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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Sep 15. 2020

모든 청각 장애인이 농인은 아니다

제2 언어로 [수어]를 선택했다.


 수어 공부를 시작하면 곧바로 ‘수어’를 배울 줄 알았다. 기대와 달리 교육 말미에 맛보기로만 한, 두 가지 배우고 이론 위주로 공부하고 있다. 풍선 바람 빠지듯 기대가 푸스스- 새어나갈 언저리. 선생님은 농인, 농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수어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청각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이 곧 농인은 아니라고 하셨다. 청각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이 자신을 농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하셨다. 즉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수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으며, 수어를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일상, 인터뷰 등 다양한 컨텐츠를 제작하는 유튜버 ‘하개월’

 청각 장애를 가졌지만 보청기를 끼거나, 인공 와우 수술을 한 사람 중 수어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수어를 모르다 못해 ‘수어를 굳이 배워야 해?’, ‘나는 앞으로도 수어를 배울 생각이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렸을 때 인공 와우 수술을 한 청각 장애인의 인터뷰 영상을 들었다. 비수지(=얼굴 표정), 수형(=손의 모양), 수동(=손의 움직임)을 본 것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청각 장애가 있으니 당연히 듣지 못했을 것이고, 듣지 못했기 때문에 말하지 못할 것이며, 당연히 수어를 할 것이다. 혹여나 말을 하더라도 어눌하거나 내지는 발음이 정확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섣부르고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당연한 것은 없으며, 당연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당연했다. 편견이라고 생각조차 못 한 것이 편견임을 알게 되고, 그것이 곧 내가 가진 것임을 마주할 때마다 얼굴에 후끈후끈 열이 오른다. 그렇기에 더욱 빠르게 인정하고 수긍하려고 해 본다. 한편으로는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된다. 실수했던 적은 없는지, 몰랐다는 이유로 상처 준 적은 없는지. 부디 없길 바랄 뿐이다.


 말 나온 김에 본격적으로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자. 장애의 유무로 차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농인’과 ‘청인’이라는 대등한 단어를 사용하는 줄 알았다. 그 생각이 고정관념이었다. ‘나는 장애가 없고, 너는 장애가 있어.’라는 문장 그대로, 말 자체는 차별이 아니라 다름을 열거할 뿐이다. 오히려 ‘너는 장애가 있어’라는 말을 들으면 불쾌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구분과 차별을 만들었다. 있다, 없다는 표현의 수단이지 우열을 가리는 말이 아니잖나. 가령 나는 점이 있고, 너는 점이 없어. 나는 수염이 없고 너는 수염이 있어.


 한 발 더 나아가 보자면 종착지는 나도 있고, 너도 있어 아닐까? 청인은 어두운 곳에서도 목소리를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농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수어를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청인은 잘 듣는다. 농인은 잘 본다. ‘나는 잘하고, 너는 못하고.’가 아닌 ‘나는 이렇고, 너는 저렇다.’의 차원이 아닐까? 한국인, 프랑스인, 중국인처럼 저마다의 국가와 문화를 한데 엮어 ‘~인’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농인과 청인도 마찬가지 아닐까? 농인과 청인. 두 단어의 사용이 ‘장애인을 차별하지 마세요, 비하하지 마세요.’ 또는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부정적 뉘앙스, 의도를 담아서 비속어로 사용하니 새롭고 좋은 단어를 만들자!’에 국한되기보다는 우리네 집단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존재함을 드러내고, 정체화 하기 위함이 아닐까? 저마다에게는 저마다의 특징과 기능이 있으니.


 이러구러 부끄러운 마음과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과 그럴 의도로 한 말은 아녔다고 구구절절 늘어놓고 싶은 마음도 여전히 존재한다. 내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쉽지가 않다. 혼자 했으면 마음 저 밑바닥 구석에 놓인 ‘그래도 비장애인인 내가 더 낫지 않나.’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님 덕분에, 함께 수업을 듣는 다른 수강생들 덕분에 조금씩 조금씩 알을 깨고 나오고 있다.


재밌게 본 유튜브 영상(씨리얼 - 우리가 몰랐던 이 동작의 진짜 의미, 수어(수화)로 하는 나쁜말 토크 대잔치)

  오늘 수업의 결론. 책에 나와 있는 수어를 예습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배운 것을 다시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복습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겨두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관련 영상이나 인터뷰도 틈날 때마다 찾아보고 있다. 농문화에 속한 농인의 것인 수어를 훔쳐오듯 배우기보다 그들의 문화 자체를 이해하고 싶다. 그들의 문화 안에 한 번쯤은 녹아들고 싶다. 왜 그렇게까지 바라냐고 한다면 글쎄. 20대에 한 번쯤 프랑스에서 살아보고 싶어, 평생에 한 번쯤은 치앙마이에서 1년 살이를 해보고 싶어. 그런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듯이 적어도 내게는 다를 바 없이, 같은 맥락인 것 같다. 막연히 그러고 싶은 것.


 그곳에서의 내 쓸모가 있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그게 곧 모든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프랑스에서 프랑스인을 가르치고 도울 거야! 그런 말은 안 하니까. 한 번 부조화를 느끼니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첫 번째 도미노를 톡 밀어버린 것 같다. 내면의 체계가 뒤집히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구나 싶다.


 거창하게 의미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으로써는 이것이 나의 최선이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고 다시 이 글을 읽었을 때 지금 몰랐던 고정관념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이제까지는 모르는 채로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알아가면 되지 않을까? 영어보다, 중국어보다, 일본어보다, 프랑스어보다 그 무엇보다 재밌으니까. 내게 맞는 제2 언어를 찾았으니까. 그 정도로만 두자.


 세 번 배운 것도 배운 것으로 치는지 일상에서 대화를 할 때 나도 모르게 표정을 풍부하게 사용하려고 하고, 목소리를 낼 때 수어도 같이 사용하려고 한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평범한 일상에서 농인이 보이고 수어가 보인다. 글을 쓰듯, 그림을 그리듯, 노래를 부르듯, 춤을 추듯 그렇게 소리를 내고, 표정을 짓고, 손을 움직인다. 이틀 뒤(이 와중에도 ‘이틀 뒤’를 표현하는 수형과 수향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목요일 수업이 기다려진다.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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