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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는 어른을 혐오하는 것이다"

by 그냥저냥 ㅏ랑


서울문화재단 웹진 《비유》 73호(2025년 5-6월호)의 기획 코너 <비평 교환>에 「어른 없는 만화」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 《비유》 이번 호의 주제는 '성인 이행기'로, 에디토리얼에 따르면 "'성인 이행기'에" 얽힌 "여러 오인, 혼동, 오해"를 "이번 호를 통해 (...)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고 하며, 늘 그렇듯 나는 《비유》 측이 제시한 주제를 약간 이탈하고 우회하여, 여러 문화권을 가로질러 만화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어른 혐오를 여기서 따져 보았다. 어째서 만화는 어른을 자꾸만 칸 밖으로 내모는가, 이 어른은 어째서 비일관적으로 뭉뚱그려진 대상 취급을 받는가, 그 혐오에는 어떤 가설들이 가능한가, 그리고 어른 혐오를 대면하고 대결하려는 만화들엔 무엇이 있는가... 당연히 나의 가장 좋은 글은 아니겠지만, 친구의 말을 빌려 지금까지 "윤아랑의 가장 에센셜한 글 중 하나"이긴 하지 않나 싶다. 아마 논란도 좀 될 것 같고. 물론 여기엔 약점도 여럿 있다. 가령 친애하는 동료 M이 뼈아프게 지적한 것처럼, 만화에 있어 "'어른'의 부재는 역사적인 현상(특히나 동시대적인 현상)"이기도 함을 눙치고 다소 초역사적인 분석으로만 향한 것은 나의 큰 실책이다. 집필 과정에서 이를 인지하고 있었으나 글에 제대로 녹여내지 못한 것인데, 늦지 않은 시일에 다른 자리에서 이 문제의식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겠다. 하여튼 이 글에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해준 M에게 이 자리를 빌려 크나큰 감사를 표한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품고만 있던 문제의식을 풀어 놓을 기회를 주신 편집위원 김신재 씨와 《비유》 측에도 감사드린다. 아래는 글의 링크이다.





"만화에 등장하는 어른은 거진 악당 혹은 (상황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나아가 악화시키는) 적대자(Antagonist)다. ‘사악한 어른 악당에 맞서는 어린이/청소년’이란 클리셰를 떠올려보자. 만약 어른이 우호적으로 다뤄진다면 그는 일찍 죽거나(『스파이더맨』의 벤 삼촌), 어린 주인공과 비슷하게 유치하고 단순한 면을 지녔거나(『크레용 신짱』의 어른들), 소수만 등장하거나(『표류교실 漂流教室』과 『아즈망가 대왕』의 교사들), 그냥 극 중 비중이 적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어른을 어른답게 표현하는 건, 적어도 대부분의 만화에 있어서는 썩 어울리지 않는 일인 것이다. 아니면 거꾸로 뒤집어봐도 좋겠다. 우리가 아는 만화의 주인공은 거진 미성년자거나(《주간 소년 점프》나 《하나토유메》의 캐릭터들) 나이가 납득되지 않는 엉뚱한 지성/심성의 소유자이거나(‘고바우 영감’이나 ‘쌉니다 천리마마트’의 캐릭터들) 일반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는 철저한 소수적 인간이다(DC 코믹스/마블 코믹스의 슈퍼히어로들이나 『코르토 말테제 Corto Maltese』 시리즈의 주인공 코르토 말테제). 주인공이 어른다운 어른인 만화를 찾기란 어렵다. 요컨대 만화는 어른을 혐오하는 것이다."


"얼마 전 쪽프레스에서 ‘달아나는 타카노’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만화가 타카노 후미코에 대한 특강을 진행한 만화가 란탄은 만화의 독자성(Readership)에 대한 재밌는 견해를 들려주었다. 만화가 제공하는 허구적 경험에 있어 일탈로서의 만화(‘잠시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안전하게 벗어났다가 돌아올 수 있게끔 하는 만화’)와 도피로서의 만화(‘내가 살고 있는 세계로부터 벗어나 아예 그 속으로 빠져버리고 싶게 만들거나 그런 경험을 보여주는 만화’)의 분류를 제시한 그는 이런 분류를 가능케 하는,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아웃사이더적 기질”을 지적하며 이런 기질이 선천적으로 주어질 때도 있고 사후적으로 연마될 때도 있지만 하여튼 보편적인 것 같다고 논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그의 논리 전개를 거꾸로 뒤집어보고 싶다. 그러니까 만화는 어째서 또 어떻게 아웃사이더적 기질을 자극하는가? 나이, 취향, 태도, 버릇, 외모, 성적 지향/정체성, 가치관 등에 있어 아웃사이더 내지 마이너리티들이 (창작이든 감상이든) 만화에 쉬이 이끌린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만화의 즉물적이고도 간편한 표현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창작자든 독자든 무관하게) 만화에 미친 어린이 청소년은 살아있는 한 성인 이행기, 즉 하여튼 어른으로 살거나 어른다움을 수행할 준비의 시기로 떠밀려갈 수밖에 없다. 몇 겹의 어른 혐오를 천연덕스럽게 즐길 수 있는 어른은 모순적이거나, 가증스럽거나, 불쌍하기 마련이다.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보라) 그러면서 크게 세 가지 루트가 주어진다. 만화와 적당히 혹은 완전히 거리를 두는 ‘어른다운’ 어른이 되거나, 키덜트(Kidult)란 말이 있듯 쭉 만화와 나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지 않고 오타쿠/아웃사이더로 살며 ‘어른답지 않은’ 어른이 되거나, 그도 아니면 하여튼 만화로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어서 ‘어른 취급은 받는’ 어른이 되거나. 그러나 이 루트들은 각자의 운명적인 선천성으로 인해 선택될 수만은 없는 대상이 되며, 결국 만화와 일반 사회 사이의 긴장은 ‘우리’에게도 자연스레 파급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인가?’를 (암시적으로라도) 주제로 가져가는 만화들이 여기저기에 즐비하단 사실은, 이런 맥락에서 결코 기막힌 우연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장에 대한 만화적 불안. "


"시이나 우미의 『아오노군에게 닿고 싶으니까 죽고 싶어 青野くんに触りたいから死にたい』 후반부에서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주인공 중 하나인 아오노 류헤이의 엄마 아오노 히토미다. 미숙한 걸 넘어 통제 불능의 ‘멘헤라’인 그는 변덕스러운 자기 기분에 따라 자식들을 물리적·정신적으로 학대하고, 어른으로서의 책임은 전가하거나 회피하며, 죽고 나서도 귀신의 형태로 (마찬가지로 귀신인) 아들 주위를 섬찟하게 맴도는 등 참고 보기 힘든 수준의 죄를 자꾸 저지른다. 그런데 히토미를 두려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그의 죄뿐만이 아니다.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독자에게 공개됐던 41화를 떠올려보면, 교복을 입고 있는 히토미에겐 주름이나 헤어스타일처럼 ‘어른다운’ 요소가 없어 이 얼굴을 맞닥뜨린 순간에 ‘이 캐릭터가 아오노 엄마 귀신이구나’라고 이해하기가 몹시 어렵다. 나중에 류헤이가 ‘죽은 어머니가 쫓아오는 걸지도 몰라’라고 말한 뒤에야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후에 긴 플래시백이 펼쳐질 때에도 히토미는 줄곧 ‘어른답지 않게’, 아주 어린 얼굴과 제스쳐의 캐릭터로 묘사되며, 류헤이가 어릴 때나 청소년이 되었을 때나 비슷한 모습으로 (즉 고등학생 캐릭터들과 별 차이 없는 데포르메로) 칸과 칸 사이를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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