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처럼, 첫사랑

by 오뉴월의 뉸슬

4/16.

어느덧 나도

너무나도

지금 내 기분은

지금 나는

내일은 아마도

오늘 나는 정말

과연 난

지금 상태로는 아마도 난

오늘처럼만 내일도

지금 이순간은

행복




그 애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소꿉친구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어쩌다 한 번 짝꿍이 되고 나서 그 애가 옆에 있으면 내가 항상 웃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중학교에 올라와서 같은 반은 되지 못했지만 과학 영재반을 다니면서 얼굴만 트는 어정쩡한 프렌드쉽을 이어갔다. 그때까지 우리는 친분이 있었지만 서로 먼저 말을 걸기 애매한 선을 넘지 못했다. 저녁 늦게 영재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헤어진 나는 한순간에 조용해진 거리가 무서워서 그 애 뒤를 바짝 따라 걸었다. 마침 집으로 가는 방향이 서로 같았다. 집에 도착한 뒤 영문 모를 간질거림에 나는 영재 반에서 같은 모둠에 앉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 간절했던 마음이 통한 건지 한 번도 같은 모둠이 된 적 없던 우리가 비로소 운명처럼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다. 나는 나와 그 애가 실로 이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애가 우리 반 교실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설마, 친구 보려고 우리 반에 놀러 온 거겠지.'하고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그 애는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나한테 다가와 "너도 이 반이야?"하고 물었다. '얘가 무슨 일로 나한테 말을 걸지?' 나는 살짝 놀란 마음을 감추려고 포커페이스로 "어? 응."하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심 그도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게 기분이 좋아 힐금힐금 곁눈질로 그를 쳐다보다 얼른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그 애는 피부가 약간 까무잡잡했고, 속눈썹이 길었다. 또, 내가 좋아하는 중저음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졌다.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나와 키가 비슷했었는데 그 사이에 나보다 키가 훌쩍 커버렸다. 그 애 옆에 서면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내가 줄곧 올려다봐야 했다. 같은 반이 되고부터 교류가 많아졌다. 중간고사 시험 성적으로 성적이 더 낮은 사람이 떡볶이를 쏘는 내기를 하기도 했다. 몇 점 차이로 아쉽게 진 내가 벌칙으로 떡볶이와 빙수까지 풀코스로 사줘야 했다. 우리 둘 다 매운 걸 잘 먹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 메뉴를 매운 떡볶이로 시켜서 둘 다 눈물, 콧물을 실컷 뺐다. 우리는 떡볶이로 초토화된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배꼽 빠지게 웃어댔다.




하루는 그 애가 나에게 떡볶이 값을 갚겠다며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 애가 현관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했었는데 눈 앞에 실제 당사자가 있으니 꿈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애와 나는 계절밥상에 도착하기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발을 맞추며 걸어갔다. 밥을 먹는 것보다 그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너무 재밌는 나머지 시간이 금방 가는 줄도 몰랐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식당 끝날 시간이 다 돼었다며 직원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줬다.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는 도중 여성 종업원이 우리 둘을 보고 귀엽다는 듯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며 다리를 꼬아 얼른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백화점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었는지 나오는 길에 다른 식당 조명이 군데군데 꺼져있었다. 로맨틱한 분위기에 나는 우리가 사랑과 스릴이 넘치는 프랑스 첩보극 영화를 촬영하는 착각이 들었다. 집에 가까워지자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웠던 우리는 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하고 바라며 느리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나처럼 글을 쓰고 있었고,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와 부모님의 기대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나는 그를 더 많이 알아가고 싶었다. 더 다가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귀뚜라미가 밀어붙이라는 신호를 보내는 듯 찌르르하고 울었다. 한 뼘만 가면 닿을 거리에 그의 손이 있었다. 나는 한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잡을까 말까 망설였다. 어두운 밤 속에서 가로등의 환한 불빛이 우리만을 비추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헤어지기 전에 나는 큰 마음을 먹고 떨리는 손으로 내 시들을 적은 공책을 건네주었다. 나는 꼭 러브레터를 전하는 것처럼 부끄러워져서 집에 가서 읽어보라며 부리나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며칠 뒤 학교에서 그는 나를 부르더니 나에게 줄 것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머리 위에 물음표가 그려졌지만, 그가 꺼내 든 공책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친구들은 그게 뭔데라며 물어보았지만 나는 얼버무렸다. 우리 둘만의 비밀이 생긴 것 같아 가슴이 몽글몽글거렸다. 집에 오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공책을 펼쳐 들었다. 공책 안을 본 나는 눈을 의심했다. 그 애는 내 시 밑에 형광색 노란 포스트잇을 붙여 일일이 감상평을 적어주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삐뚤빼둘한 글씨로 정성 들여 쓴 글을 보고 지구에 외계 소행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감동이 밀물처럼 나를 흔들었다 사랑만을 남기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 benblenner, 출처 Unsplash


그 날 이후, 우리 둘만의 추억들이 한 여름밤의 꿈이 었던 것처럼 우리는 만남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내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학교를 자주 결석하게 되었고, 그 애도 학원 때문에 일정이 바빠지면서 우리는 서로 멀어져 갔다. 같은 단지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는 데도 한 번을 마주친 적이 없다. 나는 아파트 주변을 산책할 때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애가 길을 지나가며 우연히 마주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열여덟, 나의 첫사랑은 곧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인 듯 흐지부지되었다. 우리는 각자 다른 고등학교를 가게 되면서 처음부터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가끔 크리스마스날이나, 새해가 되면 서로에게 안부 문자를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만 혼자 이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져 내 선에서 먼저 연락을 그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가끔씩 열어보고 싶은 추억으로 남겨졌다. 노트 사이사이에 꼭꼭 숨겨두어 안 보이게 감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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