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커라는 아이콘에 대해

by 그냥저냥 ㅏ랑


격월간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 58호(2025년 7월/ 10주년 기념 특별호)의 연재 기획 VILLAIN 코너에 다섯 번째 글을 실었다. 제목은 「조커는 매번 달리 웃는다」로,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여기서 나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현대 악당 캐릭터에 있어 전범(典範)이자 전위(前衛)로 군림하고 있는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가 지나온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첫 등장부터 정해진 운명을 뒤바꿀 만큼 강렬했던 존재감, 50~60년대의 침체와 연명, 70~80년대의 화려한 복귀 혹은 재탄생, 그리고 오늘날에 쟁취한 실재적 아이콘의 위상. 무엇이 조커를 이토록 질기고 강력한 생명력의 캐릭터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이는 악의 재현이란 우리의 문제설정과 어떤 관계를 맺는 걸까? "‘악당’에 대한 통속적 재현, 즉 사악하고 광폭하며 매력 있는 ‘악당’의 출현"이 미학의 근현대화 속에서 여전히 지닌 유효성을 이 글에서 살짝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글은 기존에 연재를 따라오던 분들이 아니더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리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어떤 경우에 ‘악당’들은 작품 속에서 ‘악’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매개가 아니라, ‘악당’을 이루는 외양과 몸짓과 태도의 유효성을 탐구하기 위한 모종의 실험체로 쓰이기도 한다. 어떤 ‘부정적인 것’이 어느 수준과 방식에서 ‘악당’을 악한 존재로 보이게끔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시화의 실험.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를 논하는 일이 필요성을 얻는다. 왜냐하면 조커야 말로 이런 탐구에 가장 오랫동안 노출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현대 서브컬쳐에 있어 조커만큼의 생명력을 지닌 악당 캐릭터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처음 조커가 출몰한 것은 (미국 만화의 ‘골든 에이지’ 와중인) 1940년 DC 코믹스에서 출간된 <배트맨> 독립 연재 1화였다. 달리 말해 서로의 숙적인 배트맨과 조커는 본격적인 시작을 같이 한 것이다. 이 당시 조커는 지성적인 대량 살인마이며, 고담시의 범죄조직들을 야만적이고 어리석다고 깔보며 혼자 행동하는 이른바 ‘독고다이’형 악당이었다. 예고된 시각에 피해자를 사망하게 만드는 시한폭탄 스타일의 독극물과 (훗날 조커 베놈이란 이름이 붙는) 피해자를 ‘죽도록 웃게’ 만드는 웃음 유발 가스가 조커의 시그니쳐였다. 또한 그는 명망 높은 정치인이나 판사 등을 살해하겠다고 협박장을 보낸 뒤 경찰관으로 변장해 당사자에게 접근해서는 호위하다가 살해하는 교활한 수법을 쓰기도 했다. (종종 죽었다 되살아 나기도 하긴 했지만) 괴물이나 거대 로봇처럼 당대에 유행한 판타지/하드 SF적 소재에 비해 소박(?)하면서도 훨씬 영민하고 사악한 느낌을 풍겼다는 점에서, 조커는 처음부터 독창적인 캐릭터로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물론 두 명의 조커가 있다. <다크 나이트>(2008) 속 히스 레저의 ‘그’ 조커와 <조커>(2019) 속 와킨 피닉스의 ‘그’ 조커. 이들은 (모든 규칙과 계획에 철저히 반항하는) 혼돈의 화신과 (깡마른 몸과 무표정한 얼굴로 모든 폭력을 견디는) 불행의 응집체라는 매력적인 양극으로 조커를 해석하고 소화하여 엄청난 상찬을 받았는데, 이 조커들의 중핵에 같은 설정이 있다는 것은 퍽 흥미롭다. 어떤 설정? 사회적 광기를 자극하는 선봉이란 설정. 시대가 흐르면서 조커의 광기는 사악함이나 배트맨의 숙적/짝패를 넘어서 (다분히 ‘현실적인’) 사회적 폭력성 자체에 연결될 만큼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당신께서도 알고 있듯, 이는 비단 영화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게 되었다."


"단언컨대 조커가 매력적인 아이콘인 결정적 이유는 그가 엄청난 대량 살인범이라서도, 그의 패션이 멋져서도, 웃음을 비롯한 그의 애티튜드가 독특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비이성성과 유희성이 아주 공허한 토대 위에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에게 아직도 본명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광기의 기원을 설명할 정설도 없는 이 아이콘은, 오히려 그렇기에 수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끌어당기는 강한 인력을 가지게 된다. 즉 조커에 얽힌 강도 높은 불가해성과 광기가 많은 창작자들로 하여금 ‘악당’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여기에 덧붙이게 만든 것이다. 충분한 인과와 설명 없이 이어지는 으스스한 이미지들이 괴담을 진정 공포스럽게 만들 듯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