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이야기 - 한 해의 시작 날 당직입니다.
2021년은 평온하고 깨끗하고 성공적이기를
오늘은 한 해의 첫날. 1월 1일이며 신정이라 부르고 달력에는 빨간 날로 표시된다.
안주인님이 오늘 신문 오는 날이냐고 물어본다. "어제 평일이었으니까 아마 올걸?" 전날이 평일이면 다음 빨간 날은 대부분 중앙지들은 신문을 발행한다. 평일엔 기자들이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요일은 신문이 쉰다(토요일을 쉬므로). 요즘 안주인님은 경제신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신다. 그런데 그분이 구독하시는 경제지는 오지 않았다. 안주인님은 약간 노하셨지만 나는 반가웠다. 노동자의 관점으로 보면 그 신문사는 좋은 회사다.
나는 한 종합편성 채널의 영상기자고 오늘은 당직이다. 휴일 당직은 14시까지 출근해 다음날 07시에 퇴근한다. 그래서 집에서 조금 늦게 나가도 되는 즐거움을 누린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에 즐거움은 집 안에서 찾아야 한다. 아이와 놀고 안주인님과 이렇게 저렇게 티격 되다 보면 벌써 가야 하는 시간이다. 올해 들어 가장 맛있는 식사를 하고 올해 들어 가장 뜨거운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회사로 간다. 1월 1일이라 나름 비장하게.
당직을 서는 영상기자들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주간에 일하는 영상기자들이 퇴근하며 그들이 혹시 마무리하지 못한 취재거리를 임무교대하거나, 야간에 의뢰가 오는 영상취재를 하거나, 밤사이 사건사고를 취재하거나 셋 중 하나다. 글로 쓰니 간단하지만 막상 닥치면 꽤 힘들다. 검찰이나 경찰서에 소환된 피의자나 참고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소위 '뻗치기'를 할 경우에는 요즘 같은 날씨에는 완전 무장을 하고 가야 한다. 영하 2~3도에도 바깥에서 한두 시간 기다리면 손끝 발끝부터 얼기 시작해 나중에는 녹화버튼을 누르기도 힘들어진다. 다행히 새해 첫날이라 오늘은 그런 상황은 없다. 공무원들도 쉬기 때문인지 인정 때문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새해 첫날부터 누구를 소환하거나 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2013년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 나는 당직이었다. 그날 민주노총 부위원장 등 여러 명은 경찰의 체포영장을 피해 조계사에 은신해 있었고 나는 조계사의 한 전각 앞에서 의미 없는 뻗치기를 했다. 몸은 발끝부터 얼어가기 시작했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 뛰며 움직이는 것이 훨씬 몸에 도움이 되는 날씨였다. 그들은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조계사 바깥에 경찰병력이 깔려 있고 경내에도 사복경찰이 암약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여러 대의 언론사 카메라와 기자들도 진을 치고 있어 찍히고 싶지 않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백만분의 일의 확률을 위해 하는 것이 뻗치기고 데스크는 그 확률에 추위속으로 몸은 던지는 야근자를 걸고 배팅한다. 데스크는 이럴 때 늘 원망스럽다.
마음속으로 부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며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33번의 종소리는 밤하늘의 시간과 공간을 분명하게 갈랐다. 2013년은 가고 2014년이 온 것이다. 하지만 나의 2013년에서 비롯된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나는 옆에서 함께 발을 구르고 있는 나의 오디오맨에게 복을 나누어 주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선배". 주변의 다른 종편 영상취재 선후배들에게도 복을 빌어주고받았다. 괜히 벅차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와서 떡국 한 그릇 드시고 하세요."
무채색 불교 신자 복장을 한 어머니 뻘 되는 여성분께서 허리춤을 살짝 끌며 말했다. 아까부터 옆 건물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더니만 공양할 음식을 만들고 있던 모양이다. 나의 종교는 천주교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서만큼은 부처님 자비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불교인이 되었다. 간단히 동종 취재진끼리 떡국 풀을 구성한 후 대충 담벼락에 앉아 종이 사발로 한 움큼 떠주는 떡국을 입에 넣었다. 하얀 국물은 천사가 전해주는 생명의 샘물처럼 언 몸을 녹였고 그것보다 더 하얀 떡은 부처님의 자비이거나 주님의 자비가 되어 내게 안겼다. 2013년 12월 31일에 가져왔던 추위는 떡국의 자비로 2014년 시공간에서 지워졌고 나는 무사히 나에게 정해진 몫의 뻗치기를 마쳤다. 조계사에 은신해 있던 사람들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자진해서 밖으로 나왔다. 그들도 내가 먹은 그 떡국을 먹었을 것이다.
2021년 1월 1일 14시보다 이른 시간에 나는 출근을 마쳤다. 출근하자마자 바로 야간 일정을 확인했다. 날씨 등 돌발상황도 확인했지만 깨끗했다. 아무것도 없는 당직이 될 듯했다. 집에서 가져온 침낭을 보며 오늘은 편하게 쪽잠을 잘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시간은 1월 1일 01시 35분을 지나고 있다. 새해 첫날 당직은 '평온', '깨끗', '성공적'.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춥지 않다는 것. 2021년은 오늘처럼 평온하고 깨끗하고 성공적일까.
주님 자비를 자비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