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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수 Mar 23. 2022

#프롤로그 - 서울에서 카이로까지

그 무엇도 나를 막을 순 없다.

더는 이렇게 못살겠다 싶어 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마침 웹페이지 한 구석에 스카이스캐너의 광고가 떴다. 이집트 카이로 왕복 항공권이 단돈 90만원! 최근에 단 한번도 이집트를 검색한 적이 없었던 나에게 이것은 구글신께서 빅데이터의 권능으로 내려준 신탁이이었다. 운명을 거스를수는 없는 법. 나는 이집트에 가기로 결정했다.


기왕 이집트 까지 가는 김에 옆나라 요르단까지 보고 오기로 했다. 때는 2021년 10월, 델타변이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었지만, 내년  1월쯤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에띠하드 항공의 아부다비 경유 카이로행 항공권을 결제했다. 하지만  11월 말, 오미크론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변이가 다시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전파력이 델타변이보다 몇배가 강하다고 했다. 모든게 다 음모론이라고 믿고 싶었다. 실은 오미크론변이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정부의 술책이라고.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항공권을 미룰 수 밖에 없었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이 시국 항공권들은 출도착 일정 변경 수수료가 없는 경우가 많았고, 나의 항공권도 마찬가지였다. 2월 8일 출발로 딱 한달을 미루며 이번에야말로 세계대전이라도 발발하지 않는 이상 떠나기로 결심했다. 연말 연초는 작업이 몰려서 몹시 바쁜 시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잠도 제대로 못자며 쉬는 날도 없이 작업을 했지만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나에게는 2022년 2월 8일까지는 살아있어야 할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공항


드디어 떠나는 그 날의 아침. 힘차게 일어나 먼저 짐을 쌌다. 전날 받은 코로나 PCR테스트 음성 결과지와 백신 접종 이력, 이집트 입국을 위한 E-Visa도 챙겼다. 혹시 몰라서 자가검사 키트도 몇개 넣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손발톱도 자르고 빨래도 돌려서 널어놓고 청소도 했다. 그러고 나니 시간은 오후 다섯시. 아직 집을 나서야할 시간까지 한시간이 남았지만 꽉 차버린 마음을 내버려둘수가 없었다. 그대로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길에서 마주치는 행인들이 나를 보며 웅성대는듯한 환청이 들렸다. ‘커다란 배낭을 보니 저 사람은 해외로 여행을 가나봐 부럽다 웅성웅성..’ 실제로는 나에게 아무 관심 없었겠지만.


공항으로 가는 전철은 꿈처럼 느리게 달렸다. 한참을 달려 영종대교를 지나 공항에 도착하니 저녁 7시 쯤이었다. 2년만에 온 인천공항은 역시나 텅텅 비어있었다. 사람이 너무 없다보니 로봇에 의해 인류 대부분이 절멸하고 극소수의 생존자들은 로봇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그런 사이버펑크 세계 같았다. 가끔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실은 홀로그램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출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에 하루치 비행 일정이 한 화면에 다 표시되었다. 조금 서글펐다. 공항은 사람이 바글바글해야 제맛인데. 너무 일찍 온 탓에 체크인 카운터 오픈까지 한시간이 남아 있었다. 4층 푸드코트의 식당에서 비싸고 양이 적은 비빔밥을 한그릇 사먹었다. 짐을 부치고 보딩패스를 받아 출국장에 들어갔다.  사람이 없으니 출국수속을 마치는데 5분도 안걸렸다. 내가 탈 항공 아부다비행 에띠하드항공편은 밤 11시 5분 출발이었고, 아직 출발까지 두 시간 반이 남아 있었다. 스타벅스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잔 사서 마시며 인천공항을 산책하듯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그러다보니 곧 탑승시간이 되었다. 기종은 B787-10, 이 큰 비행기에 승객은 몇명 없었고, 덕분에 눕코노미석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좌 : 하루 출발편이 이게 전부다. 우: 인천 출발 에띠하드 항공의 기내식은 치킨을 추천한다. 파스타는 영 별로다.


아부다비공항을 거쳐 카이로


기내식을 두 번이나 먹으며 약 10시간동안의 비행 후 현지시간 새벽 네 시쯤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아부다비 공항은 판데믹 이전의 공항처럼 사람으로 붐볐다. 텅빈 인천공항에 있다가 오니 여기가 마치 멸망 후 마지막으로 남은 여행자들의 은신처같았다. 시간이 좀 남아서 공항 구경을 하러 좀 돌아다녔다. 아부다비는 우리가 소위 ‘기름국’이라고 부르는 아랍에미레이트의 수도이다. 그래서 공항도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환상이 있었다. 고급 백화점같은 면세점과, 줄줄이 늘어선 초대형 항공기 A380 뭐 그런거. 그런데 아부다비공항은 크기만 더럽게 컸다. 면세점도 별게 없었다.  화장품, 향수, 기념품을 파는 작은 가게가 몇개 있을 뿐. 그런데 리큐어 샵은 네개나 있었다. 무슬림들은 술을 안먹지않나? 게이트에 늘어선 비행기도 죄다 B-787뿐이었다. 나의 A380은 공항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번을 돌아봐도 없었다. 알고봤더니 크고 아름다움은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의 허브인 두바이 공항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좌: 아부다비 공항의 사람들. 우: 뭐가 많아보이지만 이게 아부다비 공항 면세점의 제일 큰 매장이다.


어느 새 저 활주로 너머 해가 떠올랐다.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귓가에 카이로 어쩌고 하는 말이 스쳐지나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카이로행 비행기를 탑승하라는 소리인거 같았다. 분명 영어인거 같은데 중동식 액센트가 섞이니 도무지 알아들을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는걸 보니 내 짐작이 맞았다. 기종은 787-9다. 한참을 날아가다보니 창밖으로 아래위로 길죽한 홍해가 보였다. 마침 홍해처럼 길죽한 쌀로 만든 볶음밥이 기내식으로 나왔다. 기내식을 먹으니 홍해를 숟가락으로 떠서 먹는 기분이 들었다. 현지시간 오전 11시 30분, 집 떠난지 약 24시간만에 비행기는 카이로공항에 내렸다.  카이로 공항도 아부다비 못지않게 붐볐다. 한참을 기다려 입국심사를 받을 수 있었다. 입국장 직원이 내 여권을 한참 쳐다보더니 대뜸 ‘티스트 티스트’라고 했다. 문제가 생겼나? 최대한 공손하게 웃으며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채 서 있으니 비로소 그가 이야기 했다. ‘피씨알! 기브미 피씨알,’ 다행히 티스트를 알아듣지 못해 한국으로 반송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드디어 입국심사를 마칠 수 있었다.

홍해 아카바만이다. 왼쪽이 이집트, 위쪽이 이스라엘과 요르단, 오른쪽이 사우디아라비아다.



카이로 공항에서 시내까지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기 위해 환전을 하고, 보다폰의 유심을 구입했다. 공항게이트를 나서는 순간 사막의 모래먼지와 매연사이로 수많은 택시기사들이 등장했다. 다들 내 짐을 들어주겠다며 호객을 했다. 왠지 짐을 뺏기면 호갱님이 될거 같았다. 2000년 전 로마의 기록 중에 ‘피라미드를 보러갔다가 바가지를 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여행객을 대상으로 한 이집트인의 바가지는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그래서 요즘 보통의 여행자들은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기 위해 요금 사기를 칠 수 없는 우버를 많이 이용한다고 했다. 나에게 여행중 이동수단의 우선순위는 대중교통에 있기 때문에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과 과정도 중요한 여행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히 공항과 시내를 연결해 주는 버스노선같은게 있을텐데 어디에도 안내는 없었다. 어쩌면 안내는 있었는데 아랍어로 적혀있어서 내가 모르는걸수도 있다. 여기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 자가용을 가지고 출퇴근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 이럴때는 경험상 경찰에게 물어보는게 제일 좋다. 마침 근처에 경찰이 있었다. 외국 나가서 경찰을 상대할 때는 하나 중요한게 있다. 최대한 존칭을 사용해 물어보라는거. 어차피 영어는 말 끝에 대충 Sir만 붙이면 존댓말 비슷하게 되니까 쉽다. 물론 안붙여도 아무도 뭐라 안그러지만 경험상 Sir를 붙였을 때 경찰이 훨씬 친절하고 상냥했다.


“안녕하세요 Sir.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시내까지 가는 공항버스를 타고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Sir?”

“먼저 공항셔틀버스를 타고 공항 버스 정류장으로 가면 돼 공항 셔틀버스는 크고 파란색인데 저기 코너를 돌면 있을거야.”

“감사합니다 Sir.”


파라오의 지팡이 이집트 경찰 만세. 그가 알려준 대로 코너를 돌아가니 크고 파란 버스가 있었고, 공항셔틀은 정류장으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버스정류장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될거라 생각했던 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정류장  어디에 알파벳은 고사하고 우리가 아는 숫자 하나 적혀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집트는 우리가 아는 숫자[1,2,3,4] 아니라 요런 [١,٢,٣,٤] 모양의 숫자를 사용한다.아니 그런데 시내면 몰라도 공항 버스정류장이면 그래도 영어정도는 적어놓을만 하지 않나? 분명히 인터넷으로 찾아본 바로는 111 버스를 타면 다운타운으로 간다고 했다. 111은 아랍 숫자로 ١١١이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제일 인상좋아보이는 아저씨를 한명 붙잡고 111 버스는 어디에서 타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런 버스 없다고 했다. 구글맵을 보여주며 그럼 여기쯤 가려면 뭐타야 하나고 물었다.  아저씨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더니 동료로 보이는 다른 아저씨와 열띤 목소리로 한참을 토론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싸우는줄 알았다. 그러더니 381번을 타면 된다고 했다. 어떤 서울 깍쟁이들은 경상도 출신인 내가 뭔 말만 했다하면 화내는거로 오해하곤 했는데 이 분들의 모습을 보며 깍쟁이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나는 유일하게 아는 아랍어 슈크란(감사합니다) 외치고 열심히 381 버스를 찾았다.  381 아랍 숫자로 적으면 [٣٨١]이다. 처음 아랍어를 마주한  눈에는 숫자나 글자나  똑같아보였다. 그래도 내가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편이다. 한참만에  [٣٨١] 적힌 버스를 찾아 탔고, 버스는 차선을 무시하고 마구 달려 카이로의 다운타운에 나를 내려 주었다. 드디어 성공적으로 카이로에 도착했다.

좌: ٣٨١(381)번 버스. 중: 카이로 시내의 모스크. 우: 카이로 시내에 내려서 신나게 찍은 셀카-이때만 해도 마스크 열심히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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