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을 만났다 부암동에서 잠

부암동에서 잠깐 탔던 5분이 30년이 된 날

by 강동민

부암동에 갔다.


인왕산 쪽에 주차를 하고, “트래킹 좀 하자”는 마음으로 부암동 인도로 내려갔다. 가족이 옆에 있었고, 나는 늘 그렇듯 “이쪽이야”라고 먼저 걷기 시작했다.뭔가를 확신하는 척하는 습관이 있다. 아빠는 길을 모르면 안 된다는, 이상한 체면 같은 거.

부암동 트래킹

그런데 인도가 좁아지더니… 사라졌다.

정말로 사라졌다. 마치 지도에서 지워진 것처럼.


갑자기 우리는 차길 옆으로 밀려났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아주 좁은 길. 차들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가고,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손을 꽉 잡는다. 아내가 나를 한 번 본다. 그 눈빛이 있다.

‘당신… 길 맞아?’

말은 없는데, 마음이 먼저 말한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괜찮아, 조금만 내려가면…”

하지만 내 속은 이미 한 번 넘어져 있었다. 내가 길을 잘못 안내했다는 그 사실 하나가, 갑자기 나를 작게 만들었다. ‘괜찮아’라는 말이, 괜찮지 않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말이 되는 순간.


그때였다.

SUV 한 대가 우리 옆에 서더니 창문이 내려갔다. 낯선 분이 물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그 질문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요즘은 보통 “왜 저기 걸어?” “위험해!” 같은 말이 먼저 나오는데, 그분의 첫 문장은 목적지를 묻는 말이었다. 목적지가 있다는 걸, 우리가 헤매는 사람이 아니라 ‘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전제로 하는 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인도가 사라진 걸 설명해야 하나,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걸 고백해야 하나, 괜히 경계해야 하나… 머릿속에서 여러 개의 시대가 동시에 켜졌다.


그분이 말했다.


“인도 없으니까요. 같이 타고 내려가요. 집까지 데려다드릴게요.”


집을 물으셨다.

나는 “집에서 나와 산책하러 왔고, 부암동 주민센터 쪽으로 가려던 길이었다”고 말했다. 설명이 길어진다. 당황하면 나는 설명이 길어진다. 그게 또 내 티다.


차는 천천히 우리를 태웠다.

문이 닫히고, 안전벨트를 매고, 엔진 소리 사이로 사람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낯설지 않았다. 이상하게 익숙했다.


딱 5분 정도 탔다.

그런데 그 5분이, 30년 전으로 나를 데려갔다.


어릴 때는 이런 장면이 있었다.

길에서 누군가가 “타”라고 말해주는 세계.

동네 아저씨가 “어디 가니?” 묻고, 아이가 “저기요”라고 대답하면, 그 말을 믿어주는 세계.

그때는 세상이 지금처럼 ‘경계’로만 서 있지 않았다. 위험도 있었겠지만, 그 위험보다 먼저 도착하던 게 있었다. 사람의 마음.


요즘엔 이런 경험이 거의 없다.

내가 먼저 경계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의심하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은 그냥 태워줬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당연하게.


곧 내려주셨다.

아마 그분에게는 대단한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냥 “저렇게 걷는 가족 위험해 보이네”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달랐다. 우리는 그 5분 동안, 마음이 잠깐 쉬었다.


차에서 내리면서 나는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요즘에 이런 경험이 없는데…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말이 너무 많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날은 말이 많아도 됐다. 감사는 좀 과해도 되는 감정이라서.


가방에 뭐라도 있으면 드리고 싶었다.

귤 한 개라도, 커피 쿠폰이라도, 뭔가 손에 쥐여드리고 싶은 마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가진 게 고맙다는 말밖에 없었다는 게 갑자기 아쉬웠다.


차가 멀어질 때까지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그냥 고마운 게 아니라… 내가 그쪽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쪽이 어디냐면, ‘사람이 사람을 믿어주던 시간’ 쪽.


나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

나 다시 돌아갈래.

박하사탕처럼.


그 영화에서 그는 끝없이 외치지만, 돌아갈 수 없어서 더 아프다.

나는 다르다.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가지는.


오늘 내가 받은 친절을, 내 차에서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되돌려주는 것.

누군가의 인도가 사라졌을 때, “어디까지 가세요?”라고 물어주는 것.

그 질문 하나로, 그 사람의 하루가 잠깐 30년 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부암동에서 인도가 사라졌다.

대신 사람이 나타났다.

그게 오늘의 기적이었다.



육상부 | 감정을 해석하는 사람의 일기

조심성이 많아진 시대에도, 친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먼저 꺼내는 사람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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