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메모들 끌어올리기 - 2016년
영화의 첫 쇼트는 거울 속의 노인의 왼쪽 얼굴로부터 천천히 트래킹 아웃 하는 카메라 무빙으로 시작한다. 사실 거울에 비친 쇼트기 때문에 이 얼굴은 노인의 오른쪽 얼굴이기도 하다. 이 쇼트는 바로 두 얼굴의 존재인 야누스를 보여주는 쇼트이다. 노인은 두 가지의 얼굴을 가진 스파이임을, 이 첫 쇼트의 장면을 통해 감독은 암시하고 있다. 트래킹 아웃하는 카메라가 멈추면 거울 속 노인과 실제의 노인, 그리고 노인이 그리고 있는 회화 속의 노인이 쓰리 샷을 이루고 있다. 노인을 중심으로 한 대칭된 이미지다. 이 복제된 이미지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쇼트는 노인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정체성을 하나의 쇼트로 보여주는 쇼트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거울 속의 노인과 회화 속의 노인이 노인을 기점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인데, 실제 거울 속의 노인의 복제된 이미지와 회화의 복제 이미지는 같지 않다.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실제의 노인은 회화와 같이 만들어진 이미지와는 굉장히 다른 인간일 것임을 여기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는 다음 쇼트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마치 회화속의 노인은 전화벨소리가 울리는 쪽을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노인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시선이 맞질 않는다. 이는 이미 만들어진 회화 속의 노인과 실제의 노인이 다른 인물이라는 암시일 것이다. 다음 쇼트에서는 풀 쇼트로 노인의 공간을 보여준다. 많은 얼굴들이 담긴 초상화 화가처럼 보이는 노인의 방의 이미지, 첫인상은 바로 이어지는 트래킹을 통해 무너진다. 아마 이 방은 세트로 보인다. 트래킹 이후, 벽 뒤로 넘어간 공간은 지금까지의 노인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라디오와 전화기, 각종 기계들이 있는 공간. 바로 노인의 이중적인 삶을 공간의 미장센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며 노인은 전화를 받고 어디론가 향한다. 거리를 걷는 장면에서 노란색 택시가 등장한다. 노란색은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노란색 택시에서 노인을 쫓는 형사가 내린다. 이후의 장면은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추격전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이어 이 노인이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받고 FBI에게 체포되는 장면으로 진행된다. 앞 시퀀스들에서 영화는 방향을 이용한다. 아마도 이 영화의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은 이 방향을 이용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 일 것이다.
노인은 등장하는 쇼트의 대부분에 좌측에 위치하고, 대부분의 동선도 좌측에서 우측으로 이동한다. 또한 거의 대부분의 쇼트에서 좌측에서 우측을 응시하고 있다. 반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노인을 찾는 FBI들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이동한다. 이 두 인물과 집단의 방향성의 충돌은 1차적으로 이들이 대치하고 있는 관계임을 알려준다. 또한 아직까지 누구의 편에서 이 영화를 진행할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영화에서 좌에서 우로 향하는 인물이 선한 인물이자 주인공으로 묘사되어왔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열차의 이방인>에서도 영화의 시작점부터 좌에서 우로 향하는 선한 주인공에게 우에서 좌로 향하는 악한 인물, 안타고니스트가 접근하는 것을 방향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스파이 브릿지>에서도 이 노인이 소련의 스파이라고 설정되었지만 이러한 쇼트의 구성과 방향성을 통해서 우리는 이 인물을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냉전시대를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 방향성은 그들의 정치적인 방향성도 상징한다. 좌측에 있는 노인이 좌측의 인물, 즉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소련의 스파이임을 관객이 알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우측의 인물들인 FBI는 우파의 자유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설정된다. 이 영화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는 방향성을 통해 냉전시대를 설정한다. 노인이 체포되고 이어서 나오는 두 변호사의 대화에서도 이 방향성은 유지된다. 변호사 도노반과 밥의 정면 투 쇼트에서 볼 수 있듯 도노반은 왼쪽에, 밥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우리는 여기서 본능적으로 새로 등장한 이 변호사 도노반이 소련 스파이로 의심되는 노인의 편에 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방향에 위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노인(아벨)과 도노반이 만나는 공간을 살펴보면, 블루톤이 지배적이다. 노인의 옷, 도노반의 수트, 도노반의 노트, 심지의 도노반의 눈의 색깔마저 블루톤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조명 또한 백색의 주광 빛이다. 스필버그는 좌와 우로 나누어 놓은 인물들에 이제 색을 덧입히기 시작한다. 노인의 클로즈업에서 프란시스 중위의 클로즈업로 연결되는 디졸브 쇼트는 역시나 이 영화가 방향을 사용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좌’에 위치한 아벨과 ‘우’에 위치한 프란시스 중위. 쇼트의 전환에서 디졸브가 일종의 동격효과를 준다면 우리는 이 쇼트에서 프란시스 중위도 곧 아벨과 같은 위치에 처할 것임을 알게 된다.
다음 프란시스 중위의 쇼트를 보면, 이들이 위치한 공간은 레드톤이 지배한다. 커튼과 같은 방안의 소품은 물론이거니와 스탠드로 설정되어서 공간을 채우는 조명의 색감도 역시 오렌지 빛이다. 대화가 끝나고 다른 방으로 향할때의 프란시스의 공간은 다시 블루톤으로 변화한다. 이는 프란시스가 원래 빨간 색의 인물이었지만 파란 색의 인물로 변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 색채를 이용해서 인물들을 분리하는 장면은 계속 등장하는데, 도노반이 CIA 호프만 요원을 까페에서 만나는 장면에서도 호프만 쪽의 배경을 블루톤으로, 그리고 도노반의 배경을 레드톤으로 설정한다. 색채가 지배적으로 변화하는 이 두 쇼트를 반복해서 교차하면서 관객들은 색채가 쇼트를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깨닫는다. 같은 공간을 완전히 다른 색채로 분리하면서 관객들은 그 공간을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역시 스필버그는 이 색채를 통해서도 인물들을 분리하고, 대립시킨다.
이 영화는 ‘대립’의 영화다.
법정에서 판사가 들어오며 전원기립하라는 대사에서 아이들로 연결되는 쇼트는 인상적인데, 이 장면 이후에 집 안에서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도 도노반은 왼쪽에 위치한다. 이전에 등장했던 식사씬에서 도노반이 제일 오른쪽에 위치했었음을 볼 때, 도노반은 아벨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했고, 그로 인해 이제 반공교육을 받은 아들보다 왼쪽에 위치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반공교육 쇼트 다음에 아들과 아버지의 정측면 대립 쇼트를 만들어 낸다. 무섭지 않은가? 놀라운 속도로 도노반을 둘러싼 모든 이들이 도노반과 대립하게 되고 그 것은 도노반과 주변 인물을 포착하는 이러한 쇼트로 구성된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도노반의 쇼트 중 재미있는 부분은 신문을 보는 사람들을 보여주는데, JUSTICE(정의)가 뒤집혀 있는 신문이 보이는 부분이다. 정의가 뒤집혀 버린 사회. 이 하나의 쇼트를 통해 우리는 당시 미국사회의 분위기를 추측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쇼트의 중앙은 철봉을 통해 반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 쇼트의 미장센을 통해 역시 우리는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도노반이 이 뒤집혀버린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왼쪽’의 인물, 즉 빨갱이로 치환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가 그 사상에 동조하지 않고 단순히 정의 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지만, 영화는 그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대변하듯 그를 점점 더 왼쪽으로 몰아간다. 두 번째 감옥에서의 면회장면에서는 도노반과 아벨의 위치가 변화한다. 첫 번째 면회장면에서 아벨이 왼쪽, 도노반이 오른쪽에서 서로를 좀더 경계하고 대립하는 위치에서 도노반을 오른쪽에 놓고 관계를 설정했다면 두 번째 면회장면에서 아벨과 대화하던 도노반은 스스로 창문쪽인 ‘왼쪽’으로 향한다. 주도적으로 아벨의 왼쪽으로 향하는 이 장면에서는 도노반의 심경의 변화를 방향을 통해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자칫 ‘왼쪽’이 좌파라고 생각한다면 위험한 장면일 수 있겠지만 ‘아벨’이 위치했던 왼쪽으로 향하며 앞으로 사건에서 좀더 주도적으로 움직일 것임을 예상 할 수 있는 장면이다.
30년형 판결이 내려지고 아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에서는 플래쉬 소리들을 이용하여 뒤에 등장하는 총격과 장면을 연결 시킨다. 전구를 깨는(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유리창이 총격에 의해 깨지는 소리를 통해 영화는 도노반에게 향하는 미국 사회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다음 쇼트에서 위험상황에서 자폭을 하라고 시키는 장면의 방향성은 기립한 아이들의 쇼트와 연결되는데, 오른쪽에서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시선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특이한 지점은 교관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군인들 이후의 교관의 클로즈업 쇼트에서 시선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 즉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언뜻 보면 시선의 방향성이 틀려 연결이 안된다고 느끼는 이 장면을 통해 감독은 이 미국의 군인들이 합리적인 사고가 아닌 과도하게 세뇌되고 방향성이 강조된 사고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방향성의 대립은 다음의 법정쇼트와 전투기에 올라타는 프란시스 중위의 교차편집 쇼트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왼쪽’의 입장에서 냉전을 이야기하는 도노반과 오른쪽에 위치해서 전투기를 타고 생명을 담보한채 적국을 정찰하러 향하는 프란시스 중위. 카메라는 계속해서 위치를 이동하다가 도노반의 정면쇼트와 프란시스의 정면쇼트로 바뀐다. 이 장면은 결국 아벨과 프란시스가 이념적으로는 좌와 우에 위치하지만 결국 각자의 이념을 위해 싸우고 있는 인물이고 동일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 이후에 프란시스의 위치는 변화한다.
아벨이 있던 자리에 프란시스가 자리한다. 파란 배경에 갇혀있던 아델과 다르게 프란시스는 빨간 소련의 국기가 후경에 보이며 빨간 배경에 갇힌다. 그리고 아델이 있던 ‘왼쪽’에 프란시스가 위치한다. 영화는 정치적, 사상적으로 좌/우라는 개념이 국가가 변화할 때 상대적으로 변화한다는 개념을 이 쇼트를 통해 나타낸다. 이제 조종사 프란시스를 구하러 가야 한다. 프란시스를 구하러 온 대사관의 구조나 인물들은 매우 흥미롭다. 먼저, 문이다. 문이 열리는 방식들이 기존의 것들과 다르다. 대사관 직원이 문을 열어주는 쇼트는 밀어서 여는 문이 아니라 흔히 미닫이 문이라고 얘기되는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그 바깥의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 공간은 밀실이고 숨겨진 공간일 것이다.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근거는 다음 쇼트에서 도노반이 직원을 따라갈 때 열려있는 문의 구조들이 다 밀어서 열려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문 안에는 갑자기 도노반을 끌어안는 아벨의 가족이라고 말하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들의 연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도노반이 아벨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자 이상하게 울음을 터뜨리고, 보겔인줄 알았던 이는 아벨의 가족이라고 한다. 이후 벽인 줄 알았던 곳에서 이반 쉬스킨이라는 이름을 가진 서기관이 나온다. 그리고 가족들은 모두 울었던 것이 언제일인냥 당당하게 방을 걸어나간다. 그리고 서기관과 도노반의 대치가 시작된다.
이 대립의 장면에서 도노반은 우측에 위치한다. 도노반은 미국의 대리인으로써 소련의 대리인인 서기관을 만난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기관에 비해 우측에 위치한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이 시네마스코프 화변비율이 결국 좌, 우의 정치적 성향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다시 한번 명백하게 알아챌 수 있다. 이 영화가 냉전시대를 다루고 있고 냉전이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즉 좌 우로 명백하게 서로를 구분하던 시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인물을 잡아내는 구도에서도 그들의 위치를 다시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트래킹 무빙을 이용하여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주도권을 표현한 서기관의 쇼트가 지나고 도노반은 의문의 인물 보겔에게로 향한다.
보겔과의 대화 장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빛과 그림자의 사용이다. 의상에서부터 밝은색 톤의 정장을 입은 보겔 쪽의 배경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통해 더욱 환하게 표현되고, 어두운 톤의 정장을 입은 도노반 쪽의 배경은 빛이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이 장면은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현실적으로 어색한 부분은 사무실의 형광등이 마치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만큼이나 강한 것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보겔의 공간을 강화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고밖에 생각 할 수 없다. 앞서 장면들에서 색채를 통해서 인물의 대립구도를 강화했던 것처럼 이 쇼트에서 감독은 빛과 그림자를 이용하여 인물을 나누고 대립시킨다.
왜 보겔과 도노반은 색채가 아닌 흑백으로 보이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동독이라는 공간의 특성 때문에 그렇다. 동독은 소련에서 벗어난 민주공화국이지만 아직 소련의 영향권 안에 있고, 미국은 동독을 민주공화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색깔론이 사라진 곳과의 대립이기 때문에 이 쇼트에서는 최대한 색채를 배재하고 흑백으로 인물을 갈라 놓은 것이다. 또한 인물의 위치또한 그러한 지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미국의 대리인임에도 불구하고 왼쪽에 위치한 도노반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쇼트에서 보겔은 국가대 국가가 아닌 민간인으로서의 대화를 요구했고, 그 결과 아벨의 변호인인 도노반이 좌측에, 프라이어의 변호인인 보겔이 우측에 위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역시 CIA와의 대립이기 떄문에 아델의 변호인인 도노반은 좌측에 위치한다. 이 장면에서는 시네마스코프의 긴 화면비를 이용하여 1:1의 공간이 아닌 도노반 이외의 공간에 CIA들을 배치시킴으로써 도노반을 궁지에 몰고 있는 쇼트의 느낌을 더욱더 살리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은 프란시스를 수면고문하는 소련의 모습이다. 이 장면 역시 프란시스는 계속해서 오른쪽에 위치한다. 뿐만 아니라 부감과 앙각의 OS쇼트의 교차를 이용하여 프란시스를 압박하는 상황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씬에서는 밝은 빛에 가득찬 고문실과 어두운 감옥을 대비시키면서 프란시스가 잠을 자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아마도 프란시스는 일부 기밀을 누설 했을 것이다. 그것은 소련의 질문 이후 불이 꺼지는 쇼트, 즉 대답을 해서 잠을 자게 해주는 것에 대한 쇼트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된다. 또한 계속해서 우측에서 미국의 입장을 가지고 있던 프란시스의 위치가 좌측으로 변화하기 때문인데, 이 이후의 쇼트에 프란시스가 위치해있단 자리에서 아벨이 깨어나는 쇼트로 연결되며 이러한 지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후 서기관과의 협상을 타결하고 보겔과의 쇼트로 이어질 때, 우리는 앞서의 씬과 별개로 그들의 위치가 변화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씬에서 보겔은 소련의 통제를 받는 독일민주공화국의 대표로 이야길 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대표인 도노반의 좌측에 위치한다. 다음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느낀 장면이자 이념의 대립을 표현해낸, 바로 도노반이 기차를 타고 서독으로 넘어가는 장면이다. 도노반이 동독 쪽의 베를린 장벽에서 시작하는 민간인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사살되는 것을 바라보는 쇼트인데, 영화는 벽 하나를 가운데 두고 이념의 대립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도노반의 POV쇼트와 도노반의 반응쇼트 만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해낸다.
이제 마지막 장면으로 영화는 치닫는다. 바로 협상이 이루어지는 글리니커 다리의 장면인데, 이 양극단에 서있는 다리를 길게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화면비율과 아나모픽 렌즈의 사용을 택했을 것이다. 중간중간 초점이동 시에 보여지는 이미지의 왜곡은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했다는 흔적이기도 하다. 아나모픽 렌즈의 사용은 일반 렌즈와 다른 빛의 플레어나 보케를 표현하는데에도 사용된다고 하는데, 소련군의 뒤로 보여지는 강한 빛갈라짐이 보이느 쇼트에서 그 이점을 느낄 수 있다. 다리에서 대치하고있는 두 집단의 롱쇼트 측면쇼트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이 시점에서는 대립보다는 협상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러한 측면쇼트를 제외했을거라고 생각이 된다.
이 쇼트에서 인상깊은 장면은 유일하게 오른쪽에 위치한 아벨의 쇼트다. 아벨은 프라이어가 도착하기 전까지 자신을 끌어안을지, 뒷자리에 말없이 태울지에 대해 반신반의 하며 대치하고 있는데, 그때까지도 여전히 자신의 위치인 프레임의 좌측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도노반이 도착하지 않은 프라이어를 기다리며 협상을 지연시킬 때, 아벨은 도노반을 돕기 위해 우측에 선다. 즉, 앞서 프란시스가 고문에 의해 강제로 좌측의 위치로 변졀 되었다면, 이 쇼트에서 아벨은 도노반을 돕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우측의 위치로 ‘변절’한다. 시종일관 좌측을 고수했던 아벨의 놀라운 변화다. 아벨은 도노반을 도와서 미국 유학생인 프라이어와의 맞교환을 스스로 기다린다. 이것은 아벨 스스로의 ‘변절’일 수도 있지만 도노반이 만들어 낸 ‘변화’이기도 하다. 맞교환 이후 타인에 의해 변절된 프란시스는 웃는 얼굴로 돌아와 동료의 품에 안긴다. 그리고 아벨은 결국 안기지 못하고 뒷자리에 앉게 된다. 뒷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은 소련 스스로가 아벨을 이미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아벨이 마지막 쇼트에서 오른쪽에 위치하지 않았다면, 프라이어를 기다리며 도노반을 돕는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결과는 바뀌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벨과 프란시스가 다른 것은 아벨은 스스로 도노반을 돕기 위해 변절을 선택했던, 자신에게 당당한 선택이었지만 프란시스는 타인에 의한 변절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에 프란시스는 거듭 자신이 변절하지 않았음을 도노반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림을 보는 도노반의 장면은 앞서 아벨이 거울과 거울과 반대형상의 자화상을 보는 장면과 겹쳐진다. 영화의 끝에서 첫장면을 복기해보자면, 아마도 왼쪽으로 얼굴을 틀고 오른쪽을 바라보는 자화상은 소련이라는 왼쪽에 위치해있지만 미국이라는 오른쪽을 항시 주시해야했던 자신을 가장 정확히 드러내는 그림일 것이다. 그리고 아벨이 그려준 도노반의 자화상에서 도노반은 정면을 똑똑히 응시하고 있다. 아마도 개인에 불과한 도노반이 국가의 가치관을 넘어서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아벨의 존경의 표시일 수 있겠다. 돌아가는 길에서의 프란시스와 도노반의 정면 투쇼트에서 도노반이 프란시스보다 왼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대치로 읽혀지지 않는 이유는 서로가 마주보고 있지 않기 떄문이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도노반은 스스로의 결정을 믿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은채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 시켰고, 프란시스는 자신의 의견을 꺾고 변절했지만 그 사실에 마저도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투쇼트는 중간에 선을 배치함으로써 둘을 분명하게 갈라놓는다.
그렇게 도노반은 오랜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도노반이 아벨의 변호를 결정하고 난 후 전철을 타는 씬과 겹쳐진다. 그 장면에서 뒤집어진 정의의 눈빛으로 도노반을 바라보던 이들은 변화한 시선으로 도노반을 바라보게 된다. 이 장면의 반복을 통해 영화는 이 극적인 변화의 지점을 정확하게 대비시킨다. 재판 이후의 장면에서 도노반을 바라보는 쇼트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대치하는 것처럼 보여졌고, 그 거리감 또한 굉장히 멀게 표현되었다면 마지막 장면에서는 도노반을 바라보는 나이많은 여인의 시선은 마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처럼 표현 될 뿐만 아니라 그 거리감 또한 매우 가깝다. 이는 도노반을 보는 대중의 시선들, 나아가 스파이를 보는 대중들의 시선들이 혁신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도노반이 웃는 쇼트가 나온 이후 갑자기 표정이 바뀌는 도노반을 길게 잡아준 후 나오는 바로 다음 쇼트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봤던 풍경과 사뭇 다른 미국의 풍경이다. 마지막 장면은 아이들이 밝은 표정으로 벽과 울타리를 마음대로 넘어다니는 부분이다. 베를린 장벽. 단순히 나라 안에 세워진 단 하나의 장벽 때문에 많은 이들이 스파이로, 군인으로 희생되었고 그가 독일에서 보았듯 그 장벽을 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았다. 그가 해낸 것은 아주 일부 그 벽을 허물었을 뿐이었다.
마지막 쇼트에서 도노반의 옆에 프레임을 반으로 길게 잘라내고 있는 철봉을 미장센의 일부로 차용한 이유는 바로 도노반이 해낸 일련의 성공이 아주 작은 일부분임을, 아직도 좌우를 나누는 베를린 장벽과 같은 경계가 이 미국이라는 사회 안에 존재함을 보여주려고 헀던 스필버그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냉전이 종식되었지만 우리 사회안에서는 아직도 스필버그 감독이 표현하려고 했던 양 극단과의 대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국가의 가치관이 우선이고, 그 가치관의 보호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나 인권은 아주 작은 부분이 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스파이 브릿지>는 국가가 외면한 개인에 대한 시선을 다룬다. 도노반은 국가의 가치관을 벗어나 개인의 신념을 관철하고 작은 변화를 이끌어 낸다. 두 국가의 가치관 사이에서 개인의 행복을 이끌어 낸 셈이다. 그의 그 정치적이자 사상적인 위치는 바로 협상이 끝난 다리 중앙에 홀로 서있는 쇼트에서 드러난다. <스파이 브릿지> 스파이들의 가교, 다리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도노반은 그 스스로 다리가 되었다. 이 긴 다리 중앙에 혼자 있는 도노반의 모습을 표현할 때 반은 빛과 그 빛이 비추어지는 도노반의 모습, 나머지는 그림자진 도노반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좌와 우, 그 흑백 논리 사이의 정중앙에 자신을 놓아둔 그가 선택한 길이 바로 영화의 제목인 <스파이 브릿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