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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시뮬레이션으로서 퀴어링'

(커버 이미지: 캐롤리 슈니먼, <그녀의 한계를 포함해 최대한까지>)

by 그냥저냥 ㅏ랑


격월간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 57호(2025년 5월호)의 연재 기획 VILLAIN 코너에 간만에 돌아와 네번째 글을 실었다. 제목은 「미친 언어로써 돌보기」로, 여기서 나는 이 나라에서 "근 몇 년 사이에 (...) '퀴어한' 이들이 다시금 혹은 새로이 픽션을 자신들의 장으로 만"들고 있음에 주목하여 이를 '악의 재현'의 담론에 접속시켜 간단히 계보화해 보았다. 샤를 보들레르, 모더니즘, 앤디 워홀, 캐롤리 슈니먼, 매기 넬슨, 그리고 전나환... 도덕주의와 정당화를 향하지 않는 비체적 삶의 '뻔뻔한' 형상들, 말하자면 "인간의 인식에 있어 ‘악’과 ‘부정적인 것’을 분리하려는, 미학적 시뮬레이션으로서의 퀴어링". 사실 이 글은 간략한 소개의 역할을 추구하기에, 퀴어 예술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여온 이들이라면 '애걔?'하면서 실망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다 심원한 논의는 다른 동료/동종업자들에게 맡긴다...) 이와 별개로, 제목의 "돌보기"란 말의 중요성을 글에 충분히 녹여내지 못한 것을 포함해 내게는 아쉬운 지점들이 쭉 눈에 밟히는 글이기도 하다. 아마 이 아쉬운 지점들은 후일 단행본에서 조금이나마 보충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두번째 에세이로 돌아가자. 드니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를 “악에 대한 밀도 높은 동시대적 고찰이자, (…) 다음 세기에 넘겨진 예언”으로서 논하며, 나는 이 소설에서 제시된 악에의 재현 방식 중 하나로 “‘부정적인 것’이 진리의 재료가 될 수 있게끔 ‘악당’이기를 과도할 정도로 자처하”는 것을 꼽았다. 이는 악(행)을 맹목적으로 저질러 ‘악’ 자체와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인 ‘악당’을 구축하는 일과 전혀 다른 일이다. 기독교의 칠죄종(七罪宗), 계급이나 젠더 혹은 소통에 불화하는 제스쳐, 지독한 폭력 등 우리네 사회가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행동을 특수한 미학적 체계 안에서 수행하며 그 ‘부정적인 것’의 감성학(Aisthesis)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전용(轉用)하려는 시도가 이에 해당된다. (조르주 바타유는 이를 ‘도덕을 넘어선 도덕’이라 부른 바 있다) 인간의 인식에 있어 ‘악’과 ‘부정적인 것’을 분리하려는, 미학적 시뮬레이션으로서의 퀴어링이랄까?"


"하여 보들레르가 열어젖힌 길을 간 이는 잘 알려진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로트레아몽 백작 등)만이 아니다. 보들레르가 미의 개념을 거의 재정의해버린(혹은 그런 가능성을 제시한) 이후 19세기 후반부터의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들은 알게 모르게 (마치 오늘날 물리학자들이 뉴턴의 운동법칙에 대해 그러하듯) 보들레르의 길에 발을 들여놓곤 한 것이다. 미치광이나 비인간을 자처하며 예술의 형식을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분리하고 탐구하고자 한 모더니즘의 시대. 이 시대의 일원이 되고자 한 예술가들은 보들레르의 비전을 나름대로 가공하여, ‘예술다운 것’과 ‘인간적인 것’ 자체에 대적하며 예술과 인간의 범주를 재고하도록 하는 시도를 종종 펼쳐보였다. 요컨대 “예술가들은 아예 스스로가 과거의 예술에 대한” ‘악당’이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이때 ‘부정적인 것’은 (적어도 당시의) ‘예술다운 것’과 ‘인간적인 것’이 마냥 포괄할 수 없는 온갖 불편한 대상들로 확대되었다."


"매기 넬슨의 지적은 퀴어함을 평가 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퀴어라는 범주의 혼탁한 불순함을 직시하고 이를 온전히 긍정하는 정치적 태도를 갖추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퀴어함을 (시스젠더-이성애 중심적 체제에 저항한다는) 정치적 정당성에 따라 정의내리고 지향하려는 충동은 결국 정상성의 ‘제도’와 마찬가지로 옳고 그름의 잣대를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가족, 출산, 성적 욕망 등의 차원에서 이러한 잣대에 부적합한 인물인 넬슨은, 바로 그런 자신의 삶을 통해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 수구적이거나 전복적이지 않음을, 나아가 ‘양쪽 모두를 원할 수 있는’ 복수화의 가능성이 퀴어 주체에게 있음을 선명하게 증명한다. 그리고 그렇게, ‘미학적 시뮬레이션으로서의 퀴어링’은 보다 까다롭고도 유용하게 변화한다. 하지만 명심하자, 『아르고호의 선원들』 역시 하나의 제안일 뿐 완벽한 해결책은 아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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