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골아이 Feb 11. 2021

식재료 이야기 - 돼지등뼈

코타키나발루의 육골차가 생각나는 뼈와 고기의 앙상블

 


가벼운 주머니의 종착역


 놀자 대학생 시절 최고의 안주는 감자탕이었다. 그것은 싸고 맛있으면서 배부른 데다 주력 종목인 소주를 무난하게 목으로 넘길 수 있어 주머니는 가볍고 지갑은 얇았던 나와 친구들에게는 완벽한 궁합이었다. 도서관에서 낯선 활자들과 눈싸움을 하다 엉덩이에 쥐가 나고 출출해질 때쯤이면 자연스럽게 서너 명이 모여 향하는 곳 열에 아홉은 학교 앞 감자탕집이었다.


  사회생활의 스트레스는 누군가와 공유하며 삭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 스트레스의 용량이 넘치기 직전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의 절반쯤은 사라지게 만는 오랜 친구들의 법을 이용한다. 벗들과의 술자리 차수가 올라갈수록 안주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술의 도수는 낮아진다. 블랙아웃으로 흐르는 정신을 조금이라도 붙잡아보고자 후천적으로 습득한 기술이다. 흥이 절정에 달 한바탕 노래방에서 두둠칫 파티를 벌이고 나면 혈중 알코올 농도는 다시 제로 세팅. 아쉬움이 남은 자들은 자연스럽게 그날 파티의 끝 지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꺼져가는 새벽의 마지막 취기를 보충하는 곳의 대부분은 24시 뼈해장국집이다.



정형 자본주의 :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뼈해장국과 감자탕의 주재료는 돼지등뼈다. 등뼈는 꽤 다양한 부위의 출발점이다. 등뼈에서 뻗어 나온 갈빗대를 제거하고 배받이까지의 살을 분리하면 삼겹살이다. 등뼈 안에 오목하게 자리 잡은 기름기 없는 살코기는 등심과 안심, 발골이 어려워 삼겹살이나 등심에 속하지 못한 등뼈와 가까운 짧은 갈빗대는 통째로 뜯어져 등갈비가 된다. 앞다리 쪽의 갈비는 삼각형 모양으로 정형해 갈비로 판다. 엉덩이 쪽 등뼈 살은 뒷다리살의 시작이고 척추의 앞쪽 목뼈 아래 부위는 목살이 된다. 돼지등뼈는 살아서 돼지의 중심을 지지하며 아래 사방으로 살을 나눠 보내며 한 개체의 품새를 만들어 준다.


  생을 마친 돼지는 도축과정에서 기계톱을 이용해 등뼈를 기준으로 갈리고 다시 앞뒤로 나뉘어 분할된다. 그 후 정형사의 칼날이 뼈와 뼈 사이를 돌아다니며 각자 맡은 역할대로 근육을 남김없이 훑어낸다. 정형의 목적은 돼지 한 마리를 해체해 최대한 많은 살코기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것이 본래 자본주의적 관점이다.


  형사들의 지상과제는 뼈에 살코기 최대한 적게 붙이는 것이다. 뼈에 붙어있는 살점은 고깃덩어리와 나눠지는 순간 더 이상 고기가 아니라 품가치가 떨어지는 잡뼈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지만 마트에 진열된 돼지등뼈에는 살밥이 제법 풍성하다. 정형 숙련도가 떨어지는 사람이 벌인 반 자본주의적 참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1차적인 생각이다. 본주의는 보통사람의 생각을 가볍게 넘는 비상함을 가지고 있다.


  상인의 임무는 잘 파는 것이다.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고 재고를 없애는 것이 목표다. 돼지 한 마리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좋은 가격에 파는 것이 상인의 목표라면 돼지등뼈도 살만한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상인의 임무다.


  살코기가 등심이나 갈비에 최대한 많이 속해야 최대 이윤이 나던 가난한 시절 등뼈 살밥은 볼품없고 빈약했다. 대신 풍성하게 정형한 등심과 안심은 일본으로 수출해 외화를 벌었고 갈비는 크고 먹음직하게 만들어 국내에서 고급 외식거리로 팔렸다. 잡뼈로 취급받던 등뼈에 붙을 수 있는 살은 없었다. 약간의 살점에 뼈만 남은 등뼈는 육수를 낸 후 다른 부재료를 푸짐하게 넣어 탕을 끓여냈다. 가난한 음식이었지만 맛은 가난하지 않았다. 등뼈는 감자탕, 감자국, 뼈 해장국 등의 이름으로 서민들의 대표 음식이 되었다. 주머니가 넉넉한 사람들은 돼지갈비를 먹었고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은 감자탕을 먹었다. 돼지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끌어냈다.


  돼지 도축 시장에는 모든 부위를 좋은 값에 팔기 위한 자본주의의 노력이 담겨있다. 등뼈의 살밥은 다른 부위의 상품성을 해치지 않는 않는 범위 내에서 어지는 자본시장의 에누리다. 람들이 등뼈로 만든 음식을 많이 찾을수록 감자탕과 뼈해장국의 고기는 점점 더 풍성해질 것이다. 돼지 등뼈의 살밥은 정하는 사람의 숙련도와는 별개로 자본주의적이다. 정형사 칼 끝의 자비는 자본주의의 관용 안에서만 춤을 춘다.

 


고기탕, 청량하고 순결한 맛


  '탕'자가 들어간 음식의 맛은 육수에서 대부분 결정된다. 그 맛은 함께 넣는 채소나 과실, 향신채의 맛과 향에 좌우되기도 하지만 탕의 맛은 기본재료인 고기와 부산물의 어떤 재료가 어떤 방식으로 들어가는지가 더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고기만으로 낸 육수는 맑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조용히 언 호수처럼 안이 훤하다. 하지만 맛은 결코 가볍지 않다. 표면을 딛고 서면 투명한 얼음의 두께가 얇아 보여 빠질 듯 위태롭지만 실제로는 고기를 가득 실은 레가 넉넉하게 지나갈 만큼 두터운 시베리아 어느 호수의 얼음처럼 내면의 맛은 청량한 깊음이 순결하게 서 있다.


  육수를 내는 물은 찬물에서 시작한다. 찬물부터 시작해야 대상물의 맛 성분이 잘 우러나기 때문이다. 찬물로부터 완만한 그래프로 오르는 물의 온도를 따라 고기는 시나브로 익어간다. 이윽고 맹물이 섭씨 100도를 오르내리며 고기의 겉과 속을 번갈아 성글게 훑여 내면 고기는 본래 어느 부위의 살이었음을 알려줄 만큼의 맛을 제외한 나머지 감칠맛을 물에 내어 놓는다. 마지막까지 살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 지방과 콜라겐이 녹아 물에 스미면 고소하고 깔끔한 뒷맛의 고기육수가 완성된다.



뼈탕, 구수하게 엉긴 뽀얀 맛


  본래 탕 육수의 기본은 뼈다. 동물의 몸을 땅으로부터 지탱하는 네 다리의 뼈를 육수용으로 최고로 친다. 사골이라 불리는 이 부위는 크고 치밀하고 단단해 다양한 맛 성분을 지니고 있다. 뼈 육수는 사골을 기본으로 여러 부위의 잡뼈를 혼합해 쓴다. 뼈에 남은 피는 잡내의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에 확실하게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뼈 육수를 낼 때는 찬물에 뼈를 오래 두고 피를 제거한 후 끓여야 한다. 뼈를 넣은 맹물이 서서히 온도를 올려 이윽고 끓기 시작하면 중불로 줄이고 온도와 증기의 압력을 유지한 채 여러 시간을 지속해 끓인다. 처음 끓여낸 육수는 희멀겋고 불순해 아직 육수로 쓰일 만큼의 능력이 없다. 그저 뼈의 표면과 잘린 단면을 거칠게 훑어 냈을 뿐 아직 뼈의 내면까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때의 물은 버려야 한다. 남은 뼈들을 깨끗하게 닦아 제차 끓이면 물은 골막을 뚫고 뼈의 내부로 들어가 해면질과 골수를 누비며 맛 성분을 찾는다. 그러면 뼈는 하얀 채색과 함께 단백질과 콜라겐과 칼슘과 인을 물에 내어준다. 그 성분들은 끓고 있는 물속에서 서로 붙고 엉겨 구수하고 뽀얀 육수로 재탄생한다.



고기와 뼈의 앙상블


  등뼈는 동물이 살아있을 때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개체를 지탱해주는 중심이며 가운데 단골에서부터 활처럼 뻗치는 갈비뼈의 시작점일 뿐만 아니라 바로 아래 장기를 보호해야 하는 개체의 주골이다. 때문에 등뼈는 사골에 버금갈 정도로 두껍고 단단. 등뼈로 낸 육수도 사골에 뒤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골육수보다 우월한 점도 다. 생전 객체의 유연한 움직임을 위해 여러 개의 짧은 뼈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뼛조각과 조각 사이사이에 붙은 연골 성분이 육수에 녹아내린다. 연골은 뼈의 해면체, 골수, 지방과 함께 중요한 육수의 원재료다. 정형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행해지는 반 가르기는 끓이는 과정에서 물이 뼈 내부를 침투하기 쉽게 만들어 다른 부위의 뼈들보다 쉽게 육수를 낼 수 있게 한다.


  뼈 사이사이에 붙은 고기들도 육수의 중요한 원재료다. 머리부터 꼬리까지를 잇는 등뼈에는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부위의 살이 붙는다. 지방이 잘 섞인 목심과 등심덧살은 고소하고 묵직한 맛의 기초가 되고 등뼈 엉덩이 쪽에 남겨진 보섭살은 부드럽고 육향 가득한 육수를 내기 안성맞춤이다. 등뼈로 만든 묵직한 뼈 육수에 맑은 고기육수의 조합은 어떤 부위보다 맛을 풍성하게 한다.



좋은 등뼈 고르기


  요리 재료를 살 때 다 그렇겠지만 등뼈도 신선한 것을 사야 한다. 원재료가 좋으면 요리의 절반 이상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등뼈는 뼈가 같이 붙어 있기 때문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육색이 선홍색이고 고기를 싼 랩을 눌러봤을 때 탄력이 있는 것을 골라야 한다. 혹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환경이라면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은 오래된 것이니 사면 안된다.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면 직원에게 상했다고 알려주자. 다 귀찮으면 마트 사장님이나 직원에게 언제 작업한 거냐고 물어본다. 요즘은 작은 동네 마트도 속이면서 장사할 수 없다. 내가 주로 다니는 동네 마트는 정육코너에서 돼지 반마리를 직접 해체하는 곳이어서 포장 년월일만 확인하고 믿고 사는 편이다. 등뼈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뼈에 붙은 피를 보는 것이다. 피가 많이 붙어있거나 핏빛이 검은색에 가까운 등뼈는 사지 말아야 한다. 고기부위의 잡내는 지방에서 나오고 뼈 부위의 잡내는 뼈에 남은 피에서 비롯된다. 신선한 살코기에서는 잡내가 나지 않는다.  

        


잡내 잡기


  마트에서 좋은 등뼈를 획득했으면 요리 직전까지 냉장 보관한다. 그리고 요리 직전 흐르는 찬물에 고기를 꼼꼼하게 씻어 겉에 붙은 핏덩어리와 기계 정형 과정에서 붙은 뼛조각들을 떼어낸다. 찬물에 담가 피와 뼛조각을 제거하는 것이 보통의 방법이지만 이는 기껏 뺀 핏물에 살을 절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나는 하지 않는다. 물을 자주 갈아주는 것도 방법이지만 물에 담그는 것 자체가 잡내와 함께 뼈와 살의 맛 성분도 함께 빠져나가게 하기 때문에 비효율적이다. 그 대신 나는 끓는 맹물에 씻은 등뼈를 넣고 다시 한번 끓을 때까지 짧게 삶은 후 찬물에 꼼꼼히 제차 씻는 방법을 선호한다. 이렇게 하면 찬물에 담가 핏물을 빼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찬물에 빠져나가는 등뼈의 맛도 살릴 수 있다.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육골차. 간장베이스의 육수에 등뼈와 잡뼈를 넣고 푹 끓여 먹는다.


육골차처럼


  말레이시아에서는 빠쿠테라는 음식을 판다. 한자로 육골차(肉骨茶)라고 써진 간판을 단 집에서 파는 음식인데 우리나라 음식과 비교해 보자면 간장 양념을 한 갈비탕과 비슷한 맛이다. 십여 년 전 코타키나발루 여행 갔을 때 호핑투어 후의 으슬으슬 거리는 몸을 이 육골차로 녹였던 기억이 워낙에 강렬해 종종 요리해 먹곤 한다. 현지에서는 등갈비나 사골을 잘라 쓰지만 나는 등뼈를 쓴다. 나라마다 값싼 부위는 다르다.


  끓는 물에 넣은 고기는 수육으로 먹고 찬물부터 넣은 고기는 육수를 낸다. 끓는 물에 한번 삶고 씻어낸 등뼈는 찬물부터 끓인다. 맹물에는 파 두 뿌리와 양파 한 개를 흙만 잘 씻어 반만 갈라 넣는다. 뼈의 양은 2kg이다. 물은 등뼈가 완전히 잠기고 손가락 두 마디가 들어갈 만큼 넣는다. 여기에 빠쿠테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해 레몬그라스 3줄기와 엄지손가락 윗마디 두 개 분량의 생강을 넣는다. 레몬그라스 줄기를 칼등으로 빻아 넣으면 주방에는 코타키나발루 우기 육골차 가게에서 맡았던 향으로 가득해진다.


  한번 파르르 끓기 시작하면 넘치치 않게 불을 약하게 조절한 후 30여분을 더 끓이고 식힌다. 식힐 때는 상온에서 천천히 식혀야 한다. 끓이는 행위는 살균과 함께 재료를 익혀 부드럽게 만들어 다른 재료와 섞이기 쉬운 상태로 만들고 성글어진 조직 사이에서 맛 성분이 쉽게 빠져나오게 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깊은 맛은 오히려 약한 온도를 유지하며 데워지고 식는 과정에서 뼈와 고기에서 빠져나온 육수와 가향 성분들이 물속에서 어우러지며 만들어진다.


  식은 등뼈는 육수와 함께 밀폐 유리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하루정도 숙성시킨다. 하루 후에 꺼낸 유리용기 위에 하얀 기름이 굳어있고 아래는 살짝 젤리화 된 육수가 뼈 사이사이에 담겨 있다면 잘 완성된 것이다. 기름은 걷어내기 쉽고 젤리 같은 육수는 숙성되어 깊은 맛을 품고 있다.


  넓은 냄비에 뼈를 담아낸 후 기름을 없앤 육수를 뼈가 잠길 듯 말 듯하게 넣는다. 등뼈 2kg을 삶고 나온 육수는 계량해보니 약 1.8리터였다. 육수에 50ml 계량으로 진간장 3컵, 설탕 1, 다진 마늘 반 컵, 참기름 반 컵, 후추 약간을 넣고 기호에 따라 꽃소금으로 간을 추가한다. 레몬그라스 덕분에 육수가 끓어오르는 냄새만 흘러도 이미 코타키나발루 우기 육골차 향기가 난다.


나는 여기에 물에 불려놓은 당면과 검지 손가락 길이로 썬 후 세로로 4 등분한 대파를 넣는다. 크게 썬 대파의 향은 돼지 육향과 잘 어울린다. 제철의 끝을 맞아 저렴한 당근도 여러 개 손가락 길이와 굵기로 썰어 넣는다. 분홍빛을 육수에 내어주고 달큼하면서 익어도 단단함을 잃지 않는 당근을 나는 좋아한다.




  식탁 위에 오른 휴대용 인덕션 위의 냄비가 바글거리며 끓어오를 때 안주인님과 아이를 부른다. 미리불러야 시간이 맞다. 다른 일을 하느라  바로 오지않는 이들이 올 때쯤 육골차 한번 끓고 식으며 최종 완성기 때문이다. 식탁앞에 모두 모이면 보온기능을 이용해 식지 않게 냄비를 달구면서 먹는 것이 포인트다. 휴대용 인덕션은 80도 온도유지 버튼이 있어 불조절하는 손이 자유롭다. 손은 뼈를 발라주면서 다시 아이와 안주인님에게 구속되었다.


  냄비 속은 뼈와 살과 육수 좀 전에 넣은 부재료와 섞 어우러져 있다. 뼈는 두 손으로 쉽게 떼어졌고 젓가락으로 들어 올린 고기는 부드러웠다. 엄지를 장난스럽게 내리다 올린 아이는 이 음식의 이름을 '양념돼지등뼈'라고 지어주었다. 내가 먹기 위해 만드는 음식은 개인적이지만 남과 같이 먹기 위해 만든 음식은 사회적이다. 우리 가족은 양념돼지등뼈를 함께 먹으면서 동남아시아와 미얀마 사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손은 식사가 끝날 때 쯤 다음 식사때까지 조건부로 석방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식재료 이야기 - 홍당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