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던 세상이 한순간에 증발해버린다면

보이지 않는다는 공포

by 오뉴월의 뉸슬

'딩동댕동~딩동댕동~'



'점심시간이다!'


12시 정각이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다. 몸놀림이 분주해진 나는 교과서와 필통을 슬그머니 정리했다. 급식 당번들이 급식차를 가져오려고 밖에 나가자, 교실은 순식간에 활력을 되찾았다. 아이들은 저마다 용수철처럼 튀어올랐고, 선생님은 막판 스피드로 말을 하다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가셨다. "오늘 점심은 뭐야?" "헐, 대박 풀밭이다." "아, 나 생선 싫은데." 복도에서 쿵쾅대는 발소리와 급식차의 바퀴소리가 교실에 가까워지면서 커져갔다. 한 당번이 국 통의 뚜껑을 열자, 시금치 된장국의 구수한 냄새가 교실에 진동했다. 배식을 받자마자 밥을 후루룩 삼킨 나는 숟가락통을 가방에 던지듯 놓았다. '아, 40분 남았어.' 나는 여자애들과 일제히 뒤도 안 돌아보고 운동장 밖으로 나왔다.


유리문을 열자 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운동장 잔디밭에는 벌써 남학생들이 골대를 점령해 다른 학년끼리의 축구시합이 한창이었다. "쟤네는 밥을 안 먹나봐." 사람이 바글바글한 운동장과 달리 놀이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놀이터는 운동장을 끼고 학교 맞은 편에 길게 위치해 있었다. 우리가 갈 정글짐은 후문에서 가장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한참을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나는 달리기를 시작함과 동시에 학교 중앙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벽걸이 시계는 반으로 쪼개져 하나의 직선으로 이어져있었다. '1시까지 어림잡아 약 30분. 20분 정도 놀 수 있겠네.' 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 laterjay, 출처 Pixabay


정글짐 위에서 한참 술래잡기를 하고 있을 때,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종소리가 일제히 운동장을 향해 울려 퍼졌다. 우리들은 서둘러 정글짐을 내려와 너도 나도 할거 없이 허겁지겁 후문으로 돌진했다. 그 사이, 같이 달리고 있던 나와 친구들의 거리가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뛰어간 친구들은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을 거리만큼 나한테서 멀어졌다. ‘아, 진짜 치사하게.’ 친구들은 이미 학교 건물에 다다라 조금 전까지 흐릿하게 보이던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은 이미 내 존재도 까먹고 계단을 부리나케 오르고 있을 것이다. 원망도 할 시간 없이 나는 그저 온 힘을 다해 발을 움직였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단숨에 3층까지 올라온 나는 멀리서 보이는 5반 교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교실에 가까워질수록 소란스럽게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왔다. 여느 때와 같은 우리 반을 확인한 나는 열기가 다한 두 다리를 이끌자, 눈앞에 갑자기 뿌연 안개 같은 막이 생겼다. '어?' 교실을 앞에 두고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에 나는 그대로 멈춰 서버렸다.'이거 뭐지? 지금 나만 이런 건가? 나만 이래?' 나는 앞을 더듬여가며 간신히 뒷문을 열었다. 잠시 깜박 감았던 눈을 뜨자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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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안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점들이 찍힌 큰 점성화 그림같기도 하고, 휴대폰 해상도 240p 화질 같이 뭉개져 보이기도 했다. 내 시야에 잡히는 모든 것들이 물감이 얼룩덜룩 묻혀진 추상화였다. 색깔은 빛을 따라 밝아졌다, 어두어졌다 했고 친구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자 덩어리 져 움직였다. 정보를 한꺼번에 저장한 하드드라이버같이 과부하가 걸렸다. 시력이 단숨에 마이너스가 되버린 것처럼 친구들의 눈 코 입이 보이지 않았다. 쉬지 않고 모양을 바꾸는 알갱이들이 '사람'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게 누구인지 여자인지 혹은 남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어떻게 된 일이지?' 그야말로 머리속이 정지되었다.


몇 분가량 상황 파악을 하다, 내 오른쪽으로 나보다 키가 큰 애가 나를 은근슬쩍 돌아보며 지나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데도 수상하게 여기는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미동도 안 하는 나를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 위해 천천히 근육을 움직였다. ‘우선 빨리 자리에 앉자. 의자, 의자 어딨지.' 몸은 내 몸 같지 않았고, 앞이 어딘지도 모르는 내 방향감각에 식은땀이 났다. '집중하자, 오늘 아침에도 착석했어.' 나는 눈을 감았다 생각하며 오로지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2분단 넷째 줄 오른쪽' 교실의 3분의 1지점에서 분단 사이로 들어가 책상 모서리를 하나씩 손으로 쓸었다. '뒤에서 세번째니까, 하나, 둘, 셋. 여기다.' 혹시라도 잘못 찾았을까봐 걱정된 나는 책상 고리에 걸려있는 책가방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이거 내 가방 맞아. 키플링 원숭이. 빨간색.' 나는 책상을 더듬어 가며 간신히 의자에 앉았다.





자리를 찾은 나는 안도와 동시에 공포감이 몰려왔다. 한 순간에 바뀌어버린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혼란스러웠던 세계가 돌연 까마득한 암흑으로 뒤덮였다. ‘계속 이런 시력으로 살아가면 어떡하지? 보건실에 가서 말해야 하나? 그런데 앞이 보이지도 않은데 어떻게 보건실에 가? 선생님에게는 뭐라고 얘기해야될까. 앞이 갑자기 안 보인다고 얘기하면 누가 믿어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눈물이 주륵 흘렀다. 참담했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야 돼?' 난생 처음 겪는 일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1분이 1시간 같던 시간이 지나고, 수업을 시작한다는 종소리가 낡은 스피커를 통해 새어 나왔다. 힘없이 고개를 든 나는 울음 속에 절여있던 두 눈을 떴다. 투명한 눈물 자국이 붉은 소매에 빨갛게 배여 있었다. 커튼이 답답했던 한 아이가 커튼줄을 내리자 교실 안에는 오후의 햇살이 눈 부시게 내리쬐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나는 눈이 저절로 찌푸렸다. 햇빛은 나비 모양을 그리며 사라졌고, 미세하게 반 친구들의 얼굴이 전보다 뚜렷해졌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우리 반이 이렇게 다채롭게 생겼었나?' 내 옆에 앉은 짝꿍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시각을 잃은 건 몇 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평범하게 보고 지내던 모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시력이 완전히 돌아오기 전 담임 선생님은 6교시가 되자 앞문을 밀고 들어오셨다. 나는 익숙하게 책상 밑에서 수학 교과서를 꺼내 들었고 체크무늬 필통을 가지런히 놓았다. 지문에 글자 내용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는게 느껴졌다. 1시간 전과 똑같은 풍경에 나는 내 두 눈알로 주변을 굴러 보았다. 선명한 빛깔들로 가득 찬 교실이 내일도 지속되기를 마음 속으로 기원하며, 칠판 위에 하얀 분필로 써놓은 시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녹색 칠판을 딱딱 긁는 분필 소리가 왜 그리 정겨운지, 나는 가만히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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