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밴져스> 시리즈의 슈퍼 히어로들은 번번이 위기를 뛰어넘고 정의를 실현한다. 우리가 히어로물을 보는 까닭도 은연 중에 그들이 살아남고 이길 것이라는 결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히어로가 죽는다? 이건 뭐 말도 안된다. 그런 이유로 <어벤져스 : 인피니티 워>에서는 관객들에게 충격과 반전을 선사하기 위해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먼지가 된다. 그러나 결국엔 <어벤져스 : 엔드게임>에서 부활을 하며 악당인 타노스를 죽이고 승리를 가져온다.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오죽하면 그런 말도 있지 않는가. 이처럼 어떤 이유든 주인공은 역경을 딛고 이겨낸다.
원고를 투고한 30곳 중에서 한 출판사로부터 나머지 원고를 보고 싶다는 메일이 왔다. 나는 세상을 정복한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더 대왕이 된 것 처럼 기뻤다. '내 삶에도 드디어 빛이 내리 쬐이는 구나.' 마법처럼 나에게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순간이 찾아왔다. 어느 소설이나 '위기-절정-결말'이라는 짜임새가 있듯이 내 인생도 출판이라는 결말을 낼, 절정의 순간이 다가왔다. 책을 출판하고 상승 곡선을 달리는 나의 미래는 더없이 빛나 보였다. "이제는 성공가도만 남았어.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오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긴댔어." 하지만 나는 그 사자성어가 반대로 작용할은 줄 몰랐다.
남은 원고를 급히 쓰고 메일을 보낸 다음, 얼마후 답장을 받았다.
마저 보내 주신 원고 읽고서 저희가 내부 검토를 해 보았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솔직하게 써 나간 부분이 인상적이어서 시간을 두고 저희가 깊이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책으로서 진행하기에는 저희가 아쉬움이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어 출간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한 달 넘게 답이 안 왔을 때부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메일을 열어보았으나, 막연히 생각만 했던 좌절감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애써 '거절' 메일을 받은게 벌써 몇번째인데 괜찮아.' 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주변에 달라붙는 우울감을 외면하며 RPG 게임을 다운로드 했다. 나는 밤새도록 게임을 하고 오전 9시가 되어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엄마는 매일 밤마다 뜬 눈으로 지새우는 나를 못마땅해 했지만, 핸드폰을 끄면 스물스물 다가오는 절망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게임 레벨은 50을 찍었다. 나는 아이템 모으는 것도 던전 도는 것도 재미가 없어질 때가 되서야 게임을 삭제했다. 밤을 새는 일이 두달 전에도 있었던 것 같았다. 달력을 들춰보니 내가 부산 세미나에서 성추행을 당한지 두달 만이었다. 아직 성범죄 피해자라는 억울함이 아물지도 않았는데, 다시 또 비관적인 일이 생겼다. 출판 실패는 새 살이 돋아나려고 딱지가 생기는 속살에 불에 지진 나이프를 깊숙히 박아 넣었다. '이번에는 깊네. 자국 남겠다. 아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어.' 현실을 피하고 게임에 몰두 할수록 내 자신은 초라해졌다. 어플을 삭제하고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어떨까.
뭘까, 내 인생은. 폐이식 수술 제안을 받고, 성추행을 당한지 반년도 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지구의 버그 같은 존재는 아닐까? 그래서 삶이 자꾸 나를 태초로 돌아가게 만드는 건가. 온 세상이 나를 꼭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 같다. 신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하지만, 그 시련이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얘기는 없었단 말이다. 이 지독한 릴레이를 끊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매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생리처럼 방황을 겪으면서 원래 상태로 되돌아 올 방법을 배우기도 한다. 한달 이상 괴로워했었던 내가 이번에는 2주만에 훌훌 털고 일어났다. 골반 통증이 심해 재활 치료를 받기 위해 집밖으로 나왔다. 도수 치료를 십여 차례 받고, 수액도 두번 맞고 나니 몸도 기분도 조금씩 나아졌다. 몸을 추스리고 나니 바닥에 쓰러져 있던 마음도 보듬어 줄 수 있었다. .
안 좋은 일은 항상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여기서 더 최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죽겠는데 또 다른 최악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이 게임의 승자는 누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