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운동 비판 글로 이번에는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운동'을 돌아보는 2편의 글을 싣는다. 2018년 《오늘의 교육》 47호에, 〈대학 입시에 던졌던 짱돌의 기록〉이란 제목으로, 입시 제도에 관해 벌어진 교육운동을 돌아보는 글들을 모으는 지면에 실렸던 글들이다.
나는 여기에 '투명가방끈' 운동의 의미를 해석, 재조명하면서 이전까지의 교육운동에 대한 비판을 일부 담았다. 다른 하나의 글은 내가 쓴 글은 아니지만, 내가 함께 활동했던 지인에게 익명으로 받았던 글이다. 이 글의 내용은 나와 그 사람의 공통의 경험, 여러 차례 나누었던 대화나 같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기에 나란히 싣는다. 이 글에서는 다소 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교육운동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사실 다른 사회운동에서도 없는 일은 아닌데)가 연대체 및 운동 등을 공식적으로 평가하고 해산하거나 재출범하지 않고 흐지부지 만드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현
"대학 안 갈, 수능 거부할 93/고3(구삼/고삼)을 찾습니다." 말장난 같은 이 문장부터 시작된 '투명가방끈'. 2011년 당시 '수험생', '대학 입시 당사자'로 여겨지던 고등학교 3학년 학생 또는 1993년생을 모아서 '대학입시거부 선언'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선언 운동에 호응하여 20대 이상인 사람들의 '대학거부 선언'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 운동이 시작된 배경은 복합적이다. 먼저, 2007년 무렵부터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국민운동본부' 등이 수능 시험일에 입시 경쟁과 대학 서열화를 비판하는 기자 회견을 열 때마다 몇 명의 '수능 거부자'들이 함께해 왔다. 보통 그들은 대안학교에 다녔거나 청소년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 선구자는 2002년 겨울 고3으로서 수능 거부 1인 시위를 한 박고형준이었다. 대학입시거부 선언은 그러한 흐름을 이어서 확대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꾸준히 입시 경쟁 교육 폐지와 대학 평준화 등을 주장해 온 교육운동의 담론 형성도 중요한 토양이 되었고, 2008년 촛불 집회의 자장 속에서 성장한 청소년운동 활동가들이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또한 2010년 고려대학교 김예슬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선언도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투명가방끈 운동에는 중등교육에서 입시 경쟁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학 시장화 등 대학교육 현실에 대한 불만이 한데 모여 있다.(대학/입시거부 운동의 전사와 배경에 대해서 더 자세한 내용은 《우리는 대학을 거부한다》(투명가방끈 지음, 오월의봄)에 실린 〈대학·입시거부는 어떻게 운동이 되었나〉 참고.)
투명가방끈의 대학/입시거부 선언은 2011년 48명, 2013년 7명, 2014년 3명, 2015년 5명, 2017년 11명, 2018년 13명이 참여하며 꾸준히 이어졌다. 2016년에는 거부 선언을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서울에서는 필리버스터 형식의 발언대를 운영했고 광주에서는 ‘모자라도 괜찮아’라는 제목으로 대학거부자들이 함께하는 문화제를 열었다.
투명가방끈 운동의 의의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한번은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 삶이 있는 운동이다." 투명가방끈 운동에서는 '거부 선언자'들이 전면에 서게 되고 그들이 겪고 고민한 이야기가 운동의 서사를 만들게 된다. 말하자면 '얼굴이 있는 저항'이다. 지나치게 거부 선언자 개인에게만 집중되는 언론 취재 요구로 인한 부담이나 그 과정에서 거부 선언자의 학교 성적을 묻는 문제, 악플 문제 등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운동의 장점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나는 그동안 교육운동이 '말만 무성한 운동'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왕왕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책에 반대한다는 활동을 할 때는 나았다. 그럴 때는 항의 방문, 집회·시위, 거부 행동, 직접 행동 등도 많이 조직되곤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착된 무언가를 바꾸자고 하는 운동, 특히 입시 경쟁과 대학 서열화를 반대하는 운동을 할 때면 무력감을 느끼곤 했다. 정책을 발표하고 대안을 내놓는 데서 그치고 있지는 않나, 둘러앉아 토론회만 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입시 경쟁과 대학 서열화에 반대하는 운동은 주로 교수나 명망가들이 하는 운동처럼 인식된 면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슈의 중요성과 폭발력은 충분히 컸음에도, 기존의 대중 조직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지는 못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적극적 운동 주체를 만들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의 인상이었다.
입시와 대학의 문제는 거의 모두의 문제였는데, 모두의 문제였기에 특정한 누군가가 당사자라고 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당장 차별받고 고통받는 당사자들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여건에 있기도 했다. 때문에 투명가방끈 운동 최대의 의의라 하면, '대학거부자'라는, 새로운 주체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고 전면에 세우는 운동이면서 학력·학벌 차별 등의 문제에서 당사자를 드러내는 운동이라는 점을 들고 싶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현재 70% 안팎으로 매우 높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세대에도 대학에 가지 않는 30%의 사람들이 있으며, 과거와 미래를 보면 더 많은 대학 비진학자들, 비대졸자들이 존재한다. 투명가방끈은 이런 이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세상에 보이게 하는 것을 운동의 목표 중 하나로 삼고 있다. 나아가, 입시 경쟁 교육과 교육에서의 차별 등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 이들이 혼자 고민하지 않고 만나고 연결되고 함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투명가방끈의 꿈이다. 이미 여러 대학거부 선언자들이 투명가방끈 활동에 함께하면서 힘을 얻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투명가방끈이 만들어진 지 만 7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아주 작은 규모의 단체이고 운동이라는 점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나는 대학거부에 대해 이해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병역거부와의 유비를 해 보곤 한다. 거부의 결과 직접 처벌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유사점이 많기 때문이다. 병역거부운동은 거부를 통해 평화주의를 주장하고 군사주의에 맞서 싸우는 사회운동을 만들려는 목표가 있다. 그러나 병역거부운동이 소수의 병역거부자들의 문제로만 좁혀지면, 운동이 대중적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포용의 문제인 것처럼 다루어지는 한계가 나타난다.(평화운동으로서 병역거부운동에 대한 논의는 [임재성(2011),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그린비] 및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여지우·최정민 옮김(2018), 《병역거부》, 경계] 참조.)
대학거부운동도 마찬가지로 교육 체제에 대한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소수의 대학거부자들의 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비추어지는 문제가 있다. 많은 차별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대학거부라는 실천 방식이 보편화되기 어렵기도 하다. 차별과 경쟁이 부당하다고 비판하기 위한 불복종으로서 대학거부를 선언하는 것이지만, 차별과 경쟁이 심하기 때문에 대안을 찾기 어려워서 거부를 선언하기가 꺼려지는 역설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육운동은 일각에서는 투명가방끈 활동 방식이 너무 '급진적'이고 공감을 얻기 어렵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또한, 거부나 비판조차도 일종의 자격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여기는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나는 그저 대학을 안/못 가는 것인데 거부 선언씩이나 하기는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가진 많은 이들을 거부자로 조직해 내는 것도 과제이다.
투명가방끈 활동의 과정에서 드러난 또 다른 문제는 '거부'의 딜레마라고 부를 만한 부분이다. 많은 대학거부 선언자들은 학교교육과 대학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거부 선언을 한다. 그러나 거부를 한 이후에 닥치는 삶의 문제는 학교교육과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문제들이다. 그래서 거부의 순간까지는 교육 문제의 당사자이지만, 거부 이후에는 아무래도 교육 이슈로부터 몸도 마음도 멀어지게 된다. 사회 안전망이 부실한 상황에서 대부분 거부 이후에 생계를 챙기려면 여유가 거의 없게 된다는 것도 현실적 문제이다.
그래서 투명가방끈은 '거부 이후의 삶'을 공동체적으로 함께 꾸려 가는 것을 단체의 목표로 동시에 두고 있다. 처음에는 단체 이름이 "대학입시거부로 세상을 바꾸는 투명가방끈"이었는데, 지금은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이 된 것도 이러한 맥락이 있다. 물론 삶을 바꾼다는 것은 개개인의 삶을 바꾼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모두의 삶을 바꾼다는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
이러한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투명가방끈은 '거부 선언을 하는 단체'만이 아니라 교육운동단체, 사회운동단체가 되기 위하여 고민하고 있다. 이를 위해 능력주의와 교육, 차별에 대한 연구와 토론, 세미나를 하기도 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운동 등에 연대하고 있으며, 교육 문제에 대한 입장 발표, 강연 기획, 사회 주택 사업 등을 기획하고 논의하고 있다. 투명가방끈 활동가들끼리는 우리가 청소년운동인지 청년운동인지 교육운동인지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그것이 우리의 고립이 아니라 확장성으로 연결되기를 꿈꾸고 있다.
(익명)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란 이름을 들으면 서글퍼진다. 내가 품었던 기대감과 바쳤던 열정의 반작용이다. 잠수 이별로 흐지부지 끝난 연애처럼, 그 시작은 가슴 뛰었으되 남은 뒷맛은 개운치 않다. 국민운동본부의 중심부에서 무언가 주도한 적 없는 사람이 평가하는 글을 쓴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하다. (그래서 익명으로 게재하기를 부탁했다.) 참여했던 한 사람의 회고로 이해해 주시길 원한다.
2007년 8월 말 경상대학교 정진상 교수가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학벌 철폐"를 위해 전국 자전거 대장정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연과 좌담회를 하며 전국 각지의 사람들을 만나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주장을 알린다고 했다. 이 대장정을 첫 활동 삼아서 9월 20일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국민운동본부(준)'가 출범했다. 대표 제안자의 명단에는 홍세화 학벌없는사회 대표, 장혜옥 전교조 전 위원장, 강내희 문화연대 대표, 김태균 민중학부모회 대표, 김정명신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대표, 조희주 진보교육연구소 이사장, 그리고 심광현 교수, 정진상 교수 등 쟁쟁한 이름들이 올랐다.
2004년쯤이었던가? 원내 정당이 된 민주노동당이 대학 평준화 방안으로 소위 '서울대 폐지론', 국공립대학교 통합 정책을 주장하면서 많은 논란이 일었다. 대학 서열화를 해소하고 학력·학벌 차별을 없애고 입시 경쟁 교육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대학 입학 시험 자격 고사화,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 등이 제시되었다. 관련 주제의 책도 여러 권 나왔다. 국민운동본부는 그런 정책 논의를 운동으로 만들기 위한 연대체였다. 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짐으로써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주장을 정리해서 알리고 운동으로 전개해 가는 구심점이 생겼다. 출범식에는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도 참석하여 정당과 운동단체 등을 아우르는 운동을 예고했다.
국민운동본부는 공식적으로는 단체들의 연대체가 아니라 개인이 가입하는, 광범위한 범국민운동을 벌이는 단위를 표방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단체를 꾸리고 운영하는 일은 필요했다. 중앙에서는 문화연대, 전교조, 진보교육연구소, 민중학부모회(이후 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로 이름 바꿈), 학벌없는사회 등이 주된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교조 내부 정파적으로도 그렇고 아무래도 교육운동 내의 좌파 그룹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던 듯하다.
그렇지만 전국 각 지역에서는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라는 주장의 매력 덕인지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충남 홍성에서는 입시 폐지를 중심 활동으로 삼은 청소년 동아리도 생겼다. 거리 선전전과 토론회, 강연 등이 꾸준히 진행됐다. 홍보물도 제작해 전국적으로 배포했다. 나도 한동안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날개 모양 휴대전화 액세서리를 주머니에 가득 갖고 다녔다. 교육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소년, 학부모 등을 만나면 가입을 권유하고 홍보물과 액세서리를 드렸다.
국민운동본부가 커지고 더 많은 사람이 운동에 참여하면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를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탁상공론이라는 소리를 듣던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가 운동이 되고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이 되고 현실이 될 것 같았다. 당장 이루지 못하더라도, 학교교육에 대해 불만을 나누고 대안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많아지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수능 시험이 있는 11월이면 여러 사업이 활발하게 기획되었다. 전국적으로 문화제와 거리 선전전, 강연 등이 이어졌고 옆 동네에서 무슨 활동을 했더라 하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2007년, 2008년이 가장 활발했던 것 같다. 서울 광화문 등지에서 열린 문화제에는 200명 넘는 사람들이 참가했다. 수도권에 살던 나도 서울 행동에 참가해서 함께 노래 부르고 외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돌아보면 2008년 이후로 국민운동본부의 활동은 계속 하락세였다. 2009년 11월 서울 문화제에는 넉넉 잡아 100명 정도 왔었나? 2010년에는 직접 세 보니 50여 명밖에 안 돼 한숨을 쉰 기억이 난다. 이름을 걸고 있진 않아도 사실상 같이하고 있는 큰 단체들이 회원들을 거의 조직해 오지 않은 것에 실망감이 컸다. 갈수록 커질 줄 알았는데 반대로 줄어들기만 하는 운동이 된 것만 같았다.
2009년 이후로는 국민운동본부에서 발행하던 온라인 소식지도 뜸해졌고 지역별로 열던 행사도 확 줄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10월이 되어 11월 수능 시험일에 맞춰 기자 회견을 하고 문화제를 열 거라는 공지를 받았다. 수능 시즌에 맞춘 정례 행사가 되어 버린 것 아닌가 싶었다. 평소에는 별거 안 하다가, 때가 돌아오면 기념일 챙기듯이 행사를 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국민운동본부를 꾸려 가던 사람들 개개인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로 교육운동의 주요 이슈는 일제고사 반대 등으로 흘러갔다. 그러다가 2010년부터는 교육감 직선제가 전면 실시되면서 진보 교육감들이 여러 지역에서 당선됐다. 그리고 운동의 화두는 또 혁신학교 정책, 무상 급식으로 옮겨 갔다. 그러다 보니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운동에는 힘이 잘 실리지 않았다. 민주노동당도 내부 갈등 끝에 분당 사태가 일어났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생업에 바빠서 그리고 지역 촛불 모임 등을 열심히 하느라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운동에 이전만큼 집중하지 못했다. 우리 지역에 별도의 모임이 있던 것이 아니고 주로 서울 활동에 참여해 왔기 때문에 더 그랬던 듯도 하다.
2011년에 '교육혁명공동행동'이라는 새로운 연대체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접했다.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국민운동본부'도 교육혁명공동행동 출범에 참여하는 단체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미 활동이 없어지다시피 한 국민운동본부가 이름이 올라 있는 게 기이하게 느껴졌다. 교육혁명공동행동도 전국 대장정을 하고 9월에 출범하여 11월에는 경쟁과 학벌을 강요하는 교육을 바꾸기 위한 거리 행동을 한다고 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그걸 끝으로 더 이상 국민운동본부의 활동 소식을 듣지 못했다. 나도 국민운동본부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었지만 공식 해산 논의도 참여한 적이 없고 관련 공지도 받은 기억이 없다. 그렇게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국민운동본부는 해산한 적은 없지만 사실상 사라진 단체들의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과연 제대로 존재하기는 했던 건지 헷갈린다. 국민운동본부에 가입한 나와 같은 '회원'이란 무엇이었을까. 국민운동본부를 시작했던 단체들이나 명망가들은 이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느끼기는 할까. 내가 교육운동에 대해 불신을 품게 된 계기가 바로, 국민운동본부에 대해 제대로 된 논의도 없이 새로운 연대체가 출범하는 모습을 본 것이었다.
국민운동본부 활동을 같이 했던 지인에게 국민운동본부가 흐지부지 사라져서 아쉽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지인은 "그거 결국 2007년 대선 앞두고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정책 이슈화하려고 만들었던 거 아닌가? 처음에 제안한 교수들도 대선 지난 뒤에는 거의 활동도 안 하지 않았나"라고 냉소적으로 이야기했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전교조 중앙을 어느 정파가 잡느냐에 따라서 연대체가 만들어지고 없어지고 하는 걸 자주 봤다. 다른 정파가 집권하면 과거에 전교조가 만든 연대체를 없애지는 못하지만 힘을 못 받는다. 대신 또 새로운 연대체를 만들고 주변 단체들에게 들어오라고 한다. 그래서 국민운동본부도 전교조 집행부가 교체되면 사라질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나에게는 조금 충격적인 평가였다.
정말로 그러했던 건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국민운동본부가 중요한 운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운동과 조직을 처음 만들어 가고 연락을 돌리던 활동가들의 진지하고도 즐거운 표정을 기억한다. 그들에게 진정성이 없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리고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주장을 알게 된 뒤로 교육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다고 하면서 주변의 친구들에게 열심히 이야기하고 다닌다고 말한 어느 청소년 활동가를 기억한다.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국민운동본부를 그런 이들의 뜨거운 열정과 희망과 행동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다시 '입시 경쟁 폐지, 대학 평준화, 학력·학벌 차별 철폐'를 전면에 표방한 교육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