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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과 사랑은 다른 말일까

영화 <낙원의 밤>

by 개인

Noir. 누아르는 프랑스어로 검은색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느와르라고 많이 읽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누아르가 맞는 표기이다. 1946년 프랑스의 비평가 니노 프랑크(Nino Frank)가 Film noir(누아르 영화)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하면서, 이후 누아르 영화는 영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누아르 영화는 암흑가를 다룬 영화로 범죄와 폭력을 소재로 어두운 분위기를 부각시키는 일종의 장르물을 가리킨다. 어린 시절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조직 세계를 다룬 누아르 영화를 볼 때면 폭력, 술, 담배, 여자. 이 모든 것을 낭만으로 해석하는 허세에 찌든 영화라는 생각만 들었는데, 성인이 되고 난 이후로는 누아르 영화를 보면 지독히도 여운이 짙다. 옳지 않은 것과 옳은 것으로만 구별되던 시선이 때로는 옳지 않아도 해야 하고, 옳아도 옳다고 말할 수 없는 세상을 겪어버린 시선으로 변화한 차이인 걸까.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영웅본색>을 시작으로 홍콩 누아르 영화가 한국에서도 붐을 일으켰다. 이후 <친구>, <비열한 거리>. <달콤한 인생>, <해바라기> 등 많은 한국 누아르 영화들이 제작되었고, 2024년 현재 한국 누아르 영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2019년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계획하던 영화 <낙원의 밤>은 코로나19의 여파로 2021년이 되어서야 넷플릭스로 개봉했다. 배우 엄태구가 주연을 맡은 첫 작품으로 "엄태구는 피 칠갑이 퍼스널 컬러"라는 팬들의 우스갯소리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영화이다. 영화의 제목이 <낙원의 밤>, 영어로는 <Night in Paradise> 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줄거리는 낙원과는 거리가 멀다. 배우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메가폰을 잡은 박훈정 감독은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낙원에 있지만, 밤이라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고 즐길 수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고.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의 배경인 제주도의 풍경은 처연한 주인공들의 서사와 대비되게 아름답게 스크린에 담겼다.


최근 한국 누아르 영화는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하는 듯 보인다. 뻔하다, 클리셰투성이다 등의 반응이 대부분인 것을 보면. 암흑가를 소재로 하는 만큼 2000년대 초반부터 무수히 제작된 한국 누아르 영화들과 스토리가 겹치는 경우가 많아 이렇다 할 인상 깊은 연출이 아니라면 눈에 띄게 색다른 점에 주목하기 어려운 장르이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감독의 색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르이기도 하다. 감독이 연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같은 소재를 다뤄도 다른 작품이 될 수 있는 것. 조직의 타깃이 된 한 남자와 삶의 끝에 서있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익숙한 듯한 소재이지만, 주인공들이 놓인 상황과 대비되게 아름다운 제주도를 담아낸 장면과 배경으로 깔리는 잔잔한 음악과 서로를 이해할 수 없던 관계에서 자신들만의 언어로 위로를 전하는 관계로 변화하는 주인공들의 서사까지, 박훈정 감독의 감성적인 누아르는 이번에도 그만의 빛을 발했다.


가족의 죽음 끝에 주인공들이 고요한 밤을 맞이한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여자는 함께 자자고 했지만, 남자는 자신도 취향이 있다며 옆방으로 향한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웃던 것도 잠시, 침대에 홀로 누워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자와 옆방에서 담배를 태우며 술잔을 기울이는 남자의 모습이 함께 카메라에 잡힐 때 조용히 심장이 내려앉는다. 타들어가는 담배만큼 쓰라린 속과 기울여지는 술잔만큼 삼키는 눈물. 그들의 낙원의 밤은 그렇게 흐른다. 조용하게 무겁던 밤이 지나고 아침, 둘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가고 남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식사거리가 없을 때면 공판장에 남은 해산물을 챙겨다 물회를 만들어 주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남자는 지금도 없어서 못 먹는 물회를 어린 시절 기억으로 지긋지긋해 하던 자신의 누나에 대한 이야기. 홀로 남아 떠난 사람에 대해 덤덤히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함께 물회를 먹는 여자는 죽은 삼촌을 떠올렸을까.


영화를 볼 때도 느끼지만 주인공들의 관계는 사랑으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남자의 괜찮냐는 질문에 "미친, 괜찮겠냐? 난 그러고 뻔히 안 괜찮은지 알면서 괜찮냐고 묻는 새끼들이 제일 싫어. 그냥 할 말 없으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든가."라고 날 서게 대답하던 여자는 어느새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남자에게 괜찮냐고 묻는 사람이 되었고, 남자는 여자의 답변을 따라 "너 지금 내가 괜찮아뵈냐? 난 말야. 안 괜찮은지 뻔히 알면서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고맙다. 그래도 물어봐 주고."라며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되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연민과 사랑은 다른 말일까. 죽은 자들 사이에 홀로 남겨진 자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로 변화할 때, 그것이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결국 연민도, 애도도 모두 사랑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애처로운 주인공들의 과거에 그보다 더한 비극이 덧대지는 이야기. 폭력이 낭만으로 인식되는 것은 지양해야 하겠지만, 짙어지는 피의 색깔로 무력감이 더해지는 서사는 누아르 영화만의 특색이다. 누아르 영화에 대해 뻔하다는 평이 많아져 버린 현실이지만, 그만큼 연출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누아르 영화를 깊이 들여다볼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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