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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던킨다나스 Apr 01. 2023

당신의 성실함이 부끄러운가요

성실과 노력은 언제부턴가 부끄러운 미덕이 됐다. 그보다 영리함과 효율이 더 멋있는 이름이 되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멋없는 성실과 노력을 나의 가장 큰 무기로 살아왔다. 그게 천성인지 교육으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처음 내가 성취감을 느끼고 인정을 받은 것은 학교를 다니기 전 성당을 다닐 때였던 것 같다. 내가 그곳에서 칭찬을 받은 이유는 빠지지 않은 것, 미사나 교리에 조용히 앉아 손 모으고 있는 것. 그런 것이었다. 아이라면 하기 힘든 가만히 있는 것을 꽤 잘했던 모양이다. 그게 예닐곱 살 때였다. 요즘처럼 부모가 나를 그 나이에 학원을 보냈다면 무엇이 됐건 나름의 성과가 있었을 거라도 생각하지만 나의 모친이 강조한 것은 종교였기 때문에 난 그곳에서 처음 사회를 알게 됐고 주변 아이와 비교해 나를 인식하게 됐다.



그 이후 초등학교에서도 소란 부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기를 잘했고, 듣기, 받아 적기 이런 것을 곧잘 했다. 일기 쓰기나 그림일기에 그림 그리기, 자잘한 만들기 숙제도 열심히 했다. 준비물도 많았던 그때에 빠트리지 않으려 애썼고 각종 글짓기 대회며 그리기 대회도 입상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매번 열심히 했다. 이어지는 선생님의 칭찬이 달콤했다. 반면에 세 살 터울의 오빠는 항상 대충 했고 관심받기를 극도로 싫어했다. 오빠는 내가 집에서 학교 숙제를 하느라 바닥에 엎드려 몰두해 있으면 방문가에 서서 비아냥거렸다. 그 단골멘트는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 그렇게 해서 되겠냐, 쓸데없이“ 였다. 난 그러거나 말거나 내 페이스대로 했지만 아직도 그 말이 귓가에 쟁쟁한 걸 보면 그러거나 말거나가 아니었던 것 같다. 오빠의 그 말은 ‘나의 노력은 바보 같은 짓이다’라는 일말의 의심이 되어  내 마음속에 뿌리내린 것 같았다. 그런 의심과 최선을 다하는 내 행동이 오래 힘겨루기를 해 왔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학창 시절 명석하진 않았지만 성실함만으로 적당히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됐다. 초등학교 때보다 중학교 때가 중학교 때보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나았다. 그건 아마도 부모님도 아니 나조차도 기대 못한 일이었다. 인생 초반의 20년, 25년을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 성과로 나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내 정체성과 나에 대한 신념을 만들었다.



학교가 힘들긴 했으나 그곳에서 나는 비교적 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학교가 직장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 교사로 학교에서 생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어릴 때는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니 공부에 전념하도록 해라’ 그 하나만으로 많은 것이 면피되었던 일이 성인이 되어서는 생활인으로 해야 할 일에, 자녀양육에, 교육에, 살림에, 직장에서는 수업에, 업무에, 그리고 나 개인을 돌보는 일 등등 해야 할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전과 같이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되지’와 같은 마인드로 살았다가는 몸이 거덜이 나고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됐다. 그러다 출산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효율이란 것을 생각하고 업무도 수업도 가정일도 하게 되었다. 효율을 생각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에서 멈추기. 그 선에서 타협하기인데 오래된 관성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수업을 생각하면서도 이걸 하나 더 얹자 아니다 이걸 바꾸자 계속 고심하고, 작년 수행평가 내용을 올해 그대로 하면 되는 것을 이제 (내가) 지루해졌으니 새로운 걸 시도해 보자. 하고 괜히 멀쩡한 것을 갈아엎고 새 평가를 짜보기도 한다.



이런 나의 못 말리는 모습에 최근 동료샘과 갈등이 있었다.고심고심하며 새로 만든 평가내용을 동료샘에게 보여드리고 의견을 구했다. 세심히 매만지지 못해서 거칠고 과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을 살펴본 동료 샘은 나름 말을 골라한다고 하는 것을 나에게는 상처가 되는 피드백을 쏟아놓았다. 그 말이란 게 별게 아니다. 요는 너무 열심히 한다였다.



사실 학교에서는 그 말이 욕이나 다름없다. 너무 열심히 해서 주변에서 피해를 보고, 사교육에 지친 애들도 원하지 않을 뿐더러, 일이 많아져 적은 월급 받고 불필요한 고생을 한다. 뭐 그런 논리에서 그렇다. 일전에 정말로 과한 열정으로 민폐를 많이 끼쳤던 분이 계셔서 이번엔 내가 이 동료샘에게는 그 과하게 열정이 많아 불편을 끼치는 또 다른 사람이 되었구나 싶어서 속상했다. 그래도 내가 선배교사라면 이렇게 고쳐요라고 대안을 제시하며 말할 텐데. 왜 이렇게 사기를 꺾나 싶기도 하고. 여하튼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감정이 앞서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사나흘 생각과 감정이 발효되기를 기다리며 있어보니 좀 진정이 됐다. 첫째, 난 그 열심과 노력이라는 말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긴 역사 속에 그 말은 자랑과 부끄러움, 칭찬과 비난이 뒤엉킨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더 아프게 다가왔다. 둘째, 더 좋은 안이 아니라면 원래 안으로 가는 것이 맞았다. 굳이 평가를 바꾸자는 나를 말리지 못했던 샘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얘기한 것 같았다. 대부분 맞는 말을 냉랭하게 하는 것이 그 샘의 특징인 것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잠시 잊었구나 싶었다. 그런 작은 에피소드로 나는 열심과 성실을 던져버리고 ”제가 게을러서요 “ 하면서 자랑스럽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별다른 성과도 없이 오히려 빈축만 사는 일개미 같은 내가 싫었다. 그러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찾던 위로의 말을 발견했다.

잘 될 수 밖에 없는 너에게: 최서영

그래 이런 나 같은 사람들이 곳곳에 있구나라는 생각에 위안이 됐다. 문제는 열심히 사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 미덕 위에 같은 시간과 에너지라는 소중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하고 사용할까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유난히 예민해 과민반응을 하다 보니 눈멀고 귀 먼 상황이 잠시 되었다. 여전히 자기가 하는 일에 마음을 쏟는 모습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멋있는 것이라고. 굳이 숨어서 아닌 척할 필요 없다고 나와 나 같은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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