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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수 Jun 05. 2022

#12 - 볼게 많아도 너무 많은 룩소르

하트셉수트 장제전, 왕비의 계곡, 샘하우스, 미라 박물관

왕가의 계곡에서는 돈을 쓸 땐 제대로 써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집트 파라오들도 무덤 건설에 화끈하게 투자했으니 4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목받고 있는 거 아니겠나. 이게 다 세티 1세와 네페르타리의 무덤을 못 본 게 아직까지 아쉬워서 하는 말이다. 아무튼 왕가의 계곡을 다 보고 하트셉수트 장제전으로 이동했다. 우리의 가이드 씨는 이동하는 내내 기념품샵에 들릴 것을 권했다. 이젠 나도 이집트에 적응이 되었나 보다. 그가 말하는 게 왼쪽 귀로 들어와서 오른쪽 귀로 흘러나갔다.


하트셉수트는 장제전은 정말로 크고 멋있었다. 장제전은 무덤이랑은 별개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이라고 보면 된다. 이집트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만큼 온갖 왕의 장제전이 남아있다. 그중에 하트셉수트의 것이 가장 크고 유명하다. 경내에 입장하면 가로가 80미터쯤 되어 보이는 건물이 바위산을 배경으로 눈앞에 좍 펼쳐진다. 저절로 파라오의 위엄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옆에 함께 이집트를 통치했던 투트모세 3세의 장제전의 흔적도 있는데, 대충 어림잡아도 하트셉수트의 반 정도밖에 안된다. 하트셉수트는 여성 파라오다. 처음에는 투트모세 3세가 어려서 섭정 형식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나 투트모세 3세가 다 크고도 공동으로 나라를 통치했다고 한다. 그만큼 능력 있는 왕이었다. 그녀의 능력을 저 거대한 장제전이 증명해 주고 있었다.

하트셉수트 장제전

이어서 가이드 씨에게 왕비의 계곡으로 이동하기를 요청했다. 그는 진짜 거기 갈거냐며 네페르타리 무덤 말고는 볼 게 없다고 했다. 날도 더운데 거기 갔다가 후회할 거라고. 그런 말을 들으니 괜히 가서 볼 게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결국 왕비의 계곡으로 이동했다. 우리나라는 왕이랑 왕비가 같은 묘역에 묻히는 게 일반적인데 이 나라는 따로 묻히는 게 좀 신기했다. 가이드 씨에게 이러한 사실이 왜 그런지 물어봤으나 그도 몰랐다. 왕비의 계곡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왕가의 계곡과는 다르게 아주 한산했다. 입구에 있는 몇몇 기념품 가게에서 상인들이 힘없는 목소리로 호객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입장료만 7만 원인 네페르타리 무덤 앞에만 몇 명의 관광객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 외에 몇 개의 무덤에 문이 열려 있었고, 들어가 보았지만, 규모도 작고 무엇보다 벽화가 남아있는 게 별로 없어서 볼 게 없었다. 옆에서 가이드 씨가 ‘그러게 내가 뭐랬냐’라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가이드 씨에게 이 무덤은 누구의 것이냐고 물어도 사실 잘 모르는 눈치였다. 진짜 잘 안 오긴 하나보다. 십오 분 만에 관광을 마치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오다 보니 길 옆의 파리 날리는 상점들에 다시 눈이 갔다. 왠지 저 사람들 하루 종일 공치고 있을 거 같았다. 뭐라도 팔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침 목이 말랐다. 콜라를 두 캔 사서 가이드 씨와 나누어 마셨다.

초라한 왕비의 계곡 앞 상점

시간이 벌써 오후 세시가 되었다. 확실히 이집트의 관광지들은 규모가 있다 보니 열심히 안 봐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 배도 고프고, 이제 볼 건 다 봤다 싶었다.


나 : 나 이제 보고 싶은 건 다 봤어. 룩소르 시내로 돌아갈래.

가이드 : 진짜? 우린 겨우 왕가의 계곡과 하트셉수트 장제전만 봤어. 여기에 볼게 얼마나 많은데!

나 : 하지만 배도 고프고, 덥기도 하고.. 너도 일 빨리 끝나면 좋은 거잖아.

가이드 : 이봐. 몇 군데만 더 보고 가자고. 룩소르 서안에 왔으면 꼭 봐야 할 곳이 몇 군데 더 있어.

나 : 으..응... 그래...


투어를 끝내자고 하면 좋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의 반응이었다. 나의 가이드 씨는 이집트에서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제안을 거절하면 엄청난 실망을 안겨줌과 동시에 나는 룩소르가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온 멍청한 관광객으로 기억될 거 같은 압박이 느껴졌다. 그래서 어딜 가면 좋을지 추천해 달라고 했다. ‘데어 엘 메디나’라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배가 너무 고파서 가는 길에 샤와르마를 두 개 사서 가이드 씨와 나눠먹었다. ‘데어 엘 메디나’는 작은 규모의 사원이었다. 무엇보다 벽화가 왕가의 계곡에 있는 것만큼 잘 남아 있었다. 그 외에도 두세 군데 더 끌려다녔다.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이미 땡볕에 두개골이 반쯤 익은 상태로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먹을것을 갈구하던 강아지와 데어 엘 메디나

오후 다섯 시쯤, 동안 쪽의 룩소르 시내로 돌아오기 위한 보트를 타며 가이드 씨와 작별인사를 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 나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의 표정에는 오늘도 관광객 한 명을 완벽하게 가이드해내었다는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나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배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허기가 지니 고기를 구워 먹고 싶었다. 룩소르에 삼겹살집이 있을 리가 없다. 스테이크라도 먹어야겠다.  룩소르 사원이 창밖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주문을 했다. 스테이크는 푸짐했고, 소스가 맛있었으며, 턱근육 단련에도 도움이 되는 육질이었다.

갑자기 식욕이 폭발해서 혼자서 이걸 다 먹어치웠다.

식사를 하며 룩소르에서 본 것들을 죽 되짚어 봤다. 카르낙 신전, 룩소르 박물관, 룩소르 신전, 왕가/왕비의 계곡, 하트셉수트 장제전, 데어 엘 메디나, 그 외에 몇 군데. 꽤 많았다. 아까 볼 건 다 봤다 싶었던 게 괜히 든 생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이드 씨는 ‘고작 이거 보고 끝낸다고?’라는 반응이었다. 하긴 구글 지도만 봐도 유적지가 아주 그냥 바글바글 하다. 우리 동네 편의점만큼 많아 보인다. 이러니 아까 가이드 씨에게 ‘그만 집에 갈래’ 그랬을 때 보인 반응이 이해가 갔다. 보통 개인 가이드를 고용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은 최소 이집트 유적 덕후였을 것이다. 오늘도 또 한 명의 덕후를 성불시키겠다는 마음으로 나왔을 텐데. 고작 왕가의 계곡과 하트셉수트 장제전만 보고 끝내기에는 나라도 아쉬웠을 듯. 그러고 보니 룩소르에 고작 2박 3일 있었을 뿐인데 여행기가 무려 다섯 편 분량이네.


밥을 먹고 조카를 위해 상형문자로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를 맞추러 갔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샘하우스라는 곳이다. 친절하게 삐뚤빼뚤한 한글로 ‘샘하우스’라고 적혀있어서 찾기가 쉬웠다. 처음에는 반지를 맞추려 했다. 하지만 내가 조카의 손가락 사이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목걸이로 결정했다. 목걸이는 우리 돈으로 3만 원 정도. 조카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나중에 조카가 그 목걸이를 보며 이집트 여행을 꿈꾸길 바랐다. 샘하우스에서 나와 룩소르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미라 박물관으로 갔다. 이제까지는 사람 미라만 봤는데 여기는 개, 악어, 물고기 등등 온갖 미라가 다 있었다. 문득 이집트 사람들은 현생에 참 미련이 많았구나 싶었다. 얼마나 현생에 미련이 많았으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것을 대비해 육신을 미라를 만들어 놓을까. 하긴 고대 세계에서 가장 풍족한 곳이 바로 이집트였다니 미련을 가질 만도 하지.


나오니 어느새 해가 나일강 너머로 지고 있었다. 다음날엔 수에즈 운하를 보기 위해 수에즈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나일강일테다. 언제 다시 여기에 올 수 있을까. 다시 오면 저 흐르는 강물처럼 풍경은 또 바뀌어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자니 보트 투어를 하라는 호객꾼들이 또 달려든다. 에휴. 이 사람들은 잠시도 틈을 안 준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태극기가 걸려있다. 참고로 여기는 이집트에서 흔치 않은 정찰제다.

숙소로 돌아가니 숙소 사장님이 오늘의 투어는 어땠냐고 물어본다. 가이드가 일을 너무 열심히 하더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은 자기가 소개해 주는 사람은 모두 최고라며 나더러 럭키가이라고 했다. 그래 400파운드(3만 원)에 이 정도 퀄리티면 성공이지. 씻고 내일 수에즈로 떠날 버스 편을 고버스(Go-Bus) 앱으로 예약했다. 바로 가는 버스는 없어서 일단 홍해 쪽에 있는 도시인 후르가다를 거쳐 가기로 했다. 이집트는 나라가 큰 만큼 정말 많은 버스회사들이 있다. 그중에 관광객들이 제일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회사가 고버스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후르가다에서 수에즈 가는 노선이 고 버스에는 없었다. 카이로를 거쳐서 가기는 싫었다. 왔던 길을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리셉션으로 내려가 사장님한테 물으니 후르가다에 가면 수에즈행 버스가 있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믿고 일단 후르가다로 가는 아침 버스를 예약했다.

해 지는 나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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