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가 무르익어간다. 삶도 점점 더 촘촘해져 간다. 오늘 포스팅은 일하는 심리 상담 센터 오피스 사진으로 열어보려고 한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상담실이 책상과 의자를 둔 형태인 반면, 미국에서는 거진 카우치와 무드 등 세팅이다.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한국 세팅에서는 조금 더 격식이 느껴지고, 미국 세팅은 한결 캐주얼한 느낌이랄까. 그 분위기를 한 장 남겨보았다.
케이스 로드가 착착 쌓이고 있다. 원래는 한 달 더 일찍 시작했어야 하는 로딩이지만 뭐 어찌어찌 그리되었다. 처음에는 Practicum Hours를 많이 쌓지 못해 불안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학기를 가볍게 시작할 수 있어 오히려 좋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여하튼 지금은 케이스가 꽤나 많아져서 출근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채워 쓰고 있다. 다채로운 미국 내담자들을 만나는 것은 여전히 매일이 새롭고 흥미롭다.
조금 버거운 점이 있다면, 케이스 로딩은 쭉쭉 늘어나는데 반해 심리 상담 차트(노트)를 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영어로 차트를 쓰는 게 기본적으로 느리기도 하고, 슈퍼바이저가 native English가 아닌 점을 반복적으로 짚다 보니 더 여러 번 검토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시간 외 근무는 능사다. 내담자 차트는 아주 높은 수준의 기밀이기 때문에 AI를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하여, 안 되는 영어를 붙잡고 매일 씨름 중이다.
작년에 일한 슈퍼바이저 교수님은 상호 소통만 되면 영어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기에, 노트 하나 당 10분 컷으로 휘리릭 끝내고 넘길 수 있었다. 하여, 50분 상담 - 10분 노트 이렇게 딱 60분 사이클로 back-to-back으로 여러 케이스 연달아 맡는 것도 문제없었다.
그런데 이번 학기 새 슈퍼바이저 선생님은 계속 반복적으로 언어 지적을 해서 조금 스트레스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네이티브 영어가 아닌 것 같다고 한다. 속으로 네이티브가 아닌데 어떻게 네이티브 영어를 쓰냐고 말하는 상상을 하며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껴본다. 현실은 조용히 검토 또 검토...... 문체나 문법은 당연히 더 보완해 가야 할 부분이겠지만, 하루아침에 느는 것이 아니기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중간중간 스터디 준비도 한다. 개인 상담 케이스와 집단, 슈퍼비전, 스터디, 케이스 프레젠테이션 등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매일 피로도가 쌓여가는 게 느껴진다. 하여, 커피와 초콜릿을 달고 산다. 보통 돈을 아끼려 캡슐 커피를 싸가는데, 너무 피로할 때는 출근길에 던킨에서 아이스 라테에 샷을 추가해서 DT 해서 간다. 커피가 진하고 맛있어서 기분도 좋고, 정신도 쨍-하니 금방 깬다. 다크초콜릿이 피로 회복에 좋다고 들어서 기라 델리 다크초콜릿 바도 매일 가지고 다니면서 힘들 때마다 조금씩(?) 혹은 많이씩...... 먹는다.
나의 거친 하루를 함께 버텨주는 전투 식량들이다. 이 친구들 없는 하루는 상상하기가 힘들다. 느이들 없이 어떻게 하루를 또 버티니.
다른 오피스로 넘어와 보자. 이곳은 심리 상담 센터가 아니고, 학과에서 배정해 주는 오피스다. 개인 오피스에서는 혼자 티칭 업무도 보고, 연구도 하고, 오픈 스터디 공간에서는 다른 학생들이랑 Research Writing Group도 하고 그런다. 그래서 심리 상담 센터 출근이 없는 날은 이곳으로 출근을 한다.
이곳의 최대 장점은 위의 사진처럼 스낵과 차 종류가 구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오후 4시에서 6시 사이 정도 되면 꽤나 출출하다. 그럴 때면 얼그레이 한 잔 진하게 풀어서 달달한 도넛이랑 가져와서 자리에서 먹으며 일을 한다. 대학원생에게 공짜 스낵이란 사랑이다. 치명적인 단점은 공간 중앙에 개방된 형태의 대학원생 오피스가 교수님들 연구실에 포위당하듯이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오고 가면서 교수님들을 엄청 마주친다. 프라이버시가 조금 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최근에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연구가 잘 안 풀려서 한동안 속상했는데, 일부 잘 나온 결과와 나오지 않은 결과의 이유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전자 쪽에서 유의미한 설명을 발견하게 되었다. 쪼르르 발견한 것을 들고 지도 교수님께 가져갔더니, 디벨롭해볼 가치가 있겠다는 말을 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박사 들어와서 처음으로 A to Z 셋업 한 단독 연구 프로젝트여서, 애정과 시간을 많이 쏟았다. 당최 왜인지 모르겠지만, 전혀 새로운 이 집단과 사회에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여, 처음 계획한 대로 100% 결과가 나왔으면 했고, 설계 과정에서도 욕심을 많이 부렸다. 랩 연구비도 꽤나 많이 가져다 썼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결과를 보는 과정에서 상심이 컸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어서 데이터 셋을 들여다 보기도 싫은 시간이 있었다.
그래도 이런 마음들을 알아차리고 남편과 이야기해 보면서, 다시금 조금 더 현실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수정하면서 다시금 데이터를 돌려볼 용기를 얻었다. 어디까지는 잘 되었고, 어디가 안 되었는지 점검하는 과정에서 괜찮은 설명을 찾을 수 있었다. 앞으로 한동안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 계속 발전시켜 나가 볼 생각이다. 하여, 지금은 마음이 한결 편하다.
휴, 짠 내 나는 박사 과정의 길이여...!
위의 지난한 과정들을 지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운동과 요가였다. 요즘 주말마다 비가 와서, 가을 날씨 만끽하긴 틀렸고 실내 운동이나 했다. 달리기 삼매경에 빠져있노라면, 처음에는 복잡하게 머리를 채우던 생각들이 차츰 사라지고 어느새 그냥 단순한 사람이 되어있다. 요즘은 그냥 비트 빠른 세븐틴 음악에 집중하면서 콘서트 스탠딩 갔다고 생각하고 콩콩 뛰노라면, 어느새 무념무상의 상태에 다다른다.
요가는 긴장과 경직을 많이 풀어준다. 특히 요가 수업 선생님이 정신과 몸을 연결하는 부분에 탁월해서, 지시대로 몸을 한참 움직이고 나면 머리가 되게 맑다. 그리고 몸을 움직일 때 호흡을 어떻게 같이하는지 지시를 잘 해줘서 수업 내 폭풍 호흡을 하고 나면 뱃속 머리가 산소로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숨을 너무 많이 쉬어서 머리가 조금 띵할 때도 있지만 그냥 멍 때리면 된다. 학교 체육 시설이 잘 되어 있어 이런 서비스들을 무료로 누릴 수 있는 게 감사하다.
그리고 꼭 필요한 충전의 시간. 소파나 침대에서 재밌는 유튜브 브이로그나 흑백 요리사 보는 시간이다. 아, 세상에는 왜 이렇게 재미난 콘텐츠가 많을까. 행복하다 행복해! 유튜브는 대부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브이로그를 챙겨보고, 요즘 넷플릭스는 흑백 요리사와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꽂혀있다. 가끔은 전혀 다른 세상을 간접 체험하는 게 정신을 환기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 또,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자극도 많이 받는다.
오늘도 구구절절 잘 사는 일, 안 살아지는 일들로 수다를 남겨본다. 별일 없고 하릴없는 하소연을 매번 읽어주시는 분들께 소소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글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