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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수리독서리 Nov 16. 2020

내가 네가 되는 과정

"매뉴얼 봐. 똑같이 한 거 있어."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이 한결같다. 매뉴얼만 보고 하는 게 업무라면 법전 받아 들고 판결을 내려도 되겠다. 질문이 잘못인가. 물어보는 입장은 백 번 천 번 고민하다 힘들게 꺼낸 말인데 작년 아무개 씨가 했던 문서를 보면 된다는 말을 듣고 있자니 참으로 허탈하다.


그래도 나름  뭐라도 생각해서 조금 다르게 기안을 하면 다르게 했다고 한소리를 듣고, 다시 Ctrl+C, V로 똑같이 기안을 하면 생각 없이 했다고 잔소리를 듣는다.  신기한 건 다음날 같은 문서를 보여주면 아무 소리 없이 프리패스다.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해주기란 어렵다. 업무를 알려주면서도 도대체 이 친구는 생각을 해보고 묻는 것인지 답답할 때가 물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무의 담당자이기에 질문에 답을 해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설사 상대방이 조금만 노력하면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답은 담당자가 쥐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업무에 '담당자'라는 건 아무런 필요가 없다. 아무개 씨가 해 놓은 문서만 찾아서 한다면 어떤 발전이 있을까.


"그냥 시켜."


시키는 것도 어느 정도의 선이라는 게 있다. 누가 봐도 뻔히 담당자가 있는데, 양심에 찔린다. 애쓴다고 누가 알아주는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니 그럴 수도 있다. 나 대신 힘없는 누군가에게 시키면 그만인 거다. 시키고 나면 미완성의 책임이 다른 누군가가 될 것 이기에 속도 편하다. 타인이 준 자료에 마지막 마침표 정도만 찍는다면 공은 내 것이다.


"짬만 채우면 돼요. 저도 안 할 거예요."


나쁜 건 참 빨리도 배운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습득이 되고 체화가 된다. 저런 대화를 하고 나면 속이 답답하다.


 시키는 대로 하면 호구라는 . 업무가 아닌 출근 날짜로만 승자가 되어 업무를 안 하고 미루고 있을 생각만 하게 한다는 것. 꼰대는 싫다고 하면서도 답습을 하게 된다는 것.


그렇게 90년생도 꼰대의 계열에 합류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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