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고대 이집트 뽕을 맞았다.
집에서 잘 때 보다 훨씬 깊이 잠들었던 거 같다. 딱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침대였음에도 달리는 기차의 흔들림이 오히려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벌써 룩소르를 지나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시계를 봤지만 고작 새벽 6시밖에 되지 않았다. 지도상으로는 아직 룩소르까지 100킬로미터도 더 남아 있었다. 커튼을 걷으니 마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나일강 건너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해는 참으로 장관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한 시간 정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제 그 양복 입은 승무원 아저씨가 아침을 가져다주었다. 어제저녁을 서빙하면서 주스를 권했던 것처럼 오늘은 차 한잔 마시겠냐고 권해왔다. 이거도 분명 돈 달라고 하는 걸 거다 싶어서 거절했다. 그런데 무료라고 커피나 민트 티가 준비되어 있으니 뭘 마시고 싶은지 재차 권하는 거다. 솔직히 20파운드 정도면 우리 돈으로 1500원이고, 기차 안에서 사 먹는 가격이라 생각하면 비싼 건 아니다만,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기에 이번에도 선뜻 내키지는 않았으나 무료라는 말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민트 티를 달라고 했다. 그는 바로 가져다주었다.
아침을 먹고 차까지 마시고 또 누워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기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아침 10시쯤 룩소르에 도착했다. 역시나 승무원 아저씨가 와서 곧 룩소르니까 내릴 준비 하라고 알려주었다. 짐을 싸서 문 앞에 서 있는데 이 분이 그러는 거다.
“나는 너를 위해 차를 제공했는데 혹시 나를 위한 무언가는 없니?”
역시나. 무료로 차를 준다고 했던 건 팁을 달라는 큰 그림이었던 것이다. 이쯤 되니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그냥 좀 웃겼다. 이제는 나도 슬슬 달관해 가고 있었나 보다. 이분도 참 먹고살기 힘들구나 싶기도 했다. 지갑 안에 있는 30파운드를 꺼내서 친절함에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건넸다. 그는 활짝 웃으며 즐거운 여행 되라고 나를 배웅해 주었다.
사실 이집트에서 여행을 잘하려면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팁을 달라고 한다고 빡칠 필요는 없다. 그냥 이쪽 여행업계 사람들의 문화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그냥 서비스를 잘 받았다고 생각하면 적당한 금액을 팁으로 주면 되는 것이고, 별로였다 싶으면 안 주면 그만이다. 물론 팁을 안 주면 표정이 썩어들어가긴 한다. 그래도 어쩔건데.
아무튼!! 아침 10시경에 룩소르에 도착했다. 원래 도착 예정이었던 7시 30분 보다 두 시간 반 정도밖에 더 걸리지 않았다. 유튜버 원지의 영상에서 룩소르까지 20시간이 걸렸다는 내용을 보고 나도 한 그 정도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정도면 거의 정시에 도착한거나 마찬가지지.
룩소르 역 밖으로 나오는 순간 역시나 수많은 호객꾼들이 달려들었다. 이곳에서의 호객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택시 탑승 혹은 투어 참여다. 난 예약해 둔 숙소가 걸어서 5분 거리였기 때문에 택시기사들의 호객행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일강 건너편의 왕가의 계곡은 거리 때문에 개인적으로 가면 비용이 좀 든다고 했기에 투어로 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누어 주는 팸플릿을 몇 개 챙겨서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는 정말로 걸어서 딱 5분 거리에 있었다. 스위트 호스텔 룩소르라는 곳이었는데 다행히 얼리 체크인이 되었다. 참고로 여기 구글에서는 ‘뉴 에베레스트 호텔’이라는 이름의 3성급 호텔이라고 나와있는데 절대 아니다 그냥 공용 욕실을 사용해야 하는 호스텔이다. 물론 가격도 싱글룸 기준 하룻밤 15000원 정도로 싸다. 방의 상태도 그냥 딱 15000원짜리다. 싸게 묵기에는 좋다는 뜻이다. 사장님은 나에게 방을 안내해 주고 대뜸 그랬다.
“자 이제 루프탑으로 올라가서 아침 먹어.”
“응? 아침?(갑자기?) 괜찮아 난 기차에서 이미 먹었거든.”
“이봐 친구 걱정하지 마 무료야 가서 너 먹고 싶은 만큼 먹어.”
“아.. 아냐 나 정말 밥 먹었어 괜찮아.”
거절을 하니 어쩐지 사장님이 시무룩해진 거 같았다. 사실 뭘 더 먹을 위장의 여유공간이 있기는 했지만 아침에 기차에서 당했던 소소한 훼이크(?) 덕에 가드를 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 기분의 문제니까. 사장님은 나에게 조식에 대한 안내를 해 주었다.
“조식은 아침 일곱 시부터 열 시 반 까지야. 그리고 몇 번이고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 당연히 숙박비에 포함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꼭 아침을 챙겨 먹고 다녀. 사람은 아침을 꼭 먹어야 해 이해했어?”
음.. 아침을 챙겨 먹으라니. 호텔 이름처럼 사장님 꽤나 서윗한 구석이 있는 분이었다.
짐을 대충 풀어놓고 오늘은 룩소르의 동쪽을 먼저 관광하기로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을 기준으로 해가 뜨는 동쪽은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 서쪽은 죽은 자들의 세계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안 쪽은 산 자들이 활동하는 신전이 지어져 있고, 서안 쪽에는 거대한 무덤이 있다. 이게 바로 투탕카멘의 무덤으로 유명한 왕가의 계곡이다. 먼저 룩소르 패스를 사야 했다. 룩소르 패스는 100달러지만 카이로 패스가 있으면 50달러에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카르낙 신전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룩소르는 그래도 지하철이 다니는 카이로나, 트램이 있는 알렉산드리아와는 다르게 대중교통이 엉망인 곳이다. 심지어 우버도 사용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야겠다 싶었다. 숙소 로비로 가서 사장님한테 카르낙 신전으로 가고 싶은데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다. 사장님은 자기가 태워주겠다며 20파운드(1500원)만 내라고 했고, 카르낙 신전 앞으로 이동했다.
룩소르 패스는 비교적 순조롭게 샀다. 카이로 박물관에서처럼 직원이 출근하지 않았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직원이 있었다. 다만, 룩소르 패스를 판매하는 직원은 엄청 뺀질댄다. 여권을 미리 복사해가야 하는데 나는 잊어버리고 복사를 안 해갔다. 그랬더니 복사비를 따로 요구했다. 얼마면 되냐고 했더니 알아서 달라고 한다. 한 10파운드 정도 주려고 했더니 자기는 이거 때문에 룩소르 시내까지 나갔다 와야 한다고 10파운드는 너무 적은 금액이라고 뺀질댔다. 내가 방 한쪽 구석에 있는 복사기를 가리키며 저건 뭐냐고 했더니 고장 났단다. 가서 보니까 멀쩡해 보였다. 잘 되는 거 같다고 하니 그래도 10파운드는 작단다. 나 역시 잔돈이 없다고 같이 뺀질대줬다. 그랬더니 이양반이 한숨을 쉬며 방 안에 있는 복사기로 내 여권을 복사했고, 룩소르 패스를 살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아휴 나도 한숨이 나온다.
카르낙 신전에 들어가기 전에 앞의 벤치에 앉아서 어떤 곳인지 검색을 해 봤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시설이라고 했다. 중왕국시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대충 4000년 전쯤부터 세워지기 시작해서 고대 이집트 마지막 왕국인 프톨레마이오스 시절까지 약 2000년간 증축과 함께 이용되던 시설이라고 했다. 무려 2000년 동안 사용된 시설이라니. 지금부터 2000년 전이면 중국에서는 대충 유비 관우 장비가 활약하고 있었고, 한국 역사에서는 주몽이 활 쏘고 있던 시절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던 건축물이 있다는 거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3~4000년 된 건물들을 맨날 보니 현실감각이 점점 떨어졌다. 카르낙 신전을 4000년쯤 전부터 2000년쯤 전까지 사용했다는 내용을 봐도 아 쫌 오래됐네 하는 정도의 생각만 들었다. 입장 게이트를 지나니 양쪽으로 스핑크스 조각이 죽 늘어서 있는 길 저 너머에 한국의 웬만한 아파트 높이만 한 황토색 건물이 서 있었다. 그 벽을 지나니 거대한 벽에 신들의 모습과 왕들의 모습 그리고 상형문자가 잔뜩 새겨져 있었다. 내가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섬세했다. 피라미드를 봤을 때랑은 또 달랐다. 피라미드는 비현실적인 크기로 사람을 압도한다. 급기야 이건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이나 거인이 만들었을 거 같다는 생각으로 빠지게 되었는데(아닌 거 안다. 사람이 만든 거 다 알고 있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카르낙 신전의 저 커다란 신전의 벽을 온갖 그림과 상형문자로 장식해 놓은 고대 이집트 문명의 성취에 빠져들었다. 고대 이집트가 달성한 문화승리의 증거가 바로 카르낙 신전이었다.
신전 내부로 들어가니 높이가 한 40미터 돼 보였고, 둘레는 3미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기둥들이 잔뜩 서 있었다.
역시나 기둥에는 온갖 그림들과 상형문자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이집트 고고학을 전공한다면 이 기둥 하나만 붙잡고도 박사논문을 쓸 수 있을 거 같았다. 실제로 대학 교수와 대학원생들로 보이는 연구팀이 몇 개의 기둥을 붙잡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기둥들이 세워져 있는 방이라니. 이집트 인들은 정말 간지가 뭔지 아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당시에는 돔으로 천장을 만들 기술이 없어서 기둥을 저렇게나 많이 세워서 천장을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럼에도 어마어마해 보이는건 사실이다.
새겨진 그림과 상형문자를 자꾸 보니 이제 대충 이게 누군지, 이 글자들은 뭘 뜻하는지 조금은 알 거 같았다. 특히 신들은 각자 특징이 있었다. 기둥에 새겨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돌아다니고 있는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집트친구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헤이 헤이 니하오~!!”
아 그놈의 니하오 지겨워 죽겠네. 하지만 우리가 서양인을 보고 대뜸 ‘헬로우’부터 박는 거랑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하며 니하오라고 대답해 줬다.
“너 중국인이야? 반가워!!”
“아니 난 한국인이야.”
“그런데 왜 니하오라고 인사해?”
“니들이 먼저 니하오라고 인사했잖아.”
얘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껄껄껄껄 웃으며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이쪽 사람들은 동양인인 내가 신기한가 보다. 호객꾼이 아닌 이집트인들이 나에게 말을 걸면 늘 이와 같은 순서를 따른다. 1) 니하오 - 나 중국인 아님 2) 어디서 왔니 - 한국 3) 사진 찍자. 내가 그러자고 하니 친구들을 마구 불러 모았다. 처음에는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순식간에 대여섯 명이 몰려들어서 돌아가며 나와 사진을 찍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이 살짝 들기도 했지만 이 친구들이 너무 해맑아 보여서 그냥 같이 찍어줬다. 나만 찍힐 수는 없지. 내 카메라로도 함께 셀카를 찍었다. 내 SNS에 사진을 올려도 되냐고 물었더니 다들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내 사진도 맘대로 올리라고 해 줬다. 그런데 한 명이 자기 얼굴은 안 나왔으면 하더라. 그래서 ‘니 얼굴은 가리고 올릴게’라고 했고, 그는 알겠다고 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