지혜, 생활에 대한 에세이를 꾸준히 발행하고 있다. 아이디어 파크라는 공간에서는 고객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접수받아 상품 개발에 반영한다.(https://www.muji.net/lab/)


전부에서 다시 일부가 된 무인양품

나는 면화 제품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무인양품의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

무인양품의 특색 없음은 이제 더 이상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무인양품의 가격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무인양품이라는 브랜드를 다룬 이유는 내가 소비에 눈을 뜨는 시기에 나의 소비를 즐겁게 해 준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생활은 어려웠지만 무인양품에서 구매한 상품들은 더 좋은 생활을 할 자격이 있다며 나의 삶을 응원해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무인양품은 5년 전 내가 열망하던 그때의 브랜드가 아니다. 무인양품은 더 강력한 브랜드 이미지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브랜드가 되었지만 가격은 합리성을 잃었고 상품은 여전히 심심하다. 무인양품은 기존 철학과 다르게 한국을 포함한 해외에서는 유니크하고 비싼 가격으로 소수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여 아쉬움이 남는다.


(무지코리아 본사가 있는 무인양품 신촌점)


무인양품(MUJI)은?

무인양품은 1980년 일본의 거대 유통 회사인 세이유*의 PB 브랜드로 시작하였고 1990년에 독립하였다. 양품 계획이라는 본사를 중심으로 무인양품이라는 브랜드가 운영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해외에서는 무지(MUJI)라는 브랜드로 불린다. 무인양품과 성격이 유사한 국내 몇몇 브랜드가 있다. 이마트의 노브랜드가 브랜드 없이 좋은 상품을 유통한다는 같은 컨셉을 가지고 있고, 신세계 인터내셔널의 자주(JAJU) 또한 기본에 충실한 생활용품이라는 메시지로 무인양품과 경쟁하고 있다. 무인양품은 2004년에 국내에 들어왔으며, 롯데상사와 합작 법인으로 무지코리아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8년 1,378억의 최대 매출을 내며 5년 동안 30% 이상 높은 성장률을 보여 왔다. 하지만 2019년 일본 불매 운동과 2020년 코로나 여파로 인해 2018년 이후 매출과 영업 이익은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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