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데~
겨울의 끝자락 2월, 오랜만에 겨울 바다를 향하여 달린다. 살아 숨 쉬며 심장을 헐떡거리게 하는 동해 주문진항 활어시장이다. 생기가 넘치는 삶의 터전 속에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골목을 누빈다. 좁은 골목에 펄떡이는 생선과 생동감 넘치는 인파를 헤치며 아주 천천히. 복어가 끝물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갖가지 생선과 눈 맞춤을 이어간다. 숨죽은 건어물들도 많지만 겨울 별미 횟감을 찾는다.
퇴직 후 아내와 새로운 교회에 둥지를 튼 지 육칠 년이 지났지만, 친교가 부족한 나였다. 5년 전 교회에서 봉사 겸 여행으로 필리핀 선교회를 아내와 함께 참석했었다. 다녀온 뒤로 나에게 매우 호의적인 남선교회 시니어 모임 회장 안(安) 장로가 겨울이 가는 길목에서 콧바람이라도 마셔보자고 외유를 은근하게 다정히 제안했다. 비슷한 또래의 집사들 몇 분과 함께 고래 사냥터까지 가잔다.
아, 동해 바다! 그것도 물 맑고 깊은 수심까지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겨울 바다다. 파도 소리 들리는 환청에 젖으면서 떠나기로 정하고 집을 나선 시각은 28일 오전 여덟 시 반. 달리는 ‘설렘’에 도착은 ‘잠시’처럼 빨랐다.
생선을 직접 골고루 골라서 맛을 봐야 한다는 미식가의 결정에 따라 겨울 별미 횟감인 복어, 청어를 잡고 우럭에 광어에 오징어까지 회를 쳤다. 대자연에서 활보하는 신선이 따로 없었다. 잠시 머무르는 시간 없이 주문진항을 벗어난다. 자, 떠나자. 고래 잡으러! 1980년대 개봉한 ‘고래 사냥’을 촬영한 곳이라는 남해항으로. 김수철, 이미숙, 안성기가 출연했던 영화가 지나간다. 날씨가 봄날 같은 오늘 바람도 잔잔한 파도 소리에 머문다. 버섯 모양의 등대 앞에서 시니어들의 나비춤과 추억을 담는 사진 찍는 소리에 갈매기도 날아든다.
사람과의 만남이야말로 삶의 활력이자, 살아감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비타민이 아닌가? 모임의 즐거움과 기쁨을 더욱 값지게 느끼는 요즈음 코로나 변이 오미크론이 극성이다. 코로나 19가 발생하기 전, 한 달에 한 번꼴로 모임을 가졌던 지난 즐거운 추억의 기억이 나를 부른다.
교사 재직 시절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이 넘는 모임 ‘불역회’(不亦會)가 있다.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모임이다. 만나면 ‘팔로우 미’(Follow Me)를 외치며 학교생활은 물론 퇴근 후에 이어지는 만남의 자리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학교 일과를 끝나고 매일 만나다시피 하는 후배이자 동료인 이들과 만남을 첫째로 꼽는다. 실은 10여 년 함께 지내다 나만 유신에 남고 3명은 공립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내가 주관해서 만남의 기쁨을 이어 나간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끼리 만나 주님도 즐기고 여행도 하면서 인생을 노래했다. 점차 휴일이나 방학이면 부부동반으로 만나 아름답고 이름난 곳을 찾아 여행하기도 하고, 강원도 고성부터 전라도 해남 땅끝 마을까지도 함께 하기도 했다. 제주도 여행도, 동남아 여행도 했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넘겨 퇴직하고 자녀들은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손주들까지 둔 지금은 함께 늙어가는 처지지만 아직도 매월 말 일요일 저녁에 만난다. 내가 ‘몇 시, 어디에서 만나세.’ 하고 카톡을 날리면 만남이 이루어진다.
4년 전 4월 고등학교 반창회가 이뤄졌다. ‘응4회’(응답하라 3학년 4반). 졸업반 당시 반장이 주관하는 모임이다. 3개월(1, 4, 7, 10월 모임)에 한 번씩 만나는 모임이다. 이제 칠순을 넘긴 친구들도 있고 유명을 달리한 아까운 친구들이 벌써 대여섯이 넘는다. 물어물어 살아있는지 안부가 궁금하다. 단체 카톡방을 열어 나름대로 소통도 하고 노인인지 어르신인지 구분은 각자에게 물으면서 안부를 다진다.
나에게 강력한 활력과 비타민 구실을 하는 모임은 제자들과 만남이다. 교직을 시작한 첫 학교의 제자가 벌써 육순을 넘겨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나를 찾는다. 이름 하여 ‘무지개 모임’. 일곱 명으로 구성된 모임에 늘 초대를 받는다. 이 모임도 3개월에 한 번씩 만난다.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리더 격인 백열이 매번 참석 여부를 물어 온다. 일곱 명이 모이는 장소는 구리시 횟집 아니면 양주 남면 소갈비 집이다. 총대장이 되는 나는 모임에 여러 명이 움직이게 하지 않고 내가 찾아간다. 만나면 흡족한 대우와 대접만 받는 것이 미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제자들과 모임 또 하나. 내가 학교에서 처음으로 고3 담임을 맡았던 졸업생들. 지금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넘긴 사랑스러운 제자들과 일 년에 서너 번 만남의 자리가 있다. 모든 만남 중에서도 나의 젊음을 다시 찾는 즐거움이 넘치는 자리이다. 가끔 시도 때도 없이 개인적으로 연락해서 뵙겠다는 제자들.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저들과 만남을 거부하지 않는다. 나는 노인이 아니라 어르신으로 저들과의 대화도 이끌고 뒤풀이 계산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나이 들면서 가까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요즈음 하늘나라에서 영면하러 이승을 떠난다. 슬프고 안타깝다. 코로나 19 팬데믹에 언제 다시 즐겁고 기쁜 만남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루하루 무의미할 정도로 집콕하며 가는 세월을 잡아 보려 애써 본다. 아~ 옛날이여! 꽃피는 봄날에 만남이 그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