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왔는가? 이게 몇 년 만인가? 자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떠나기 전에 봤으니 삼십년도 더 지났구만.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한번 다녀갈 거라는 얘기를 아버님한테 들었네. 사업은 잘되는가? 그래도 그렇지 고향을 삼십 년 넘게 찾지 않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
아무리 자네가 대학 나와서 곧바로 외국 가서 살아서였다 해도 이건 경우가 아닐세. 자네 아버님도 이제 내일모레면 여든 아닌가? 자주 찾아뵙고 살펴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한국에 돌아와 사업을 하고 있다니 자주 볼 수 있겠구만. 내가 자네 문중산을 오랫동안 지켜왔지만 종손이 오랜만에 나를 찾으니 더없이 반갑네.
특별히 나를 찾은 이유가 따로 있는가? 으음. 그런 사정이 있었구만. 아버님은 자네 사업이 아주 번창해서 머지않아 우리 고장에다가 큰 보탬이 되는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작년에 서울 다녀오셔서 내게 말씀하셨는데 그 뒤로 사정이 그렇게 변했는가? 음. 세상사 다 그렇지. 내뜻대로 다 된 담사 무슨 걱정이겠는가?
자네 말은 사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이 문중산을 팔고 싶다는 건가? 이 산을 팔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건가? 그 돈은 어디에 쓰일 돈인가? 문중산을 팔아서 지켜야 할 만큼 그 사업이 중요한가? 그 돈이 당장의 문제 해결에 충당하는 것 말고 또 어디에 들어가는 건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건 아닌가? 당초에 이 산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가? 이러는 게 단순히 종업원을 위하는 것을 넘어 자네의 개인적인 사업 야망 때문은 아닌가?
오해하지는 말게. 나야 자네와 일가친척도 아니고 이 산 지키고 세경 받는 일꾼에 지나지 않으니 자네 아버지나 자네가 이 일 그만두라면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는 건 잘 아네. 내가 이렇게 묻는 건 내 일자리 때문이 아닐세. 나도 산아래 밭뙈기가 살아있고 자식 놈이 일궈온 농장이 제법 잘 돌아가서 그 일을 거들어도 안사람과 나 둘이 살아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네. 이유라면 우리 부부 이 산 지키며 사는 게 마음 넉넉하고 좋아서이네.
세상을 자네보다 오래 살아온 사람 얘기로 생각하고 들어 보게. 문중산을 팔아서 돈을 대야할 정도로 사업이 기울었다면 그 산 다 팔아서 충당해도 얼마 못가 다시 오늘의 상태에 이를 것이 눈에 보이네. 이웃면에 홍 씨 가문의 문중 산도 그렇게 넘어갔고 가깝게 재넘어 마 씨 아저씨 문중 산도 그렇게 넘어갔고 멀리 볼 것 없이 우리 마을 송씨네 문중 산도 그렇게 넘어갔지만 그 후로 사업이 잘 풀렸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네. 남은 건 집안사람끼리 재산을 두고 싸움하는 모습뿐이고 서로 등지고 살게 되고 말더구만.
그 돈으로 사업을 다시 일으켜 잘된 담사 뭔 걱정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 사업이 다시 잘된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사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 키울 욕심에 끝없이 돈과 마음을 들이붓기에 바빠서 애초에 문중산 팔아갈 때 사업이 풀리면 다시 산을 마련하겠다고 철떡 같이 약속해놓고도 다시 벌충해놓는 사람을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네. 물론 자네도 그럴 거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네. 하지만 자네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주위 사람이나 상황이 자네를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걸세.
내 말은 그렇다 치고 문중에 다른 어르신께 말씀은 드려 봤는가? 종중에 속하는 산은 종손이라 해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게 되어있지 않은가? 법적으로는 총유라고 해서 종중의 동의 없이 처분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아. 그런가?이 산은 문중의 여러 형제가 공유 형식으로 소유하고 있어 지분권을 자네가 갖고 있다고? 그렇다 해도 문중산의 성격을 갖고 있는 이상 지분이라 해도 처분하기는 쉽지 않을 걸세.
문중 사람들이 다른 일은 종손인 자네 아버지 말씀을 다 들어왔지만 문중산에 대해서만은 그렇게 간단치 않을 걸세. 자네 작은 아버지만 해도 대대로 내려온 문중산과 선산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지 않은가? 더구나 이제는 시대가 변하고 종갓집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풍토도 많이 사라져서 자네 작은 아버지들이 동의한다 해도 막상 그분들의 자식인 사촌형제들이 순순히 동의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자네 작은 아버지들도 이제 칠십이 넘은 연세이기도 하고 자식들도 다 성인이어서 그들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더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제까지 자네가 삼십 년 넘게 내왕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사업 일으킨다고 문중산 팔아서 지분대로 나눠갖자고 한들 그 사람들이 쉽게 그 말을 들어주겠는가? 입장 바꿔서 다른 사촌이 사업자금으로 쓰겠다고 지분권을 주장하며 이 산을 팔아 쓰겠다고 나선다면 자네는 선선히 그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무릇 종손은 집안의 화합을 도모하고 자손의 번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자리일세. 하물며 종손이 문중산을 팔아 자신의 사업 중흥을 위해 쓰겠다는 것은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이해받기 어렵네. 괜히 이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문중에 분란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기 십상이네. 오직 다급하면 이런 생각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해는 하지만 이 일은 이렇게 푸는 게 아니다는 생각이 드네.
아무리 자네 앞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 해도 문중 산은 자네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찬찬히 자네 자신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게. 사업을 일으킬 때로 아니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청춘의 시간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게. 그러다 보면 어느 것이 더 중한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지 길이 보일 걸세.
세상은 다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이 나네. 자네 사업도 마찬가지 일세. 겉으로는 물질의 생산이지만 결국은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서고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 아닌가? 자네의 뿌리인 문중 사람들 마음을 다치게 하고서까지 일으켜 세워야 할 정도로 자네 사업이 중한지 생각해보게.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것 만으로 사업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 산을 파는 것 말고도 다른 방법을 찾으면 있을 것이고, 그 이상 더 많은 돈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 산 팔아서 들이부어도 종국의 해결책이 아니라 일시적 봉합에 지나지 않을 걸세. 사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산지기 얘기라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보게.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이 산을 팔아 사업을 다시 일으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그때 내게 다시 오게. 그때는 내 힘닿는데 까지 자네의 뜻을 다른 어르신들께 말씀드려줌세. 하지만 지금은 섣불리 종친어른들께 잘 말씀드려 달라는 자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네. 산 길 조심해 내려가게. 낙엽이 의외로 미끄럽다네.