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복 시집 #133
무엇인가 발전한다는 건
어쩌면 좋은 일이 아닐지도 몰라
공허하던 것을 채워줬던 넉넉함과
초라했던 날이 나눠주던 아름다움을
우리는 금세 잊어버릴 테니
늦은 새벽 쌓여가는 하얀 세상 위로
우리는 처음 발자국을 하나 둘 새겨갔지
발 끝과 머리 위로 전해지는 오케스트라에
오늘만큼은 저 딱딱한 것 위로 자빠져도 좋았는데
썩지 않는 사진 한 장이 우리의 한해를 지워버렸어
종이 백 장을 어깨 뒤로 던져가며
은근히 전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지
뜨거운 잉크 냄새가 코끝까지 전해지고
이 새벽이 다 가더라도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는데
묵혀가는 메시지들이 우리의 표정을 건조하게 만들었어
무엇인가 진화한다는 건
어쩌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닐지도 몰라
상처받는 말들도 그저 미련해 보였던
갈라지는 마음에서도 마냥 스며들었던
지난날 너와 나 사이에서는
황만복
백서른세번째 시
발전한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닐지도 몰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