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알렉산드리아
알산에서의 둘째 날이 밝았다. 콧물이 좀 나는 거 외에는 증상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확진자로서 알아서 자가격리를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였으나 이곳에서는 아프지만 않으면 그 누구도 신경을 안 쓴다는 점을 어제 확인했기에 그냥 마스크 잘 쓰고 다니기로 했다.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르고 이집트에 오면 이집트 법을 따라야지.
알산은 도시가 가로로 길게 생겼고, 가장 중심지는 둥그렇게 생긴 해변이다. 여긴 이스턴 하버라고 불린다. 거기가 그렇게 예쁘단다. 마침 숙소에서 100미터 정도 거리라 살살 걸어 바닷가 쪽으로 갔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을 한번 건너니 바다가 나왔다. 해변을 따라서는 넓은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해변에는 산책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붐볐다. 저 바다가 지중해라니. 대항해시대 게임하면서 그렇게 돌아다니던 바다를 드디어 실물로 마주했다. 바닷물은 파랗고 투명했으며, 위로는 따뜻한 햇살이 내려쬐고 있었다. 그리고 맑고 푸르른 바닷물에는 과자봉지 같은 쓰레기가 둥둥 떠다녔다. 내 감동 물어내.
해변길을 따라 걷는데 건너편에 스타벅스가 보였다. 내가 스타벅스는 못 참지. 다시 8차선쯤 돼 보이는 도로를 무단 횡단해서 스타벅스에 갔다. 스벅에서는 역시 아메리카노다. 한국인이라면 역시 아메리카노지. 카운터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몇 번이고 노 슈거를 외쳤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의 블랙커피는 설탕이 들어가는 게 디폴트인 거 같다. 인도에서도 그랬고 동남아 쪽에서도 그랬고 카이로에서도 점원이 자꾸 설탕을 넣으려 해서 말려야 했다. 스벅 직원이 이름을 물었다. 아 맞아 스타벅스는 음료가 나오면 이름을 불러주지. 나는 ‘용수’라고 대답했다. 점원은 ‘유시프?’ 라고 되물었다. 아니 어째서 용수가 유시프로 들리는 거지? 다시 용수라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점원은 그래 ‘유시프’맞잖아 라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째서 딱 봐도 아시아인으로 생긴 내가 유시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한국에서 금발 벽안의 외국인이 ‘제 이름은 홍길동입니다’라고 하면 ‘응? 뭐라고요?’ 하고 다시 한번 쳐다볼 거 같은데 이쪽 사람들은 편견이 없는 건가 나를 유시프라고 계속 불렀다. 용수라고 다시 알려줘도 못 알아먹을 거 같아서 그냥 오케이 유시프라고 했다. 그런데 용수라는 이름이 외국인들에게는 발음하기 그렇게 힘든가 보다. 예전에 유럽 갔을 때는 이름이 뭐냐길래 용수라고 했더니 그들은 ‘존슨?’이라고 되물었다. 이게 한두 번이 아니라 그냥 내 외국인 대상 이름은 ‘존슨’으로 정해버렸다. 이번 해프닝을 계기로 아랍어 이름은 ‘유시프’로 하기로 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유시프는 요셉을 아랍어식으로 읽은 거라고 한다.
스타벅스 2층의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한눈에 이스트 하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알렉산드리아에 가면 이스트 하버 거리의 스타벅스에 꼭 가보길 추천한다. 정말 여기 풍경이 끝내준다. 초승달처럼 생긴 이스트 하버의 오른편 1/3 지점쯤에 있는데, 여기서 저 멀리 카이트 베이까지 한눈에 다 보인다. 역시 스타벅스. 알토란 같은 자리엔 죄다 스타벅스가 있다. 천천히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풍경을 구경하고 싶었는데 순식간에 다 마셔 버렸다. 사실 아메리카노가 몹시 고팠다. 카이로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제대로 된 아메리카노를 파는 곳이 없었다. 아 물론 블랙커피를 팔기는 하지만 에스프레소로 만든 그 맛이 아니다. 분명 인스턴트커피로 만든 것임이 분명했다.
스타벅스를 나와 저 끝에 있는 카이트 베이 요새를 향해 해변길을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알산엔 삐끼가 별로 없다. 택시를 타라는 둥 길거리 음식을 먹고 가라는 둥 카이로에서는 관광객이 있을만한 곳이라면 어디든 삐끼가 달려드는 게 일상이었다. 다양한 삐끼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퇴치하는 게 나름 재미있었는데 아무도 달려들질 않으니 좀 심심 섭섭하다. 하지만 인종차별은 더 잦다. 특히 사춘기에서 20대 초반쯤 돼 보이는 남자애들이 뭉쳐서 다니며 인종차별을 제일 자주 한다. 뭐 지나가기만 하면 차이나? 차이나? 칭챙? 요 지랄한다. 이런 애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그냥 무시하는 거다. 그냥 쳐다도 안 보고 지나가면 본인들도 재미가 없으니 그냥 다른 타깃을 찾기 마련이다. 그런데 괜히 오기가 생겨서 좀 만만해 보이는 애를 불렀다.
나 : 야 너 일루 와봐
이집트 청소년 : 니하오~니하오~
나 : 시끄럽고 일루 와보라니까?
이집트 청소년 : (점점 멀어진다) 니하오~ 니하오~ 칭챙칭챙
그렇다. 얘네 막상 이리 와보라 하면 그냥 도망간다. 새끼들아 학교 가서 인수분해나 풀어라.
알산에서도 무덤 투어를 이어나갔다. 하도 무덤만 보고 다니니 무덤덤덤 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질리지 말라고 이집트에는 참 다양한 무덤이 준비되어 있다. 후손들을 위한 이집트 조상님들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먼저 트램을 타고 로마시대 지하묘지 카타콤엘 갔다. 알산엔 트램이 잘 되어 있어서 카이로보다 다니기가 편하다. 최소한 카타콤이 뭐하던 곳인지는 알고 가야 할 테니 앞에 앉아서 위키백과를 뒤지고 있는데 사춘기쯤 돼 보이는 고양이 한 마리가 와서 계속 비빈다. 쓰다듬어 줬더니 내 무릎 위에 올라타고 난리도 아니다. 계속 졸졸 따라다니는데 츄르라도 하나 줬으면 흑석동까지 따라올 뻔했다. 역시 인간보단 고양이다. 같은 사춘긴데 어찌 저렇게 다를까.
알산의 지하묘지 카타콤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로마의 카타콤베는 기독교인들이 숨어서 살던 지하도시에 더 가까웠는데, 여기는 말 그대로 지하묘지다. 고양이 다음으로 카타콤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헬레니즘과 이집트 양식이 마구 뒤섞여 있다는 거다. 우리나라 절에 산신각이랑 칠성각이 있는 거랑 같은 이치인가 보다. 역시 신은 다다익선이다.
저녁 즈음에는 우버를 불러서 알산에서 제일 큰 쇼핑몰에 갔다. 쇼핑몰 이름은 'City Centre Alexandria'다. 나는 시장이랑 쇼핑몰을 가는걸 참 좋아한다. 시장은 지겹도록 봤으니까 쇼핑몰엘 한번 가 보고 싶었다. 지도상으론 가까워서 걸어갈만해 보였는데 꽤나 멀리 있었다. 사실 쇼핑몰은 어디나 비슷하다. H&M 같은 SPA 브랜드가 있고, 올리브영 같은 종합 화장품 매장이 있고, 대형 마트가 있다. 하지만 나라마다 사람들의 취향이 다 다르니 디테일을 보는 재미가 있다. 알산의 H&M에는 유난히 컬러풀해 보이는 옷이 많았다. 참 신기한 게 비교적 덜 개방적인 나라로 갈수록 파는 옷의 색깔은 컬러풀해진다. 이쪽저쪽 돌아보다 보니 대형 까르푸 매장이 있었다. 역시 대형마트에는 별거를 다 판다. 이런데 가면 괜히 한국 물건은 뭘 팔고 있나 찾아보게 된다. 외국에서 한국산 제품을 만나면 괜히 반갑더라. 알산 까르푸에서는 라면 코너에서 팔고 있는 팔도 왕뚜껑을 발견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라면이다. 평생 하나의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라면을 꼽는다. 이성을 잃고 하나 집어 들었는데 가격표를 보고는 냉정함을 되찾았다. 한국 돈으로 무려 4300원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먹어야지. 내가 이집트에 온 지 6일째 아직 바가지 한번 안 썼고 삐끼들한테 당하지도 않았건만 결국 이렇게 한국 라면에 뒤집어쓴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어딜 가도 한국 놈들을 제일 조심해야 한다.
숙소에 돌아와서 라면을 먹었다. 이맛이지. 난 한국인임을 자각했다. 또 어디서 한국 라면을 만나게 될지 모르는데 하나 더 사 올걸 그랬나. 라면을 먹으며 다음 일정에 대해 고민했다. 이 도시는 날씨도 좋고 평온한 분위기라 한 달 살기 여행으로 오기 딱이었다. 그런데 볼게 많은 편은 아니다. 여기서 장기 여행자의 무계획한 나날을 즐길 것인가, 바리바리 다음 목적지로 움직일 것인가. 결국 내일 야간열차를 타고 룩소르로 가기로 했다. 난 어디 한 군데에 가만있는걸 더 못 참겠더라. 야간열차는 직통이 없어서 먼저 카이로로 돌아가야 한다. 기차 출발 시간은 19시 45분. 분명 다섯 시간은 걸릴 테니 늦어도 내일 한시에는 카이로행 열차에 타야 한다. 룩소르는 카이로와 함께 이집트 최대의 관광도시다. 그런즉슨 권모술수와 사기가 난무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또 어떤 삐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것 참 떨리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