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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2022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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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저냥 ㅏ랑 Apr 24. 2022

<리코리쉬 피자(Licorice Pizza)>,2021


(아래는 영화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의 <리코리쉬 피자> 특집을 위해 작성한 짤막한 리뷰이다.)




저와 이 영화를 같이 본 친구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이렇게 말했어요. "이거 캐릭터들도 영화 자체도 다 ADHD 걸렸잖아!" 물론 우스갯소리에 가까운 감상이었지만, 그 순간 이 말이 <리코리쉬 피자>의 핵심을 건드린다고 느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폴 토마스 앤더슨은 우리 시대의 가장 산만한 영화감독이라 할 만하죠. 적어도 2012년 작 <마스터>부터 그는 인물들의 관계, 심리, 행동은 물론 씬과 씬도 딱딱 연결시키지 않고 계속 어긋나게 하거나 돌출시키는 쪽으로 움직여왔습니다. <리코리쉬 피자> 역시 그 연장선에 있어서, 홍보대로 귀여운 틴에이지 로맨틱 코미디라기엔 정말 불친절하죠. 개리는 분명 아역 배우였는데 영화 초반에 오디션 한 번 보고 갑자기 전업 사업가가 됩니다. 또 지금 나오는 사람이 뭔가 앞으로의 전개에 중요한 캐릭터일 것 같은데, 그다음엔 일절 언급도 없고 영화상에서 사라져버려요. 그런 캐릭터가 한둘이 아니고요. 그러다 보니 관객은 당연히 혼란에 빠지죠.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 하나가 따라옵니다. 이 산만한 영화에서 대체 무얼 봐야 하나? 저는 <리코리쉬 피자>의 주요한 볼거리란 다름 아닌 벡터라고 생각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에서 배운 그 벡터요.


'도곡산 바이크' 씬을 한 번 떠올려보죠. 여기서 우리는 앞으로 무자비하게 질주하는 잭 홀든의 작용과 거기에 합류하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알라나의 반작용, 그리고 그걸 보고 놀라 알라나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개리를 봅니다. 이 씬이 우리 기억에 강렬하게 남게 되는 건 벡터들의 이런 강력한 교차 때문이죠. 나아가, 이 영화에서 각각의 장면들이 어떤 의미/감각(Sens)을 발산할 수 있는 건 그 장면 속 대상들의 벡터의 운명에 달려있다고까지 할 수 있을 거에요. Life On Mars?의 클라이맥스가 흘러나오는 와중에 시동이 꺼져 멈춰버리는 물침대 트럭과, 사건 현장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 트럭을 스릴 있게 후진시키는 알라나의 경우를 일단 예로 들고 싶습니다. (동수님도 말씀하셨듯 "도곡산 바이크 씬"에서 알라나가 겪었던 반작용은 여기서 스릴 넘치게 전유되죠) 그렇지만 벡터들의 작용 및 교차가 이렇게 물리적인 층위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니에요. PTA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개리와 알라나의 관계는 너무 이상하게 설정이 되어있어서, 애틋할 만하면 거의 서로 주고받는 것 마냥 번갈아서 한눈을 팔고, 한참 으르렁거리다가도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를 향해 달려갑니다. 물침대 광고를 위해 전화를 걸 때 알라나가 폰섹스 흉내를 내며 개리를 도발하는 걸 떠올려보죠. 투쟁으로서의 연애, 아니면 요즘 쓰이는 말로 '혐관'이라고 할까요? 그런 측면이 좀 있어요. 사실 이 둘의 관계의 구체적인 과정은 이보다 더 복잡하게 펼쳐집니다만, 하여튼 심리적인 층위에서도 벡터는 작용해서 서로의 간격은 좁아졌다 넓어졌다를 반복해요. 그래프로 그리면 아주 볼만 할 겁니다. 자꾸만 변주되고, 잠시도 어딘가에 멈춰있질 못하죠. 이들의 관계는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지속됩니다.이쯤 되니 <리코리쉬 피자>는 모든 층위에서 벡터가 끊임없이 작용하는 걸 보고 싶어서 만든 영화로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 자체가 ADHD에 걸린 것 같다는 느낌은 바로 여기서 기인할 거에요.


그렇다면 이런 산만함을 한 편의 영화로서 뒷받침할 논리는 무얼까요? PTA는 이 영화의 배경인 1970년대 초 캘리포니아, 나아가 미국 자체가 이런 산만함, 난잡함의 장이었다고 여깁니다. '<리코리쉬 피자>를 보면 70년대 미국에 대한 향수가 생긴다'는 반응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는데, 저는 이런 반응이 아주 기괴하게 느껴지거든요. 70년대 당시를 산 미국 노인들이 이 영화를 보고 향수를 느낀다면 제정신이 아닌 건가 한 번 의심해봐도 좋을 거에요. 《뉴요커》의 영화평론가 리처드 브로디가 말했듯 <리코리쉬 피자>에서 PTA는 오히려 아주 그로테스크하고, 폭력이 예고 없이 터져 나오고, 각자의 욕망들이 부글부글 끓는 시공으로 70년대 초 미국을 기억합니다. 개리가 경찰에게 끌려가는 시퀀스 하나만 떠올려봐도 납득이 되겠죠. 배경으로서의 역사 자체가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 작용하는 벡터들은 자기 시대에 더없이 어울리는 운동이 돼요. 이 역사에 접근하기 위해선 이런 표현법이 불가피하다, 라고 할 수도 있을 테고요. 그런데 이를 거꾸로 뒤집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 <피를 부르리라> 때엔 신화적인 내러티브 구조 속에서 개개의 운동을 '큰' 역사적인 것의 은유처럼 다루었다면, <리코리쉬 피자>에선 개개의 벡터가 그 자체로 모여 구체적인 역사/이야기(historie)를 이루는 광경을 구축한다고요. 엄청난 전환이자 도약이 아닐 수 없는데, PTA는 이제 운동을 그저 운동으로 다루면서 그것으로 어떤 분위기로서의 역사를 육화하는, 역사가적 영화 작가로서 어떤 정도에 이른 겁니다. 이때 석유파동과 같은 '거시적인' 사건과 개개인의 '미시적인' 몸짓은 서로 어느 한 쪽에 종속된 게 아니라, 함께 동시에 펼쳐져 서로 멀어졌다가 충돌했다가 하면서 "분위기로서의 역사"를 형성하는 거죠. (프레드릭 제임슨의 표현을 맘대로 훔쳐서 말하자면) '감각적 지도 그리기'라고나 할까요? 그 점에서 이 영화는 1970년이 배경인 <인히어런트 바이스>와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어요(여담이지만 <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선 거의 모든 씬마다 인물들이 최소 한 명씩은 쭉 앉아있다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대비됩니다). 90년대에 등장했던 미국의 천재 감독들이 연달아 대안적 역사서술의 영화를 내놓고 있는 요즘 ―<옛날 옛적 할리우드에서>, <첫 소>, <프렌치 디스패치>― PTA는 <리코리쉬 피자>를 내놓았습니다. 더 말이 필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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