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시리 감옥으로의 여정을 1부, 카라후토에서의 여정을 2부라고 한다면) 3부라 할 만한 최근의 전개에 실망을 느껴 한동안 보지 않고 있다가, 곧 있으면 완결이 날 것 같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서 노다 사토루의 <골든 카무이>를 다시금 재정주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 만화에 대한 옛 애정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다른 이들에게 억지로라도 권유하고 싶은 마음도 다시금 부풀어올랐다. 적어도 1부만 놓고 보자면 (아베 토모미와 후쿠시 치히로 같은 작가들의 작업과 함께) 다음 10년에도 읽을 만한 드문 근 10년간의 일본 만화가 아닐까? 거기다 <골든 카무이>의 미덕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형편없고 지저분한 근 10년간의 일본 만화들의 태도에 카운터를 날리는 데서 오기에 더더욱 가치가 있다.
가령 이 만화에서 인물들의 관계망을 떠올려보자. 이 관계망은 참으로 기괴한데, 아시리파를 중심으로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 다수의 관계항들이 마주쳤다 헤어지고 충돌하다 해체되고 다른 조합으로 다시 모이며 끊임잆이 그 양태를 변형해서, 가령 서로를 죽이려 든 적이 있는 인물들끼리 하하호호 웃으며 식도락을 즐기기도 하고, 같은 그룹 안에서 생사를 같이했어도 언제든 배신할 기회를 노리기도 한다. 달리 말해 <골든 카무이>는 두 개의 흔한 우정의 양식, 즉 '싸움을 통해 상대를 교육시켜 친구로 만들기'를 반복하는 일본 소년만화의 관계망과, 개인이 여기저기를 느슨하게 떠돌면서 타자(의 경험)를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성장하는 근대 교양소설의 관계망 모두를 거부하는 유동적 이합집산의 서사를 만든다.
이런 기괴한 관계망은 일견 작금의 냉소적 이기주의(ex: "어차피 인생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 것")를 승인하려는 태도로 읽힐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신의의 조건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보려는 신중한 제스처에 가깝다. 우리가 타인과 왜, 어떻게 함께 하게 되며 그 타인을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을지, 또 그 관계를 하여튼 신의라 부를 수 있다면 그 신의는 어디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를 따져보는 것 말이다. 누군가를 믿고 함께하는 데에 얼마나 상이하고 많은 투쟁이 엮여있는지가 그 속에서 드러날 것이다. 타인을 참으려는 투쟁, 타인을 이용하려는 투쟁, 타인에게 뭔가를 숨기려는 투쟁, 타인의 맘에 들려는 투쟁, 타인에 스스로를 거는 투쟁... 나와 타인 사이의 신의는 언제나, 어느 경우에나 이런저런 힘의 투쟁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맺고 있으며, (어떤 투쟁이 다른 투쟁보다 앞서는 식으로) 그 균형이 조금이라도 뒤틀리는 순간 폭력은 몸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고 새로 관계를 맺으려 할 테다.
여기서 중요한 건 노다 사토루가 이러한 투쟁들을 항상 '이면'이 아닌 '표면'에 펼친다는 것, 달리 말해 인물의 행동과 속내의 '낙차'를 부각하는 흔한 방식 대신 인물이 투쟁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자 곡예를 부리는 것에 집중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자신과 아버지가 츠루미 중위의 '연출'에 속았음을 알게 된 이후 코이토 오토노신이 묘사되는 방식을 떠올려보자. 오히려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았다며 미친 듯이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타니자키와 인카라맛의 도주를 암묵적으로 도우며 츠루미에 대한 작은 배반을 행하기도 하는 코이토. 기뻐하던 모습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상황을 얼버무리려는 제스처였는지를 묻는 츠키시마에게 코이토는 "어느 쪽이든 좋을 대로 생각해라"라고 답한다. '진짜 속내'랄 것은 끝없이 지연되고, 그런만큼 코이토가 제7사단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또 츠루미에 대한 신뢰와 불신 사이에서 맺는 균형은 의뭉스러울 만큼 아크로바틱해진다. <골든 카무이>는 바로 이런 신의의 조건을 이야기의 뼈대와 같은 문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다. 물론 당신도 짐작하고 있듯 이때의 투쟁이란 꼭 '적대적'인 방식으로만 수행되지는 않는다. 아시리파-스기모토-시라이시의 (계산을 초월한) 신의와 제7사단의 (츠루미의 '연출' 속에서 발생한) 신의가 대비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말하자면 투쟁에 있어 윤리학과 술책학의 차이. 나아가 흔한 우정의 양식들과 냉소적 이기주의 모두를 극복하려는 나름의 방식.
하지만 노다 사토루는 전자를 이상화하는 데서 만족하는 소심한 인간은 아닌 듯 하다. 스기모토를 보다 '윤리적인' 캐릭터로 한참 동안 그려놓고서는 -아시리파를 독립전쟁에 끌어들이려는 히지카타와 우이루크에 대한 분노- 2부의 마지막에 이르러 스기모토가 바로 그 '윤리'에 의해 아시리파의 순수함이라는 망집에 사로잡히게끔 만드는 걸 떠올려보자. 우리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이를 배반하(려)는 투쟁을 벌이기도 함을, 그리고 그 투쟁이 사랑하는 이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행동일 수 있음을 여기서 본다. 아시리파와 시라이시는 스기모토의 이런 면모를 정확히 지적한다. 노다 사토루는 자신의 주인공의 가치관을 재고하면서까지 윤리학을 제대로 다루고자, 달리 말해 '윤리'에 내재된 긴장을 직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긴장이 완전히 제거된 '절대적인 선(善)의 지향'으로 '윤리'라는 낱말이 오남용되는 작금을 돌아보면 이런 태도는 참으로 귀해 보인다(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성공적인지에 대해선 나 역시 아직 의문이 있다). 그런데 스기모토의 잘못이 그것뿐일까? 아시리파가 역사적 상황과 상관없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채 식도락을 즐기며 "힌나힌나"(맛있는 음식에 대한 감사 인사)하는 아이에 그치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스기모토는 "힌나힌나"하면서 노닥거리는 식도락과 지리한 폭력이 가득한 '대문자' 역사가 서로 동떨어진 게 아님을 간과하고 있다.
228화 '흰머리 오목눈이' 에피소드를 예시로 들어보자. 팔을 다친 스기모토가 실수로 일행과 떨어져 조난을 당하고, 안개가 자욱해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산 속 그의 곁에는 날개를 다친 흰머리 오목눈이 밖에 없다. 이 새에 연민을 갖게 된 스기모토는 우파시라는 이름을 새에게 붙여주고 원맨쇼 격으로 말을 건다. 그런데 일주일 정도를 가만히 앉아 기다려도 일행은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비상식량도 남지 않아 지칠 대로 지친 스기모토는 (궁지에 몰릴 때 늘 그러했듯) "나는 불사신 스기모토다!"라고 외치며 억지로 기운을 내고자 한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서 우리는 스기모토가 우파시를 죽이고 깃털을 뽑으며 "미안해"라고 연신 외치는 걸 보게 된다. 이제 스기모토의 관심은 우파시였던 것을 효율적으로 요리해 먹어 기운을 차리는 것만을 향한다. 그가 우파시였던 것을 먹으려는 바로 그 순간 뒤에서 아시리파가 나타나 스기모토를 찾고, 스기모토가 죄의식 가득 찬 절규를 내지르는 것으로 에피소드는 끝난다. 서사가 잠시 멈춘, 3부에서 유독 돌출적인 잉여 격의 에피소드. 이런 (예상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기분 나쁜) 에피소드가 대체 왜 필요했던 걸까?(어쩌면 노다 사토루는 <브레이킹 배드>의 유명한 '파리' 에피소드를 참고한 게 아닐까) 이 에피소드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하지 않는 스기모토의 고독한 캐릭터성을 함축해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대체 그는 왜 총성으로 자기 위치를 알리려 하지 않는가?- 그와 동시에 <골든 카무이>라는 만화에서 폭력이 작동했'던' 방식을 작가 스스로 되돌아보며 그것을 함축해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골든 카무이>가 (같은 2014년에 연재를 시작한 <던전밥>과 함께) 독특한 먹방만화/맛집만화로 분류되곤 했음은 여러분도 잘 아실 테다. 최근엔 그런 전개가 많이 줄어들긴 했으나, 적어도 1부에선 (야생동물의 뇌를 포함한) 홋카이도 아이누의 식문화를 소개하는 데 만화의 목적이 있는 게 아닌가 할 만큼 무언가를 먹는 장면이 빈번히, 집요하리만치 제시되곤 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골든 카무이>는 러일전쟁 직후를 다루는 역사만화이기도 해, 금괴를 손에 넣으려는 각각의 세력들의 분투는 실제 인명은 물론 과도한 폭력 묘사와 근대화 초기 일본의 일그러진 '정신적' 풍경을 만화에 끌고 온다. 식도락과 역사.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서사로 엮으면서 <골든 카무이>는 일본 만화의 흔한 두 가지 의식, 즉 식도락을 잠깐의 휴식처로 삼고선 역사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배후를 찾으려 하는 음모론적 의식도(ex: <강철의 연금술사>), 역사의 후일담으로서의 식도락적 일상에 다시금 역사를 기입하거나 반대로 그것을 저지하려는 '깊이'에 대한 (불편한) 의식도 완강히 거부한다(ex: <은혼>). 그 대신 서로의 반대항으로 취급되곤 하는 식도락과 역사는 만화에서 기묘한 대구를 이루는 것이다.
대구? 인물들이 홋카이도를 누비며 하하호호 즐기는 식도락은 금괴 쟁탈을 위해 누군가를 무참히 살해하고 큰 역사로 나아가는 여행의 원동력이 되며, 반대로 여행은 각이각색의 식도락을 비롯한 아이누 문화에의 배움과 인물간의 파트너쉽을 겨우겨우 가능케 한다(아시리파를 납치하려는 해적 보우타로의 돌발행동은 이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 식도락 자체도 다른 동물들을 살해함으로서 이루어짐을 잊어선 안 될 터이다. 폭력이 일어난 직후 식도락이 이어지거나, 식도락 도중 폭력이 일어나는 특유의 이야기 패턴은 이질적인 무드의 두 상황을 과감하게 붙이면서 이런 상관관계를 강력하게 지시한다. 달리 말해, 식도락과 역사가 폭력이라는 영토 위에서 서로를 되먹이고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의 순수한 바깥이란 없다. 왜냐하면 (니체의 『도덕의 계보』가 일러주었듯) 폭력은 이런저런 사건에 의해 발생하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사건의 근원이 되는 모종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폭력의 관점에서 볼 때 식도락과 역사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헤겔적 의미에서) 시차에 놓여있다. 우파시에 대한 폭력이 식도락으로 이어지는 순간 큰 서사에 다시 연결되는 228화가 말하고자 한 게 바로 그것이며, 나아가 <골든 카무이>에서 '음식'은 도처에 잠재된 폭력이 현시되도록 자극하는 특권적인 기호라 할 수 있을 테다. (그런데 앞서 암시했듯 후반부로 갈수록 이런 성격이 약해지긴 한다)
하나 거듭 말하건대 <골든 카무이>는 냉소적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만화가 아니다. 폭력이 현시될 때 이 만화는 곳곳의 가시적인 폭력'만'을 재현하려는 진부한 도취도, 그에 따라 폭력을 '거부'하거나 '인정'하는 같은 순진한 해법도, 폭력에 따른 죄의식을 우정으로 치환하는 저열한 우회도 아니라, 모종의 배경으로서의 폭력을 직시하며 그에 따라 확장된 관점을 요구한다. 앞서 말한 <골든 카무이>의 이야기 패턴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끌어온다; 왜 폭력은 그렇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우리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은폐하기 위해 어떤 수법을 쓰는가? 폭력에는 어떤 대상들이 엮여있는가? 즉 '우리는 내러티브 만화에서 폭력을 어떻게 직시하고 분간할 수 있는가'라는 감성학의 문제. (그것은 폭력에 대한 애착과 경멸을 한 몸에 갖는 한국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들이 공통적으로 간과하는 바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정령으로 인식하는 아이누의 단어 "카무이"를 제목에 쓴 이 만화는 이에 대한 분명한 자각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골든 카무이>는 진정 폭력을 다루는 드문 일본 만화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