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by 오뉴월의 뉸슬

창밖의 검은 수채화가 푸르스름하게 변했다. '오늘도 또 해를 보겠군.' 올려다 본 시계는 아슬아슬하게 5시를 가리키지 않았다. 얼마 후,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빠가 서재로 들어가셨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혼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시리즈 예고편을 주면서 끝나버린 드라마는 미련을 남겼다. 나는 더 볼게 없나 고민하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보고 싶은 드라마는 없었지만 이대로 잠자기가 아쉬웠다. 푸른 빛을 띄던 창은 금방 연하늘로 물들었다. 커튼에 레몬빛 햇살이 쏟아졌다. 건드릴 것도 없이 멀쩡한 책상을 정리하던 나는 천근같은 몸을 의자에서 일으켰다. '이제 진짜 자야지.'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정오가 지난 시간대에 일어나게 되면 나는 의욕을 잃곤 했다. 글을 쓰기도 전에 하루가 다 지나간 기분이었다. 저녁에도 유튜브로 시간만 보내는 날이 반복되었다. 일찍 잠에 들려고 해도 눈은 컴퓨터 화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침 9시에 자서 밤 12시에 일어난 적도 많았다. 매일이 밤낮이 바뀌는 악순환이었지만 이상하게 나는 이 패턴을 바꿀 수가 없었다. 엄마도 아빠도 내가 늦게까지 깨어있는 걸 걱정했다. 나는 왜 내 몸을 혹사 시키는 짓을 계속하는 걸까? 어차피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데도.


밤 늦게까지 넷플릭스를 보다보면 새벽 한두시를 훌쩍 넘겼다. 두 눈에 졸음이 몰려와도 나는 잠을 자지 않으려고 애썼다. '아직 잠에 들면 안 된다.' 새벽은 금세 아침으로 바뀌고, 새소리가 들려온다. 자정을 넘긴 시점부터 '내일'이 시작되었지만 왠지 잠을 자고나야 비로소 내일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내일은 오늘보다 충실하게 보내야 된다는 생각에 하루가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내일은 할게 많으니까 지금 실컷 놀아야지.' 내일도 게임이나 할 게 분명하면서 나는 컴퓨터 화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정을 넘긴 시간대는 나와 컴퓨터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이 시간을 고요한 멈춤 상태라 불렀다. 마치 시간이 정지되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캄캄한 거실에 컴퓨터만 환하게 켜져있는 걸 보면 마치 이 세상에서 나만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다. '내일은 무서우니까, 내일은 또 아플거니까, 내일은 정말 죽을 수도 있으니까. 내일은 정말로 내 시간이 멈출 수도 있으니까.' 나는 내일이 오는 걸 막기 위해 내가 '사는 시간'을 늘렸다. 시간을 멈출 수는 없어도 내가 살아있는 시간은 만들 수 있었다.


새벽 2,3시가 넘어가면 심장이 두근두근 빨라지고 머리가 아파왔다. 내일의 죽음을 피하려고 했는데 고통스러워지는 아이러니가 생겼다. 그래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아파할 수 있는 지금이 나았다. 내일의 나는 또 모른척 내 고통을 숨기고 행복한 척 가식적인 나를 꾸며내야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희귀병 환자였던 내가 '평범한 사람'으로 변하기 위해 아득바득 기어가야하고 움직여야 했다. 이 모든 일들이 너무 버거운 나는 조금이라도 내일을 늦추기 위해, 조금이라도 내 병이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해, 죽음을 늦추기 위해 잠을 자지않고 버텼다. 비록 내일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말이다.


새벽 5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영화에서는 히어로가 펀치 한 방으로 악당을 물리치는 장면이 화려하게 눈과 귀을 매혹시켰다. 생각해보니 나는 오늘도 컴퓨터나 핸드폰을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만 집중했을 뿐,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을 낭비했다. 다음 날로 넘어가는 걸 최대한 늦춘 나는 행복했을까? 아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일, 아니 오늘의 태양이 뜨지 않았으면 했지만, 해는 이미 저 위에 떠버렸다. 침대에 살며시 누운 나는 암막 커튼에 비치는 햇빛을 보며 생각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이미 내일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