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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현 Sep 23. 2024

교육운동에 부족한 것에 대한 짧은 생각

입시 폐지 운동의 사례로부터

교육운동 비판 글, 지금까지 썼던 글의 마지막으로는 2024년 3월에 《오늘의 교육》에 게재한 글을 조금 보완해서 싣는다. 여기에서 주로 지적하는 것은 교육운동이 정책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으로, (구체적 정책 역량이 부족하다는 등의 진부한 비판과 달리) 나는 정교한 정책이나 국가-교육청 차원의 로드맵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 운동에 대한 기획과 실천이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문제의 배경으로 교육 의제도 교육운동도 별로 '정치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꼽아 봤다. 글 마무리에서 썼다시피 사실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운동에 대한 이러한 성찰적인 평가와 토론을 집단적으로 나누고 활성화시키는 것 자체가 아닐까 한다.




몇 년 전, 이삿짐을 풀다가 운동 자료를 모아 놓은 박스들도 정리할 일이 있었다. 늘 그렇듯이 “지금 이 시간은 정리인가 독서인가”(가을방학(2020), 〈한 권도 줄지 않는 정리의 마법〉 가사 중.) 싶게 자료들을 하나하나 보는 기회였다. 2000년대의 선전물, 자료집 등을 살펴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나온 게 생각보다 최근이었구나. 2000년대 중반에서야 나온 거였네?’ 2006~2007년 무렵 처음으로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운동에 참여했던 나에게는 그게 교육운동이 오랫동안 주장하고 활동해 온 의제처럼 느껴졌는데, 사실은 내가 참여했던 그 무렵이 바로 운동 초창기였던 셈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입시 경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없었나?’


내가 운동을 시작하기도 전의 일이니 내부에서 오간 이야기까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굵직한 사건들과 자료들을 통해 되돌아보면, 입시 경쟁 문제에 저항하고 해결하기 위한 교육운동의 기획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98년 만들어졌던 ‘학벌없는사회’가 그나마 운동적 시도였다고 할 수 있을 테고, 2000년대 들어서야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 ‘서울대 폐지론’ 같은 것이 구체적으로 등장했으며,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된 건 2007년이었다. 이전에는 적어도 10여 년 동안 교육운동에서 입시 경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 주장을 내건 운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1980년대부터도 ‘살인적인 입시’, ‘비인간적 경쟁 교육’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교육운동의 주요한 동력이었는데 왜 정작 기획되고 조직된 운동은 없었을까.


그런데 또 한편에선 그럼 지금은 입시 경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운동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단적으로 말해, 진보적인 또는 좌파적인 교육운동의 주요하고 핵심적인 의제라고 했을 때 사람들 머릿속에 ‘입시 폐지’ 또는 ‘대학 평준화’가 떠오를까? 떠오르더라도 상당히 소수이거나 후순위에 있지 않으려나. 입시 경쟁 교육이 문제라고 오랫동안 말해 왔는데, 정작 교육운동은 입시 경쟁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운동이 아닌 것 같은 이 간극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     



문제는 정책? 


나는 그동안 교육운동이 ‘말만 무성한 운동’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왕왕 있었다. (……) 정책을 발표하고 대안을 내놓는 데서 그치고 있지는 않나, 둘러앉아 토론회만 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입시 경쟁과 대학 서열화에 반대하는 운동은 주로 교수나 명망가들이 하는 운동처럼 인식된 면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슈의 중요성과 폭발력은 충분히 컸음에도, 기존의 대중 조직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지는 못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적극적 운동 주체를 만들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의 인상이었다.
- 공현(2018), “얼굴이 있는 저항 만들기”, 〈대학 입시에 던졌던 짱돌의 기록〉, 《오늘의 교육》, 47호(2018년 11·12월). 


수년 전 대학 입시에 반대하는 운동을 돌아보는 《오늘의 교육》 기획에 이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입시 폐지 운동의 주요 주체들이 더 현실성과 설득력이 있는 정책을 만들어서 알리고 제안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그래서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 ‘수능 자격 고사화’, 최근에는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을 통한 대학 무상화’, ‘서울대 10개 만들기(거점 국립대 육성)’ 같은 정책안들이 계속 제출된다. 또는 언제는 프랑스, 언제는 핀란드, 언제는 독일 하는 식으로 다른 나라들의 사례들이 제시된다. 그렇게 만든 정책 방안을 알리는 책을 펴내고 토론회를 여는 것이 운동의 주요 활동 방식이다.


언젠가 한번은 집회에 가서 나눠 줄 유인물이라고 하면서 공유된 이미지에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가 뭐고, 먼저 어느 대학 몇 개를 통합해서 공동 학위제를 하고, 그 뒤엔 주요 사립대를 포함시키고…… 몇 년이 걸려서 대학 평준화를 할 수 있고, 소요되는 재정은 얼마이고……’ 하는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어서 이래도 되나 싶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지금도 계속해서 꾸준히 대학 무상화·평준화 주장을 알리는 1인 시위, 홍보 활동 등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노고는 값지다. 그럼에도 그와 별개로 운동의 기획과 방식에 대한 평가와 고민은 필요한 것 같다.


입시 폐지 운동을 하면서, 활동 계획 논의에서든 발언 내용에서든 나는 ‘사람들은 이미 교육 현실이 문제라고 생각하니까, 필요한 건 구체적 정책’이라는 인식을 감지하곤 한다. 즉, 이런 식이다. 


‘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이미 입시 경쟁이 문제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학생들이 입시 때문에 고통받는 게 문제라는 데 모두 동의한다. 다들 과도하고 망국적인 입시 경쟁과 사교육비, 학벌주의를 규탄하고 있잖나. 그런데도 바뀌지 않는 것은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를 몰라서, 바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현실성 있는, 가능해 보이는 정책·대안을 제시하면 된다…….’


하지만 사실 입시 경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대안이 없어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경쟁이 필요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에 상당히 동의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시민들은 학벌주의가 심각한 차별이자 문제라고 꼽으면서도,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반영한 학력·학벌에 따른 차별은 공정한 것이라고도 생각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흔히 교육이 문제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동시에 경쟁과 교육열 덕에 한국이 발전했다는 믿음, 공정한 신분 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전제, 능력주의 및 경제 논리 등 입시 경쟁 교육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는 복합적으로 강고하다. 교육운동은 먼저 여기에 대립하고 균열을 내면서 좋은 사회와 좋은 교육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다른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조직화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정책과 계획보다는 가치관과 세계관이다. ‘왜’, ‘무엇을’ 할 것인가부터 이야기되고 사회적 힘을 형성해야 하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 정책 논의는 그 다음이다.


입시 폐지 운동을 놓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비슷한 현상은 다른 데서도 발견된다. 대표적인 예가 혁신학교인 것 같다. 혁신학교는 수업과 학교를 혁신할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대체 그 ‘혁신’의 지향과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다 같이 추구할 만한 것인지를 두고 사회적 논의를 촉발하기보다는, ‘이렇게 하니까 좋더라’, ‘이런 학교를 실제로 만들 수 있다’ 하고 성과를 홍보하는 것이 더 우선시되었다. 물론 이건 혁신학교가 교육청의 정책으로 추진되어서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이런 부분은 교육운동이 이른바 ‘진보 교육감’ 이후로 교육청의 정책과 사업에 흡수되어 가는 모습과도 연관해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를 떠나서라도 교육운동이 종종, 어쩌면 자주 더 나은 정책, 현실성 있는 대안 및 사례를 더 우선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문제의식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의 부재 혹은 보수성


문제의 원인이 100% 설명되는 건 아니겠으나, 나는 그 배경에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잘 다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있다고 생각한다. 입시 제도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착시를 일으키곤 하지만 실은 한국 사회에서 교육의 지향과 내용 등에 관한 공적인 관심도는 그리 높지 않다. 교육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든, 어린이·청소년의 문제라서 시급하고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기 때문이든 교육에 관한 논의는 활발하지 않다. 교육 정책이나 개혁이 주요한 사회·정치 이슈가 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교육이 정치가 되지 못할 때, 교육은 교육 전문가들에 의해 논의되고 설계되어야 하는 일종의 공학적 영역인 것처럼 취급받을 수밖에 없다. 또는 좀 더 확장해도 흔히 ‘교육 3주체’로 불리는, 학교 내 구성원들만의 문제로 치부된다. 우리 사회가 학생을 여전히 ‘미성숙한 피교육자’로 위치시키고 있음을 고려하면 사실상 교사 집단과 양육자 집단만이 부각되는 구도이다. 최근 교육계의 주요 갈등이 전문가·공급자인 교사와 소비자인 ‘학부모’ 사이에 형성되는 근래의 상황 역시 근본적으로는 이런 구도 위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교육이라는 공공의 문제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인식도 논의도 부족한 채, 교사와 양육자 사이의 갈등이나 이해관계의 차이만 남게 된 것이다. 이처럼 교육에 대한 정치적 논의가 부재하니 교육운동 역시 정치적 이슈를 제기하기보다는 더 효과적이고 적절한 정책과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에 경도된다. 


더구나 기존의 교육운동이 상당 부분 교사운동 중심적이었다는 조건도 함께 작용한다.     


문제는 교사운동이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사운동 외에는 중심 역할을 할 주체와 운동이 없다는 조건에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교육에 무관심하기 때문, 더 정확하게는 교육을 교사 및 교육 전문가들의 소관이라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육운동의 이러한 한계는 교육의 근본적 체제 전환을 지향하는 것에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교육운동은 ‘교육 혁명’의 필요성을 말하면서도, 구체적인 쟁점에서는 기존 교육의 질서를 복원하는 선택을 내리기도 했다. 교사나 학교, 학생에 ‘정치적 중립성’의 족쇄를 채우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정치적 중립성을 내세워 교사·교수 등 교육 전문가의 권위와 지위를 지키려 했다.
- 난다(2024), 〈교육 체제 전환, 무엇을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가〉, 《2024 체제전환운동포럼》,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 조직위원회.

  

정치의 부재는 달리 말하면 기존의 통념과 체제가 유지된다는 것, 곧 보수성을 뜻한다. 최근 몇 년 사이 교육감 선거에서 보수 후보와 진보 후보의 공약에서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고들 이야기한다.(진냥(2019), 〈교육운동의 정치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다〉, 《오늘의 교육》, 50호(2019년 5·6월)) 선거 과정에서의 문제 때문도 있겠지만, 나는 진보적(이라고 하는) 교육운동의 교육에 대한 관점과 담론 역시 근본적으로는 기존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교육운동이 말하는 ‘공교육 정상화’나 ‘교육이 가능한 학교’는 기존 교실의 질서가 복원되고 순조롭게 운영되는 것과 얼마나 다른가. 교권/교육권(교육할 권리) 같은 말 속에서 교사는 교육‘하고’ 학생은 교육‘받는’다는 교육의 상을 답습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좋은 교육을 해야 한다’, ‘창의성과 시민성을 길러 줘야 한다’ 같은 말들은 교육의 큰 틀은 그대로 둔 채 전달되는 단어만 좀 바뀐 것은 아닐까.


또한 교육운동이 정치적이지 못하고 정책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운동이 폭넓은 변화 계획과 연결을 가지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운동과 부문의 분절이 어디든 심화된 때이긴 하다. 교육운동도 마찬가지로, 어쩌면 좀 더 심하게 다른 운동들과 연대하면서 더 거시적이고 유기적인 운동과 정치를 만들어 내는 데 실패하고 있다. 예컨대 입시 폐지 대학 평준화를 주창하지만, 학력·학벌 차별을 없애기 위한 운동(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이라거나)이나 대학을 민주화하고 구조 조정에 대응하는 운동, 노동에서의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운동과의 연결 고리는 희미하다. 직군별로, 집단별로 분화되어 단기적 불만과 요구에 끌려가는 일이 잦아지면서 이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듯하다.



우리에겐 언어와 연결이 필요하다


진지하게 교육운동에 대한 평가와 비판(나 역시 광의의 교육운동의 한 주체이니 자기 반성을 포함한)을 하고자 했다면 교육운동 역사를 개괄하고 문제적 장면들이나 방법론들을 유형별로 정리한다든지, 교육운동에 관한 비판의 글들을 모아서 흐름을 요약한다든지 했어야 할 것이다. 언젠가 해 보고 싶은 작업이긴 하지만, 적어도 나 혼자서 할 일은 아니고 교육운동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여럿 모여서 해 봐야 할 일 아닐까 한다. 이 글은 최근 ‘체제 전환’을 논의하는 자리가 활발해진 와중에 든 시평(時評) 내지 인상평이자 단편적인, 짧은 생각(斷想)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감안해 주길 바란다.


그래도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으로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우선 나는 입시 폐지 운동이 여전히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교육운동이 가장 주력해야 할 의제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운동이 정책 패키지보다는 교육이 어떠해야 하고 어떻기를 바라는가 하는 더 포괄적인 언어와 담론, 교육관으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가령,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사회에서도 능력주의 비판 담론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 논의를 운동이 흡수하고, 교육을 출발점 삼아 노동에서의 학력·학벌 차별이나 사회 전반의 능력주의를 극복하며 교육·노동 등을 모두 바꾸어 나가는 논의를 제시해야 한다. 커다란 체제의 변화를 던지면서, 그 변화를 이루어 가기 위한 각 영역에서의 중간 과제들이 정책과 의제로 제기되어야 한다. 꼭 능력주의 반대와 입시 폐지가 아니라도 좋다. 어쨌든 완전히 다른 교육의 지향과 그림을 이야기하는 언어를 만들고 그것이 운동에서 공유되어야 한다.


언어가 교육운동이 공유하는 가치이자 방향이라면, 구체적으로 언어를 공유하고 실천하는 운동 주체들을 만들어 내고 엮어 낼 수 있는 연결이 필요하다. 전통적 의미의 조직화도 중요하고, 교육운동의 주체들을 더욱 넓혀 나가려는 시도도 있어야 한다. 교육은 모든 시민의 공적 문제라는 인식 아래에 학교나 교육 3주체 등의 틀을 넘어 교육운동의 주체를 형성해야 한다. 교육운동과 다른 운동과의 연결 역시 물론 필요하다.


뻔한 이야기겠으나, 나는 우선은 내가 활동하는 단체에서 청소년운동의 주체를 잘 만들어 내는 일부터 잘하려고 한다. 그리고 학교 안팎의 여러 청소년 모임이나 동아리 등과의 연결을 만들어 가는 일부터 시작하려고 고민 중이다. 그리고 그런 연결을 통해 공유할 언어를 가다듬고 확산시켜 나갈 것이다. 다른 교육운동의 주체들은 어떤 평가와 고민을 품고 있을까? 애초에 우리에게 이런 논의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부터 반성해야 할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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