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해산물은 맛있다.
알렉산드리아를 떠나는 날이다. 아니나다를까 새벽 여섯시에 눈이 떠졌다. 이집트에 온 후로 시차때문에 저절로 새벽형 인간이 되어버렸다. 눈을 뜨자마자 코로나에 감염된 내 몸뚱아리를 꼼꼼히 점검했다. 증상으로 미루어 짐작되는 콧물도 이제는 멈췄고, 간간히 나오던 기침도 사라졌다. 알렉산드리아에 온 첫날 코로나 감염을 확인했을 때만 해도 증상이 심하게 나올까봐 걱정이 되었건만 다행히 거의 무증상으로 지나가고 있는거 같다. 정말 백신이 효과가 있긴 한가보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카이로에 있을때만 해도 거의 마스크를 안벗었고, 누가 옆에서 기침이라도 하면 몹시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그런건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만세!
체크아웃을 하고, 배낭을 리셉션에 맡기고는 먼저 알산역으로 갔다. 룩소르로 가는 야간침대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먼저 카이로로 돌아가야 했기에 카이로로 가는 기차표를 사야했다. 마침 알산역 바로 근처에 로마시대 원형극장 유적이 있어서 기차표 사고 오전 관광을 하기에 동선이 딱 좋았다. 카이로로 돌아가는 열차표는 오후 한 시 반꺼로 샀다. 말로는 세시간 걸린대지만 분명 최소 다섯시간은 걸릴게 분명하다. 괜히 촉박하게 출발해서 마음졸이는거보다는 가서 기다리는게 정신건강에 이로운건 확실하다.
로마시대 원형극장으로 이동했다. 원형극장은 정말로 알산 역에서 바다쪽으로 한 블록만 가면 있다. 원형극장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로마시대 별거 없네’
그렇다. 별 감흥이 없었다. 피라미드를 맨 처음 보고 나니 이게 문제다. 내 마음속에는 이미 이집트 문명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문명이었다. 이집트에 남겨진 고대 이집트 문명 이후의 유적들을 보면서 자꾸 파라오 시대의 유적들과 나도 모르게 비교하는거다. 또 모르지. 이탈리아 로마라도 가면 다시 로마뽕에 취하게 될지. 그래도 원형극장과 주변의 로마시대 유적까지 한바퀴 빙 돌고나니 삼십분 넘게 걸렸다. 원형극장의 객석에 앉아서 다음에 어디갈지를 구글맵으로 검색했다. 걸어서 알산박물관엘 갔다가 알산 대도서관을 보고 역으로 돌아오면 시간이 딱 좋아보였다.
알산박물관은 아담했다. 박물관 정문에는 프톨레마이오스시대의 헬레니즘풍 대리석 입상이 서 있었다. 카이로와 알산은 정체성부터가 다름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파라오가 통치한 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비록 파라오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그리스계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이후에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기 된 이후에는 알산사람들이 스스로를 ‘이집트 옆의 알렉산드리아’라고 칭했다고 한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입구의 입상 뿐만이 아니라 안에 전시된 유물들도 확실히 카이로의 것들과는 달랐다. 정형화된, 딱딱해보이는 자세가 대부분인 카이로와는 다르게 이곳에 서 있는 인물상들은 자세가 몹시 자유분방했고, 심지어 귀여워보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박물관을 돌아다니다가 어디서 많이 보던 얼굴을 마주쳤다. 얼굴이 길쭉하고 입술이 두툼한 저 왕. 어디서 많이 봤는데. 바로 아케나톤왕이다. 아케나톤은 정말 인상이 강하다. 한번 보면 절대 잊어버릴수가 없는 그런 얼굴이다. 카이로박물관에서 처음 아케나톤의 두상을 봤을 때 하도 특이하게 생겨서 이름을 외우게 되었다. 아케나톤은 생긴거처럼 생전에 특이한 행보를 보였던 왕이기도 하다. 다들 아시다시피 고대 이집트의 종교는 다신교다. 라, 호루스, 오시리스, 이시스, 네프티스 등등 내가 이름을 아는 신만 해도 열명은 된다. 그런데 아케나톤은 종교개혁을 통해 저런 수많은 신들을 다 버리고 아톤이라는 유일신을 내세운다. 아톤신의 모습 역시 사람처럼, 혹은 사람 비슷하게 생겼던 기존의 이집트 신들이랑은 달랐다. 태양같은 노란 동그라미가 바로 아톤신을 상징하는 모양이다. 당연히 기득권층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심지어 죽은 후에 ‘쟤는 우리 왕 아님’ 이라는 기록말살형에 가까운 처분을 받고, 이집트의 종교는 원래대로 돌아온다. 종교학자들은 최초의 유일신 신앙이었던 아톤신앙이 유일신 신앙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의 아브라함계통 종교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단다. 어째튼 그 많은 신들을 다 없애버리다니 그대는 진정한 갓슬레이어. 아 그리고 이사람 아들이 이집트 파라오 중에 제일 유명한 투탕카멘이다.
알산박물관은 작고 아담해서 한시간도 안걸려서 다 돌아봤다. 그래도 아케나톤 선생을 다시 만나 반가웠다. 바로 이어서 알산대도서관으로 갔다. 원래 알산대도서관은 기원전 3세기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시대에 지어진 당대에 가장 큰 도서관이었다. 정말 당시에 나온 웬만한 책은 다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세기에 최소 70만권, 최대 130만권까지 있었다. 우리나라 국회도서관이 680만권 정도 있다고 하는데 2300년전에 100만권 정도면 정말 세계의 모든 지식이 그곳에 다 모여 있다는 말이 어울린다. 게임 문명에서도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을 지으면 해당 문명의 과학기술력이 폭발하는데 정말 적절한 설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당시의 도서관도, 책도 없다. 로마에 점령당한 후에 한번 부서지고, 이집트가 이슬람화 되었을 때 박살이 났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국제적인 모금을 통해 그 터에 새로 큰 도서관건물을 세웠는데, 건물은 멋지게 생겼지만 책 살 돈이 모자라서 아직 장서수가 50만권정도밖에 안된단다. 그래도 사진으로 봤을 때 건물이 꽤나 멋있고, 외벽에 한글을 포함하여 세계 각국의 문자가 적혀있어서 한번 보고싶긴 했다.
대도서관의 벽면에는 한글로 ‘월’이라는 글자와 ‘세’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렇다 월세다. 월세를 잘 내야하고 결국엔 월세받으며 사는 삶을 이루어내자는, 이집트인들의 삶에대한 통찰력이 엿보였다. 벽에는 한자도 적혀 있었다. 근데 뭔가 한자가 좀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보던 글자이긴 한데 내가 아는 한자랑 좀 달랐다. 어쩐지 좀 쓰다만 글자같았다. 순간 음식 ‘육회’를 ‘Six Time’으로 번역한 예시가 떠올랐다. 설마 국제모금까지 해서 만든 건물에 오타를 새겨넣은건가 싶어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얼른 옥편앱을 켜서 검색해봤다. 아. 간체자였다. 나도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었다. 기념적인 건축물에 오타가 새겨져 있다는건 웬만한 곳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긴 하다. 그런데 이 나라에 와서 당한것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수도 있었으나 다행히 간체자를 못 알아본 나의 멍청함으로부터 귀결된 긴장이었다. 아니 그런데 밑에 사진처럼 한글 ‘월’이랑 ‘세’ 자도 어딘가 좀 삐딱하고 아귀가 맞지 않게 새겨져 있긴 하니까…
여기까지 봤는데도 열한시가 조금 넘었다. 알산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좀 괜찮은데서 하고 싶었다. 알산은 해산물이 유명하단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이스트하버를 따라 카이트베이 가는 길목에 ‘피쉬마켓’이라는 해산물레스토랑이 괜찮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해변을 따라 한번 걷고 싶었지만 식사를 여유있게 하고 싶어서 우버를 타고 오분만에 이동했다. 식당은 깔끔했고, 서양인 단체 관광객들이 꽤 많았다. 볶음밥 하나와, 사이드메뉴로 게살수프, 메인메뉴로 생선구이를 시켰다. 그런데 웨이터가 저기 가서 생선을 고르라는거다. 이게 뭔 소리지 싶었는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봤다. 테이블이 펼쳐져 있고 생선들이 노량진 수산시장 좌판대처럼 얼음위에 죽 놓여 있었다. 거기 가서 직접 생선을 한마리 골라잡으란 뜻이었다. 참 신기한 시스템이군. 이름은 알 수 없지만 나를 유난히도 지긋히 쳐다보던 녀석을 선택했다. 나의 피와 살이 되어줄 녀석. 생선구이는 생선구이맛이었고, 볶음밥은 볶음밥 맛이었으며 게살수프는 게살수프 맛이었다. 하지만 나는 감동했다. 이집트 와서 처음으로 잘 조리된 상태로 차려준 음식을 먹은 것이다. 6일내내 먹던 사와르마, 코샤리, 맥도날드는 사실 식사라는 느낌보다는 돌아다닐 에너지를 보충한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잘 먹는게 정말로 중요한 복지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래 룩소르에서부터는 꼭 하루에 한번씩 먹부림을 해야지. 밥값은 모두 이만원이 조금 안되게 나왔다. 하지만 몹시 만족한 나는 웨이터에게 팁도 10파운드 남겼다.
식사를 마치니 열두시 반, 정말 오늘따라 희한하게 시간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우버를 불러 숙소로 가서 배낭을 찾고 슬슬 걸어서 역에 도착하니 한시가 조금 넘었다. 이번에는 매점에서 Lay’s 감자칩을 두 봉지 사서 탔다. 사실 지난 이동 때 남들 감자칩 먹는거 너무 부러워 보였다. 카이로에는 여섯시간 반만에 도착했다. 아니 어째 갈때보다 더 걸리냐. 이럴거면 왜 세 시간 걸린다고 공지하는거지? 그냥 ‘오늘 안에는 갑니다’ 라고 적어놓지.
어제 인터넷으로 예매한 야간침대열차의 티켓을 받기 위해 역사 외부로 통하는 야간열차 사무실을 찾았다. 이집트의 일반적인 열차편과 카이로 - 룩소르를 왕복하는 야간침대열차는 Ernst라는 회사로, 운영주체가 다른거 같다. 홈페이지에서도 예약 할 때 메인 화면에 있는 열차 예약 탭이 아니라 ‘Offers’탭으로 들어가서 따로 예약해야 했다. 혹시라도 여기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신 분은 내 인스타로 DM보내주시면 알려드림. 사무실에서는 그냥 예약 화면만 보여줘도 된다고 하며 9번 승강장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침대차를 타는 일을 몹시 좋아한다. 흔들흔들거리는 열차의 침대에 편히 누워 있으면 마치 요람에 누워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를 가든 웬만하면 침대차는 꼭 타보는 편이다. 이집트 야간열차의 침대차는 어떨까. 기대를 가득 안고 승강장 벤치에 앉아 기차를 기다렸다. 내 옆에 마스크를 야무지게 낀 중국어를 사용하는 청년 두 명이 앉았다. 쒜끼들 난 이미 걸렸지롱 그래서 마스크 안쓰지롱. 시간은 흘러 출발까지 10분도 남지 않았다. 기차는 아직 오지 않았다. 5분이 남았다. 그래도 오지 않았다. 순간 이거 뭔가 되게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