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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수 May 01. 2022

#07 - 야간열차를 타고 룩소르로

긴박했던 5분

분명히 사무실에서는 9번 플랫폼에서 19시 45분 정시에 출발할거라고 했다. 시간은 어느새 19시 40분, 출발 5분 전이다. 카이로가 출발역이니까 경험상 최소 30분 전에는 기차가 와 있어야 정상이었다. 분명히 이건 열차가 이집션 타임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배낭을 멘 서양인 무리가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아마 저들도 나와 같은 열차를 타는 이들일 것이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나 : 혹시 너네 야간열차 타려고 기다리는거야?

무리 : 응 그런데 기차가 오질 않네 ‘이집션 타임’인가? 좀 더 기다리면 오겠지?


정확히 ‘이집션 타임’이라고 그들은 말 했다. 보아하니 그들은 그냥 대책없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내 대뇌피질을 휘감고 있는 이 찌릿찌릿하고 싸한 느낌은 나에게 계속 이러다가는 ㅈ된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역무원을 찾아서 물어봤다.


나 : 여기 9번 플랫폼에서 19시 45분 출발하는 야간열차가 있는데 왜 아직 안오는지 알고 있어?

역무원 : (시계를 흘낏 보며) 열차가 좀 늦어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봐.


그렇다 역무원도 몰랐다. 이집트 사람들은 대부분 모른다는 대답을 잘 하지 않았다. 비록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할지언정 뭐라도 꼭 대답해 주는 것이 그들만의 친절인듯 싶었다. 그래도 역무원은 그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나도 누가 ‘열차가 안오는데 왜 그런거야?’ 라고 물으면 ‘열차가 좀 늦어지나보네’ 정도의 대답은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역무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시간은 그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플랫폼을 빗자루로 묵묵히 쓸고 있던 청소 직원이 대뜸 말을 걸었다.


청소직원: 헤이헤이 너 여기 아니야!!

나 : 응?

청소직원: 아니야 플랫폼 9 플랫폼 11!!

나 : ??

청소직원: (답답해하며) 팔로미


청소직원은 플랫폼의 인파를 쓸어버릴듯한 기세로 빗자루를 휘두르며 나아갔다.  나는 엉겁결에 그를 따라갔다. 그런 나의 모습을 아까의 그 서양인 무리가 보고는 나를 따라왔다. 지난 편에 이야기한, 마스크를 야무지게 쓰고 있던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친구들도 우리를 보더니 급하게 막 따라왔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쥐들처럼 우리는 지하통로를 지나 11번 플랫폼으로 끌려갔다. 거기에는 열차가 서 있었고, 아까의 그 피리부는 사나이 아니 빗자루를 든 사나이는 ‘디스 트레인!’이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반대편으로 가버렸다. 이 곳에서는 의외의 인물에 의해 상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이 해결되곤 한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뒤에 슈크란-아랍어로 고맙습니다-을 또다시 목놓아 외쳤다.


빗자루 쓰는 사나이가 사라진 후 잠시 우왕좌왕 하고 있는 서양인무리와 나. 저 붉은 색 원 안이 표검사아저씨였다.

빗자루 부는 (멋쟁이)사나이가 가리켰던 열차 출입문 앞에는 양복을 빼입은 아저씨가 서서 표검사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서 표를 보여주며 이게 룩소르 가는 침대열차냐고 물어봤다. 맞다고 했다. 나는 얼른 탑승했고, 아까 그 서양인 친구들과 중국인친구들도 나를 따라 기차에 탑승했다. 어째서 갑자기 플랫폼이 바뀐건지는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일류여행자니까. 어쩌면 역내 방송으로 공지를 했을수도 있다. 물론 아랍어로 했을거다. 나중에 보니 열차 승객 중 반절은 외국인이던데 아랍어를 모르는 우리 잘못인거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게 속 편하다.나는 일류여행자니까.


이집트의 침대열차의 내부는 한쪽 창으로는 복도가 있고 반대편으로 방이 주욱 배치되어 있는 구조였다. 각 방에는 침대가 2층으로 두개씩 있었고, 안에는 세면대도 있었다. 내가 여행다니며 타 본 그 어떤 침대차보다 시설이 좋았다. 세상에 이집트에서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될줄이야. 1인실 120달러라는 가격이 아깝지 않았다. 창 밖에는 여전히 시끌벅적하고 혼란한 플랫폼의 풍경이 펼쳐져 있지만 이 안쪽은 그저 아늑한 나만의 공간이다. 다른 세상으로 워프해 온 듯한 희열을 느꼈다. 역시 돈이 좋다.

좌: 침대칸의 복도, 우: 나만의 공간. 오른쪽에 둥그렇게 툭 튀어나온데를 열면 세면대가 나온다.

정확히 19시 45분, 기차는 느릿느릿 출발했다. 북적이는 풍경이 메아리처럼 멀어져 갔다. 드디어 카이로를 떠나는구나. 비록 혼돈과 혼잡함으로 사람의 진을 빼놓는 도시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재미있는 곳이었다. 언젠가 꼭 다시 돌아와서 제대로 이 도시를 느껴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이 먼 곳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나는 벌써부터 카이로가 그리워졌다. 하지만 그때만해도 고작 4일 뒤에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었더니 아까 그 표검사 하던 양복입은 아저씨가 있었다. 손에는 차내식이 들려 있었다. 음료는 뭐로 하겠냐는 물음에 오렌지쥬스를 달라고 했고, 식사 서빙이 다 끝나고 가져다 주겠다고 했다. 침대차의 차내식은 푸짐하고 맛있었다. 저녁을 못먹어서 더 맛있게 느껴졌는데, 향신료를 넣어 만든 황갈색 볶음밥이 내 취향이었다. 이집트에 오면서 기내식으로 나온 볶음밥도, 전날 알산의 해산물 식당에서 시킨 볶음밥에도 늘 이 맛이 났다. 무슨 향신료를 넣는걸까? 다음에 꼭 물어봐서 한국에 사가야겠다. 한참 밥을 먹고 있는데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아까의 그 양복아저씨였다. 오렌지쥬스를 따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는 20파운드라고 했다. 뭐? 20파운드? 아까 무료로 제공되는듯한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더니? 와.. 거기다 유료라는 사실을 알고 내가 안먹을수도 있으니 따서 주는 저 치밀함!! 내가 순진했다. 이곳에서는 내가 시킨거 외에 추가로 뭐가 나온다면 얼만지부터 물어봐야한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지금 와서 안먹는다고 싸울수도 없고. 나는 일부러 지갑을 어디다 뒀더라 하며 뭉그적대는 소심한 복수를 하며 20파운드를 줬다. 하여간 이놈의 이집트에선 잠시도 마음을 놓을수가 없다.

저녁 차내식. 왼쪽 구석 상단의 저 음료가 바로 20파운드(1400원)짜리 오렌지쥬스.

밥을 먹고 어두운 창밖을 멍때리며 한참을 내다 봤다. 밤에 기차를 타고 창밖을 내다보면 아무것도 보이는거도 없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쳐다보게 된다. 11시가 조금 넘었나? 아까의 그 양복아저씨가 와서 침대를 세팅해 줬다. 이제 자고 일어나면 룩소르겠구나. 카이로에 맞먹는 삐끼와 사기꾼의 천국이 룩소르라는 풍문을 들었다. 이제 그들을 상대하는데에는 이골이 났다. 말이 나온김에 나중에 이집트 삐끼들과 사기꾼들 혹은 삐끼사기꾼들의 유형을 한번 정리하는 글을 써 봐야겠다. 열차는 한참을 달리다가 한참을 서 있다가를 반복했다. 내일 아침 7시쯤 룩소르 도착이라고 들었지만 보아하니 분명 9시는 넘어야 도착할 것이 뻔하다. 나는 불을 끈 채 침대에 누워서 창밖을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룩소르 이야기를 꼭 쓰려 했는데 또 분량조절 실패로 아직 도착도 못했습니다. 다음 편에는 꼭 룩소르 이야기를 할 예정입니다.


사진이 꼭 '깨어나세요 용사여!' 처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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