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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만복 Aug 21. 2022

시란 무엇인가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1. 시의 세계관, 그리고 활과 리라


시란 무엇일까. 어떤 사물과 배경을 감상하고 표현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사회와 관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일까. 모든 시인들은 각기 다른 시상을 가지고 있다. 어떤 시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시라고 표현하고, 어떤 시인은 억압된 사회와 부조리에 대해 당당히 맞서는 것을 시라고 표현한다. 어떤 주장이 맞다, 틀렸다 할 수 없지만, 실제로 많은 시인들과 평론가들은 이 시상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대립이 생기는 이유는, 시를 표현이 아닌 가치로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예술작품의 가치를 가격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시 또한 그 가치를 정하는 과정에서 대립이 발생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작품들은 자기표현과 소명이 우선이다. 독자들과 관객들의 평가는 그 다음이다. 따라서 어떤 시상이 더 우수하고, 고급스러운지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과거 시인들은 시를 아름다운 환경과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는 마치 노래처럼 아름다웠으며, 바드들은 시를 가사 삼아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시는 혁명과 투쟁, 고발의 수단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시의 세계관이 나눠지게 되었다.


<활과 리라>에서는 태초에 아름다운 자연과 자신을 표현했던 시를 '리라'로, 혁명과 투쟁, 고발의 수단으로 사용되던 시를 '활'로 표현했다. 만약 이 두 사물에 쓰임새를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활과 리라를 본다면, 둘다 같은 사물로 바라볼 것이다. 경험과 지식의 습득을 통해 동심을 잃어버린 어른들의 눈에서만 활과 리라가 구분되는 것이다. 마치 예술을 세계관으로 나누어 바라보는 지금의 우리들처럼.



2. 시가 어려운 이유


인간은 표현 없이 살 수 없다. 우리는 표현을 통해 서로의 감정과 경험을 공유한다. 이 감정과 경험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으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호이자 상징인 셈이다. 물론 동물들도 서로 의사소통을 통해 감정과 경험을 공유한다. 하지만 동물과 다르게, 인간들의 의사소통은 생존이나 역할 담당의 기능뿐만 아니라 다른 수단으로서도 사용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은유적 표현이다.


이 은유적 표현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아닌 타자들과 상호 관계를 맺는다. 또한 서로의 감정들을 보살펴주는 구원의 기능이 있으며, 필요한 재화를 무력이나 희생 없이 요구할 수 있는 설득의 기능과 문화와 예술, 역사를 만드는 창조의 기능이 있다. 또한, 분리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공감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태초의 인간들은 은유적 표현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사물과 배경에 이름을 지어주었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일상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은유적 표현 중 하나가 바로 시다. 물리가 모든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일이라면, 시란 모든 생명들의 관계를 하나로 잇는 일이다. 그리고 이 상호 관계는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당신이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생소한 감정으로 언어나 몸짓, 글, 그림 등으로 무엇인가를 표현했다면 그것이 바로 시이며, 이미 세상에 있는 이미지나 텍스트로 무엇인가를 조립하고, 재정렬했어도 그것 또한 시다. 또한, 당신이 사물과 자연에 마음을 투영하고 표현했다면 그것도 시이며, 당신이 태어나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과 동물, 그리고 자연까지. 그리고 당신이라는 하나의 생명까지. 모두 누군가의 시이며, 누군가의 시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시인이란, 시를 전문적으로 창작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마치 사람들이 물리를 물리학자들만의 본업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은유적 표현을 일상 언어와 시적 언어라는 잣대로 선을 그어 시를 오히려 어렵게 만들었다. 시가 사람이 싫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시를 떠났다. 그러나 시는 독서와 암송을 하지 않는다고, 멀리하고 싶다고 결코 멀리 둘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당신이 태어난 것으로도 하나의 시이며, 당신이 살면서 하는 모든 것들이 시가 되기 때문이다.


한때 시인의 위치는 마치 부르주아 계급 같았다. 낭만 있는 지식인 같았고, 소신 있는 예술가 같았다. 하지만 시를 길들이려는 그들의 자만과 시를 이용하여 권력과 이익을 위해 투쟁하려는 이기심은, 오늘날 시를 이해하는 데 더 어렵게 만들었다. 시가 리라가 되고, 활이 되는 것은 그것의 이름을 붙여준 자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될 뿐, 그것으로 하여금 발생하는 폭력과 희생은 활과 리라를 사용하는 자들의 책임이다. 그에 반해, 어린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동심은 본래 시가 지니고 있던 속성에 오히려 더 가깝다. 그들은 이미 지어진 기호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때문일까. 어린아이들이 쓴 시는 태초의 시처럼 아름답고 순수하지만, 욕심과 고뇌를 품고있는 어른들의 시는 잔혹하고 냉정하다.


ⓒ Photo By JacksonDavid, Pixabay


3. 왜 시를 써야 하는가


인간이 시를 쓰는 이유는 시가 지니고 있는 관계성 때문이다. 관계성이란, 둘 이상의 대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성질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자신을 투영시키는 것이다. 본래 시를 창작하는 목적은 자기표현과 소명이 목적이었지만,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떠한 사물이나 배경에 대해 끊임없이 관찰하고, 공감하며, 대입시키는 구조를 취한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본래 생존을 위해 살아가지만, 수많은 관계 속에서 행복과 기쁨을 느끼며 그 속에서 자아를 실현시킨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들은 시를 쓰기 어렵다. 자신 외 다른 존재에 대해 관찰할 필요가 없으며, 공감하거나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자신 외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태초의 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름이 없는 자연과 사물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찰하며, 이를 통해 적절한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는 '햇살', '사랑', '달', '별' 등 아름다운 단어들도 그렇게 태어났다.


<활과 리라>에서는 단순히 '시란 무엇인가'를 넘어, 인간과 시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시를 쓰는 것은 단순히 창작욕을 넘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보완이고, 사회와 역사의 한 흐름이라고 주장한다. 또, 시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의한다.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 행위는 본래 혁명적인 것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기도 한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선택받는 자들의 빵이자 저주받는 양식이다. 시는 격리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시는 여행의 초대이자 귀향이다. 시는 들숨과 날숨이며 근육 운동이다. 시는 공을 향한 기원이며 무의 대화다. 시의 양식은 권태와 고뇌와 절망이다. 시는 기도이며 탄원이고 현현이며 현존이다. 시는 악마를 쫓는 주문이고 맹세이며 마법이다. 시는 무의식의 승화이자 보상이고 응집이다.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서문에서



4. 변화하는 인간의 삶, 그리고 시


현재 우리 사회는 의미보다 기호를 더 중요시한다. 과거에 독서란, 시간을 내서 차를 끓이고, 한가로이 책을 읽는 모든 과정을 말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책을 읽는 것, 그 자체를 독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독서의 가치는 변질되어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얼마나 많은 양의 책을 읽었는지, 또, 책을 읽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 본래의 독서의 의미가 아닌, 하나의 업무나 과제의 의미로 바뀌어버렸다. 독서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이 어려워진 독서를 간편하게 만들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닌, 보거나 듣는 것으로, 그것도 모자라 요약하는 것으로 발전 아닌 발전을 거듭했다.


고대에는 예술이 인간과 우주를 하나로 이어준다고 생각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간관계는 마치 은하수와 같고,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삶은 마치 별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되고, 별이 내려와 사람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순환하는 삶과 우주는 시, 음악, 그림 등 예술의 형태로 서로 이어지며, 이 상호보완적인 관계의 반복 속에서 모든 인간들의 삶이 향유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은 우주와 인간을 탐구하는 여유에서 벗어나, 이익과 권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고대 예술들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우주를 포함한 모든 만물들의 흐름을 담아냈다면, 변화를 겪고 난 후부터는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예술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특히 시는 은유법과 비유법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어떤 사물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에 나를 투영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그 사물에 나를 온전히 투영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타자의 속성을 공감하고, 양보하려는 따뜻한 마음과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에는 이미 정해진 기호로 인해 은유나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예를 들어, 칠흑같은 어둠에서 칠흑이란, 옻칠을 한 검은 빛깔을 말한다. 따라서 칠흑 같은 어둠이란 마치 옻칠을 한 듯 어둠이 검게 내렸다는 뜻으로, 은유적인 표현에 속한다. 하지만 현재 칠흑 같은 어둠은, 어둠을 표현하는 가장 상투적인 표현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 어둠을 다른 은유적인 표현을 하는 데 있어, 칠흑이 아닌 다른 속성으로 대체하기 어렵거나 생소하다. 앞서 말했듯이 은유적인 표현이 시간이 지나 기호가 되어버린 것이다.


시의 운율과 내용도 변해버렸다. 고대의 시는 텍스트보다 운율을 더 중요시했다. 하늘에 떠있는 태양과 달, 별처럼 각운과 연을 규칙적으로 만들었고,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만든 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우주 사이에서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내용도 인간과 우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조화와 순환을 담아냈다면 현재의 시는 자아와 세계, 사회와의 끊임없는 대결로 변해버렸다. 이것은 본래 인간들의 삶이 우주와 인간을 탐구하는 여유와 고민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아와 세계,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대립하며 고민하는 삶으로 바뀐 것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시들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또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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