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이지 May 21. 2020

사랑하는 존재들을 겁도 없이

웹진 취향껏 6호

언젠가 아빠에게 말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자의가 아니었고, 당신은 나를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를 잘 키워낼 책임이 있다고, 그리고 나는 그 책임으로 키워질 권리가 있다고. 이렇듯 무언가를 키워내는 일은 책임이 뒤따라올 수밖에 없다. 



딸에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빠가 얼마나 속상했을지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환경에서 완벽한 교육을 받아 내 생이 탄탄대로였다면 모르겠지만 자라남에 있어 안전한 느낌을 제공해준 적이 없었으니 아빠는 속상해하면 안 됐다. 그렇게나 공격적이었던 어린 나를 떠올리며 마음먹은 게 하나 있었으니, 어른이 되어도 책임질 무언가를 만들며 살지 말아야겠다는 거였다. 나는 지금까지도 태어난 걸 억울해하기도, 때로는 더 잘 키워졌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며 속상해한다. 나마저도 이 지경인데 내 책임 아래에 놓인 모든 것들이 나의 부족함으로 내 탓을 할까 봐 그게 너무 겁났다. 



그러다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여유가 생기고, 책임을 다할 정도로 사랑하는 존재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생각의 변화가 찾아왔다. 나를 낳은 게 축복이었든, 실수였든 자신들로 인해 태어났고, 자신의 책임 아래에 있으니 온전한 사랑을 줘야 했던 사람들이 그러지 못했을 때, 나는 왜 그들과는 다른, 사랑을 양껏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어떠한 존재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아무도 말을 해주지 않아서일까? 왜 나는 나를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할 인간으로 명명했을까.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사랑하는 존재들을 나는 겁도 없이 늘리기로 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반려`라는 수식어를 붙여 동식물이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생명 경시에는 어떠한 피드백도 남기지 않는다. 삶이 외롭다면 들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우리 곁에 온다 하여 바로 행복해지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의 자라남에 있어 엄청난 고난과 역경이 있다는 것을 세상은 지적하지 않는다. 식물을, 그리고 동물을 들이기 전에는 정말 내가 어떠한 존재를 반려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내 삶의 전부를 할애하면서 온전한 사랑을 줄 준비가 됐는지 끊임없이 되물으며 결정해야 한다. 이후 정말 내가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을 거란 결정이 세워지면 그제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나는 수없이 많은 고민 끝에 반려식물 두 친구를 내 삶의 경계에 들였다. 



식물들에 제때 물을 주기마저 어렵다. 너무 적게 줘서 흙 아래까지 물이 닿지 않으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너무 많이 줘서 뿌리가 썩어버리면 어쩌나 싶기도 하다. 내가 주는 사랑이 너무 적거나, 또는 너무 많으면 어쩌나 `보통`과 `적당`을 찾기까지 나는 오로지 나의 감과 식물의 상태를 의지해야 한다. 



하지만 식물을 키우게 되면 힘듦과 비례할 만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집에 들인 지 삼 개월쯤, 동면 시기인 것마냥 조용했던 식물들에게 봄이 왔다. 새로운 잎사귀들이 조용히, 천천히 자라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잘 못 해주는 것 같아 속상해하던 찰나였는데 새 잎사귀를 뿜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거였다니. 엄청난 삶이 나의 베란다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게 오로지 나의 의지로 결정된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며 지냈다. 그 책임감이 부담스러워 속상해하던 나에게 이렇게 큰 선물을 해줬다. 식물이 소리 없이 나를 위로했다.



온 지구를 누비며 식물의 역할에 충실하던 친구들이 인간과 함께 공생한다는 이유로 반려식물이 되었다. 그들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키워낸다는 것마저 인간이기에 가능한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며 살 것이다. 나와 함께 사는 이 아이들이 나로 인해 행복한지,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어떠한 방향으로 이들을 행복하게 할지, 그러다 보면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면서,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나도, 식물들도 알아주지 않을까. 




꼭 내 키보다 더 크게 자라줘.

내 사랑을 양분으로 해 무럭무럭 자라서

말 못 하는 너희들이 꿈에 나와

애정 한다고 말해주는 날을 손꼽아 기다릴게.




<웹진 취향껏>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click!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보호하는 게 우선이 되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