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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의 취향 Oct 19. 2018

그냥, 고마워서 그래요

세상에 당연한 건 없으니까

나의 '엑스 보이프렌드'는 아주 바쁜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는 그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후다닥 끝낼 수 있는 일인데도 유독 시간이 오래 걸렸고, 유난히도 힘들어했기 때문에 더욱 바빴다. 간신히 한 취업이라서 감히 때려치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연락이 잘 되지 않았는데, 그 일도 아주 늦게 끝나는 편이어서 평일에는 데이트는커녕 잠들기 전 통화나 간신히 할 수 있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늘 통화를 하던 도중에 곯아떨어지던 녀석이 그저 가엾게 느껴졌기에.


이별은 자연스러웠다. 나는 언제나 외로웠으니까. 그 애만 몰랐던 것 같다. 적잖이 놀라며 수차례 나를 붙잡으려 애썼지만, 근본적인 내 외로움을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이사를 할 것도 아니고 이직을 할 수도 없었으니.

친구들이 헤어진 이유를 묻기에 솔직하게 이야기했더니 어째 반응이 이상했다.


"그런 건 니가 좀 이해하지 그랬어?"

"너넨 주말에라도 보지, 나처럼 롱디는 한 달에 한 번도 볼까 말까야."

"으이구, 얘가 아직 환상 속에 있네. 꿈 깨라!"


핀잔만 잔뜩 먹어 배가 빵빵하게 부른 채 집으로 돌아오던 날, 처음으로 내가 욕심을 부렸나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연애는 정말 불가능한 걸까. 나는 매일매일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걷고 싶은데, 그건 정말 꿈같은 일일까.


그러던 와중에 만난 사람이 지금의 남편, '순'이다. 순은 이름에 들어간 글자처럼 순한 사람이었다. 외모가 둥그스름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이 없었다. 순과 나는 교회에서 만났다. 사는 지역이 같아서 퇴근 후에 아무리 늦은 시간이어도 동네에서 잠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가끔 내가 늦는 날이면 인천에서부터 차를 끌고 홍대까지 나를 데리러 왔다. 주말 교회에 가면 거기에도 순이 있었다. 썸을 타고, 사귀기로 한 이후부터 한 달가량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매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다들 꿈이라고, 환상이라고 했던 믿기지 않는 연애를 내가 하게 된 것이다.


기쁨과 행복을 넘어서 나는 황홀했다. 믿기지 않았다. 이런 게 가능했다니! 하루하루 감동과 감탄의 연속이었고, 언제나 고마웠다. 감사하고 기뻤다. 그리고 그 고마움을 숨기지 않고 매일매일 표현했다.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나를 보러 와줘서, 피곤할 텐데 시간을 내줘서. 순에게도 감격스러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고작 밤에 데이트 잠깐 하는 것으로 이토록 감동하는 여자친구를 만나기란 드문 일이니까. 날마다 고마워해주고 칭찬해주고 사랑해주는 여자 앞에서 순은 날마다 더 근사한 사람이 되어갔다.


전남친이 나를 덜 좋아하고, 순이 날 더 좋아하고,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사랑에 충실한 어른의 연애를 했으니까. 다만, 순은 나를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물리적 환경에 있었고, 평일 밤 데이트를 버텨낼 정도의 시간과 체력이 있었으며, 차를 몰고 먼 거리까지 나오는 것이 수고로울지언정 고통스럽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겐 너무나도 황홀한 순간을 선사해주었다. 나와 순은 서로 잘 맞는 사람이었고, 좋은 타이밍에 만나 더 사랑스러운 연애를 할 수 있었다.


이 사람과의 결혼을 단 한 순간도 후회해본 일이 없다. 시댁 문제나 다른 사람의 일로 싸운 적은 있어도, 순과는 다툴 일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 물론 지금은 신혼버프가 있을지도. 아주 오래 시간이 흐른 뒤엔 어떻게 변할지 그건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순이 변할 무렵에는 나 또한 변해 있을 것이 틀림없다.


순은 오늘도 퇴근이 늦은 나를 데리러 차를 타고 역까지 마중을 나왔다. 나는 역 안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순이 좋아하는 콜라를 한 캔 산다. 고마워서, 아직도 여전히 나를 만나러 기꺼이 와주는 이 사람이 고마워서. 오늘도 나를 데리러 나와줘서 고맙다고 뽀뽀를 쪽, 해준 뒤 콜라를 건네면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실헤실 웃는다. 이토록 착한 순, 그리고 귀찮을텐데도 순과 함께 나와준 착한 내 고양이.


나는 알고 있다. 세상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다는 걸. 와이프가 아무리 밤늦게 집에 온다고 해도, 본인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까지 끌고 나오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아마 남편도 알 것이다. 매번 고마운 마음을 담아 다정스레 건네는 인사들이, 고로케와 맥주와 콜라들이 당연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이 마음이 우리 부부를 더 따뜻하게 해준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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